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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풍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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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Aug 27. 2021

풍등(風燈) (5)

아버지 오른팔을 제게 주세요

엄마,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아요      


8월 31일이 아버지 기일(忌日)이다. 1924년생인 아버지는 1949년 전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임실 성수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혼담이 오갔다는데, 엄마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던 선배한테서 혼담이 들어와 신기했다며 청웅초등학교 전교생 중 아버지 인물이 제일 훤칠했다는 이야기를 돌아가실 때까지 되풀이하셨다. 엄마가 전해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전반부만 보면 마치 동화 속 이야기 같다.      


“아버지는 6학년이었고 나는 4학년이었는데 일제강점기라 교실이 부족해서 한 교실에서 공부했다. 머리를 빡빡 깎은 아버지의 두상이 참 동글동글했다. 남학생 두상이 다들 한쪽이 튀어나오거나 들어가고 뒷 꼭지는 납작했다. 그런데 아버지 두상은 들어간 곳 하나 없이 깎아 놓은 밤톨 같아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멋진 아버지가 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져 울고 있는데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진 건 여학생을 사귄다는 헛소문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아버지한테 말을 붙일 수 없어 애가 탔는데 혼담이 들어와서 어찌나 우습던지”      


엄마는 이 대목에서 웃음보가 터져 이야기를 더 잇지 못했다. 한참을 웃고 난 뒤에 엄마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급 반전한다. 그렇게 멋진 남자를 아버지의 또 다른 여인과 나눠야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남편을 빼앗긴 한(恨)과 본처의 격(格)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부덕(婦德)이 교차했다. 엄마는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한 덕분에 말년에 남편이 돌아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작은댁을 아주 잊은 건 아닌 것 같다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질투의 끈을 놓지 못했다.      


죽어서는 아버지 곁에 절대 안 갈거라 했던 엄마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자 아버지 옆으로 빨리 가고 싶다 노래를 불렀고, 8월 31일은 두 분의 제사를 함께 지낸다. 엄마에게 별이었으되 또 먼지 같았던 아버지, 두 분의 마음이 서로 닿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발 그곳에서는 미움과 증오가 없기를.      


흔적 없이 사라진 아버지 오른팔      


1924년생인 아버지는 1951년 즈음에 오른팔을 잃었다. 혼인한 지 1년 만에 6.25 전쟁이 터졌고, 교편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 당시 아버지는 빨치산은 아니었으나 붉은 물이 좀 들었던 거 같다. 신혼이었던 아버지가 엄마를 데리고 들어간 백련산은 골짜기가 깊었다.

- 산에서 산을 발견해 찍어두었다-

산이 높으니 골은 깊을 수밖에. 길은 갈래갈래 가닥이 나 있고 몹시도 미끄러웠다고 한다. 작은 세간살이와 옷을 싸 들고 산을 타고 가던 중에 엄마가 발을 헛디뎌 고무신을 놓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고무신을 찾기 위해 오던 길을 다시 갔고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아버지의 오른팔을 관통했다고 한다.      


남편이 총을 맞자 혼비백산한 엄마는 사람을 보내 친정에 아버지의 사고를 알렸고 아버지는 전주 도립 병원으로 실려 갔단다. 산으로 들어가다 총 맞은 사위를 재빨리 도립 병원에 입원시킬 만큼 엄마의 친정은 제법 대단했다. 산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임실에서 전주로 이송됐다. 가는 동안 아버지의 오른팔은 괴사가 진행됐고 병원에 도착할 때쯤엔 어깨까지 썩어서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전시 상황, 아버지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병원을 뒤흔들고 난 뒤 아버지는 혼절하고 말았단다. 오른팔이 모두 잘려 나간 뒤에 마취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혼미한 정신으로 불렀던 이름은 엄마가 아니고 아무개 동무였다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에도 “느그 아버지가 실은 그런 사람”이라고 공공연한 비밀을 은밀하게 누설했다.     


매일 싸웠던 왼쪽 오른쪽 날개

 

아버지는 평생 왼쪽 날개로, 엄마는 오른쪽 날개로 사셨다.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우리 집은 선거철이 되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김대중을 찍으라고 엄마를 다그쳤고, 엄마는 박정희를 찍겠다고 대들었다. 아버지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엄마는 표를 찍는 일만큼은 결연하고 단호했다. 두 분은 꼭 밥을 먹다가 싸웠다. 느닷없이 밥상이 날아가면 동생 셋은 밥그릇을 챙겨 외진 곳으로 숨고 나는 깨진 그릇을 치우며 그만 좀 싸우라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두 분이 어찌나 살기등등하게 싸우던지 누구 하나 죽어 나갈 거 같아 겁이 났다. 이 전쟁을 멈추지 않으면 집안이 박살 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나는 죽어라 싸우는 두 사람 앞에서 교복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놈의 집구석 다시는 안 들어온다. 집구석에서 배우는 게 쌈박질인데 학교는 다녀 뭐하냐고 교복을 찢어발겨놓고 짐을 쌌다. 그때 나를 잡은 건 아버지의 왼손. 엄마의 오른쪽 날개는 울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등이 휜 아버지      


사라진 오른팔이 살아있는 왼팔보다 무거웠던 걸까? 오른팔이 없어 교편생활을 접어야했던 아버지의 몸은 오른쪽으로 자꾸만 기울었다. 지금은 의수(義手)가 가벼워졌다는 아버지의 가짜 팔은 육중했다. 무거운 의수(義手)를 차셨던 아버지는 친구들이 모아준 책을 길에 내놓고 팔다가 풍남문 옆 시장에서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옷 장사를 하셨다. 전주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군복, 군용 담요 등을 떼어다 파셨고, 전당포에서 나온 이불과 양복 등을 받아서 이문을 남겼다. 문짝을 떼었다 달았다 하는 점포 문을 왼손 하나로 어찌 감당하셨을까?      


전동시장에서 교동 향교까지 짐 없이 걷기에도 먼 거리다. 그런데 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수박을 사들고 오셨다. 삼복더위는 수박으로 식혀야 한다면서 한 손으로 움켜쥐고 온 부정(父情), 그분의 삶이 얼마나 버거웠을지 살아 계실 때는 미처 헤아려 볼 겨를이 없었다. 엄마를 두고 새 여자를 맞아 분란을 일으키는 아버지가 밉기만했다. 내가 선을 넘어 위험하고 무모한 사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아픔이 만져졌다.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둘이 나 둔 아버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을 터, 여자가 둘인 남자는 애간장이 타서 똥도 돌처럼 굳어 개도 안 먹는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그랬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처절했던 관계, 이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또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인 엄마도 이해한다.  


아버지의 여인은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갔다. 삶이 자꾸 어긋나자 아버지는 투전판에 발을 들여놨고 얼마 안 되는 가산을 순식간에 탕진했다. 그 덕분에 엄마는 아버지가 밖에서 나온 자식 둘까지 4남매를 데리고 친정살이를 했다. 이렇게 곡절을 안고 커온 우리 4남매는 다행히 우애가 깊다. 아버지가 유산을 남기지 않아 가능한 일. 두분의 기일도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아들이 챙긴다. 아버지 참 잘하셨어요!!!      


고마워요. 아버지      


아버지는 처자식이 있는 처가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학교로 간간이 나를 보러 왔다. 의수(義手)를 감추느라 한 여름에 겨울 양복을 입었던 내 아버지의 그림자는 꽤 두터웠다. 과자 봉지를 들고 청웅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서성거렸던 아버지의 겨울 양복 소매는 왼쪽만 닳았다. 나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왼손은 꽤 긴 시간 내 등을 다독였고 그 느낌은 지금도 선명하다.      


오른손이 없어 구두끈이 풀려도 잡아매지 못했던 아버지의 고단한 생애. 산으로 가지 않았다면 잃어버리지 않았을 아버지의 오른팔, 36년 전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쓸 때 오늘의 영광을 아버지의 오른팔에 올려드린다고 했다. 이번 기일에 올릴 제주(祭酒)는 아버지의 별이 흘리는 눈물, 음복하면서 이 말을 꼭 드리고 싶다. 제발 그곳에서는 오른쪽 왼쪽 색깔 갖고 싸우지 말라고!



오른팔이 전하는 말       -박길숙


흔들리고

부딪히면서

너에게로 간다


한치라도 더 가까이

너에게로 닿고 싶어

으깨어 부서지면서

너에게로 가는 길목  


붉새 구름 끝에 묻어온 빗줄기에   

눈물샘을 뚫고 나온 눈물이 합류하고  

어디로 흘러갈지 노선을 묻지 말라 한다     


이정표가 사라진 길 위에는

노선 잃은 발자국이

숨 가쁘게 찍는 마침표 빡빡한 비망록


푸른 날줄과 붉은 씨줄이

살갗을 뚫고 나와 서로 보듬는

정맥과 동맥의 교차점에


오오!

손톱 끝에서 어깻죽지로 차오르는

흰피톨 붉은 피톨의 아우성

 

밟아도 밟아도

자꾸만 고개 쳐드는

백련산 넓은 솔 버섯   

친구가 보내준 <넓은 솔 버섯>입니다. 삶의 애착도 그리움도 모두 삭아진 낙엽 속에서 피어난 <넓은 솔 버섯>이 어쩌면 아버지의 오른팔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번쩍 손 들어 나 여기 있다 하는 걸 보면요. 산에서 <넓은 솔 버섯>를 보면 아버지라고 불러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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