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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길숙 Dec 29. 2021

이명희 이야기(8)

속속들이 : 깊은 속까지 샅샅이 

 

눈 뜨면 불현듯 하루가 불안하다. 마음 한쪽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여,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나침판을 보고 하루의 방향을 정한다. 나침판은 나이기도 하고 벗이기도 하다. 또 피붙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일은 거의 긍정적이다. 일어나 휴대폰을 보니 간밤에 명희가 카톡을 보냈다. 


이장 감투를 쓴 동생은 겨울에도 농한기가 없다. 딸기 하우스 농사일과 마을 일로 몸이 열둘이라도 모자랄 판. 그 귀한 짬을 내 눈밭에 엽서를 써서 보냈다. 밥 잘 먹고 기운 내서 힘차게 살아가자는 명희의 당부 또한 이 어두운 새벽에 나의 나침판이다.  

명희는 올해도 배추 400포기가 넘는 큰 김장을 했다. 거의 일주일 넘게 김장 품앗이를 한 덕분에 명희네 김장 날에도 많은 벗이 모였단다. 사람 사는 세상이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있지만, 명희가 사는 함평은 옛날 그대로 맑은 청산(靑山)이다. 

날이 좀 밝아지면 명희가 보내준 따뜻한 쌀밥에 명희가 보내준 김치를 쭉쭉 찢어 소박한 밥상을 차릴 예정이다. 그동안 허술했던 목숨의 운영이 오늘은 제법 잘 될 것 같다. 



여적(餘滴); 벼루에 먹물이 남았다


오늘 새벽은 또 내가 좋아하는 박재삼 시인의 시 <무한정 속에서>가 나의 나침판이 되었다. ‘갈 길은 아직 먼데 / 어디선가 꾀꼬리 울어 /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네/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면 / 그로써 일은 일단 끝날 것 같지만 / 천만에! / 그렇지가 않네 / 다른 더 예쁜 사람이 눈에 들어 온다구’      


박재삼 시인은 고혈압으로 앓다가 향년 64세로 세상을 뜨셨다. 시 <무한정 속에서>는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출간한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에 수록된 시다. 병고(病苦)에 시달리면서도 '더 예쁜 사랑'에 눈길을 주셨던 선생님을 벤치마킹하면 오늘 내게도 '더 예쁜 사랑'이 올 것 같다. 너무 이른 새벽은 내게 불안을 안겨주고, 나는 새벽과 힘을 합쳐 오늘을 맞는다. 무한정 반복되는 리츄얼이다. 

절친이 순천 와운해변을 사진에 담아 보냈다. 맨발로 걷기엔 힘들 것 같은 해변. 오늘 내가 맞은 하루도 이러할 것이므로 신발끈을 단단히 잡아 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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