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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Dec 12. 2021

일흔

- 출사표 - 

우선 먼저 브런치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께 새해 인사드립니다. 검은 호랑이해 2022년 임인년에 품으신 뜻 모두 이루시고 무엇보다 건강.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제 스무 밤만 자면 제 나이 일흔입니다. 살면서 아홉수라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어느 날 이부자리를 차고 일어나 보니 서른하나, 마흔하나, 쉰 하나, 예순 하나였어요. 그리고 이제 일흔 줄에 접어드는데 비로소 철이 좀 드는 거 같습니다. 10년 전 육십이 될 때가 생각나네요. 육십이 되자 하고 싶은 일들이 속에서 들끓어 올랐습니다. 밥 먹고 사는 무게를 벗어버리고픈 욕망이 무지막지하게 끓어올랐습니다. 하지만 밥벌이 사표를 던지기엔 지갑이 너무 가벼워서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일을 놓는 건 무섭습니다. 그래서 사표 말고 출사표(出師表)를 던지기로 했어요.  

요즘 들어 격하게 아버지 손을 씻겨드리고 싶네요. 제가 아버지의 왼손을 씻겨드리기 시작한 건 예닐곱 살 때부터였습니다.  아버지는 오른팔이 없어 왼손을 씻지 못하셨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대야에 물을 받아 아버지 앞에 놓아드리고 왼팔 옷을 걷어드리면 왼손으로 낯을 씻고 무장해제된 손을 내게 맡기셨어요. 폭음 후 주사(酒邪)가 심했던 날도, 엄마와 사생결단을 하듯 싸워 집안이 난장판이 됐던 날도 아버지는 제게 왼손을 맡기셨습니다.


징글징글하게 사나웠던 아버지 손은 대야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순해졌어요. 아버지 왼손이 말썽을 많이 부린 날이면 저는 아버지 손을 더 오래 물속에 담가 놓고 비누를 많이 발라 박박 문지르고 손톱이 불을 때까지 씻겨드렸어요. 불어서 말랑해진 손톱까지 깎아드리고 나면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요. 어쩐지 아버지가 화투판에서 손을 뗄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손톱을 깎아드린 후에 좀 오래 잡고 있는 날도 많았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나서는 아버지 손을 여동생들이 연달아 물려받았습니다.  여동생들이 결혼하고 나서 아버지 손은 비로소 엄마 차지가 되었고, 엄마가 아버지 손을 씻겨드린 후로 두 분의 갑을관계는 역전되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 손을 씻겨드리면서 곰팡이 낀 고리짝 이야기를 꺼내 아버지 심장을 긁어댔지요. 그러면서 두 분은 싸울 기력도 없을 만큼 늙어갔습니다.      


아버지 연세가 지금 제 나이보다 조금 위인 일흔다섯 되던 해에 저는 다시 아버지의 손을 맡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 온 날에도 아버지 손은 꼭 씻겨드렸습니다. 술 취해 대야에 꼬꾸라지면서 아버지 손을 씻겨드렸어요.  아버지는 제게 손을 맡긴 채 그러다 몸 상한다. 부애가 나도 술로 풀지 말라 하셨습니다. 저는 글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동동거리면서도 아버지 손을 씻겨드렸어요.  아버지는 불안한지 괜찮다고 하셨는데 이상하게도 손을 씻겨드리고 나면 글이 술술 풀렸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도 저도 손이 제법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아버지는 깨끗해진 왼손을 곱게 흔들며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입관하실 때 아버지는 온전한 몸으로 환생하셨지요. 의수 대신 솜을 꽉꽉 채워 만든 아버지의 오른팔은 건장했습니다. 왼쪽 오른쪽 어깨가 기울어진 곳 하나 없이 반듯했어요. 수의(壽衣)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헌헌장부((軒軒丈夫). 오른팔을 잃기 전 아버지 모습을 비로소 만났습니다. 요즘 아버지 손이 많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아버지 손을 씻겨드리듯 제 손을 맞잡고 씻어 봤어요. 손을 비벼보기도 하고 주물러보니 살과 살이 닿는 황홀한 촉감이 참 좋습니다. 

새해를 기약하고 잎을 모두 내려놓은 나무처럼 제 손도 그러하길 바랍니다. 손을 씻은 김에 합장하고 눈을 감아보니 새로운 각오가 생기네요. 사진 속 풍경은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이랍니다. 절친이 혼자 보기 아깝다며 찍어 보내줬는데요. 저 길을 저는 한 번도 밟아보지 않았습니다. 가보지 않은 미답(未踏)의 길은 무섭습니다. 살아온 예순아홉 해보다 고희(古稀) 첫해 1년이 더 힘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젊었을 때 보다 손을 깨끗이 씻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친구가 보내 준 <분홍 콩 먼지버섯>입니다.  요 먼지는 곱기라도 하지요. 제 손에 묻은 먼지는 숯검댕이입니다. 하여, 지금부터는 손을 깨끗이 씻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자 다짐합니다. 평생 병장(兵長)으로 살아온 먼지 같은 삶. 고희(古稀)로 출병(出兵)하는 저의 출사표(出師表)는 매일 손 씻고 합장(合掌)하기. 어쩐지 저의 칠십 대가 황홀하리만큼 찬란하게 불타오를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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