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사라는 늙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90세에 자식을 낳았다고 기록한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삭 (히브리어로 ‘웃음‘)이다. (창세기 21장)
나는 가끔 기원전 2000년의 사라의 출산에서 위로를 받는다. '하늘의 기적으로 그녀도 해냈는걸.'
물론 구약 성경 속의 므두셀라 969세, 노아 950세, 아브라함(사라의 남편) 175세처럼 장수 인물들의 속내는 ‘그때는 환경이 오염되지 않아 오래 살았다.‘ ‘문학적 표현이다.’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흔 줄에 나는 4000년 전의 믿음의 인물을 끄집어내어 노산의 아이콘은 내가 아니고 그녀임을 주장해 본다.
세상에 없던 아이를 만드는 일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적을 경험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이라 많은 축복 속에 낳았지만 가끔씩 뒤에서는 '내가 대학 갔을 때, 우리 엄마 나이였어.' '노산은 장애아를 낳는 지름길이야.' 등의 볼멘소리를 돌아 듣고는 한다. 그런 말들을 떳떳하고 편하게 넘기지 못하고 간혹 고깝게 들릴 때가 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나이 많은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건강하고 젊(어보이)게 오래오래 옆에서 지켜줘야겠다.)
어찌 되었든 아이를 낳는 경험 후에도 아이가 만드는 기적은 계속되었다. 반짝이는 아이의 눈이 내 눈을 찾아 눈 맞춤을 할 때도 기분이 묘했다. 오랜만에 사람과 끊임없이 눈 맞춤을 해본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와 눈 맞춤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보통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미간이나 인중 부근을 쳐다보라는 사회생활 가이드가 있는데 종종 얼굴의 바깥쪽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깔깔 소리를 내어 웃는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신기하다. 팔 뚝만 한 아이가 반년만에 두 배가 되었다. 요즘 들어 키가 줄어드는 느낌이 있는 나에겐 경이로운 성장이다. 눕혀둔 대로 누워만 있던 아이가 스스로 몸을 뒤집더니 이제 앉아서 흔들흔들 양팔을 벌려 중심을 잡으며 앉아있다. 주먹을 쥐고만 있던 아이가 손을 쓰기 시작하더니 어설프지만 젖병을 스스로 잡고 분유를 먹는다. 엄마가 몇 살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보다 아이가 보여주는 성장의 순간이 더욱더 대단하고 내일이 기대된다. (사실 어마어마한 육아를 하고 있는 나도 대단하다. 세상의 모든 엄마 아빠들 파이팅!) 아무것도 아닌 작은 모든 일들이 그가 만들어 내니 하나 같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매일매일 아이의 성장을 보며 기적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