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와 함께
나는 음식을 까다롭게 가리는 성질은 아니다. 이것은 긴 회사생활과 여행생활로 다져진 사회적 생존의 결과물이다. 다만 꼭 잘 차려서 갖춰 놓고 천천히 배불리 먹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여행을 다닐 때도 식당에 가면 2~3인분을 시키고 천천히 다 먹는다. 실제로 먹는 양이 많기도 하지만 혼자 식당에 들어가서 하나만 시키기엔 주지도 않는 식당 주인의 눈치를 지레짐작 먼저 챙겼다. 누군가 만나서 밥을 먹을 때도 각자 식사 한 개씩만 시키면 야박하고 인색하단 생각을 먼저 했다. 검소하진 않지만 음식 남기지 않고 배로 다 들어갔으니 낭비는 아니지 않을까. 천성적으로 큰 뱃구레를 가지고 있어 많은 양을 먹어야 만족되었으니 어쩌랴. (다행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소화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예전처럼 많은 음식을 보면 부하가 걸린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못 먹는 것도 참 많았다. 도시락을 싸고 다녔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이랑 도시락을 벌려놓고 같이 먹을 때면 나는 남의 집 반찬은 잘 먹지 않았다. 특히 다른 집의 김치는 익힘 정도에 따라 색과 쿰쿰함 짜고 싱겁고 매운 간이 너무 달라서 기피 대상이었다. 이런 내 식성에 불을 지핀 사건이 하나 있었다. 고 1 때 우리 반의 인원은 55명이었는데 점심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빨간 고무 다라이(대야)와 고추장 참기름을 가져와서 반 아이들의 모든 도시락을 통 안에 쏟아 넣고 쓱쓱 비벼 아이들에게 재배식을 했다. 그곳엔 색색의 종류별 배추김치와 깍두기, 콩자반, 소시지, 멸치, 장조림 등등이 버무려졌다. 난 이 사건(?) 때문에 한동안 섞여 있는 음식은 먹지 못했다.
80년대 초중반에 우리 집은 큰 개를 몇 마리 키웠었는데, 그때 우리 개들의 식사는 국과 반찬 밥을 한 그릇에 섞어서 줬고 그 빨간 고무 대야의 비빔밥과 비슷했다. 그때는 그럴싸한 개 밥그릇도 없었고, 사료를 주는 집들도 별로 없었다. 그때 당시에도 개들에게 밥을 줄 때 한 그릇에 섞인 음식을 주는 것이 가끔 미안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의 빨간 고무 대야 비빔밤은 더더욱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섞여 있는 음식이 식탁에 올라올 때면 그런 기억들이 겹쳐져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진저리가 쳐질 때가 있었다.
요즘은 백일이 안된 아기를 키우면서 모유 수유를 하고 나면 꽤나 목이 마르고 허기가 진다. 그러나 아이는 아직 내가 차려놓고 천천히 밥 먹을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충분한 수유를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이렇게 저렇게 놀아주고 엄마도 잠깐만 식사를 하고 오겠다고 알아듣지 못할 당부를 여러 번 한 뒤에 내 밥을 차리고 식탁에 앉을 때면 이내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해서 곧 참을 수 없이 커진다. 이 단계적으로 커지는 울음소리에 편안하게 차려놓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수저를 내려놓고 다시 아이를 달랠 때면 차린 밥은 모두 식어있기 일쑤다. 그런 시간이 며칠 반복되니 끼니를 챙기는 것이 내 습과 다르게 점점 간소해졌다. 나는 엉뚱하게 내가 인상 찌푸렸던 우리 집 개밥과 고등학교 때의 빨간 고무 대야 비빔밥이 생각났다. 청승 떠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본다). 난 아이 엄마로서 아무렇지 않게 또 한 번 생존의 결괏값을 얻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