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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피 Feb 16. 2021

18. 사랑은 핸드폰과 같다

/ 익숙함과의 이별

나에겐 쓰지 않는 옛날 핸드폰이 4개나 있다. 가장 오래된 G1에서부터 노트2, 중국산 화웨이까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책상 안쪽 깊숙한 곳에 고이 모셔져 있다. 일부러 모은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버릴 곳도 없고 또 버리자니 아깝기도 해서 별 의미 없이 보관 중이다.


오랜 전 일이지만, 제대하고 나서 난생처음 사귀었던 그녀에게 '모토로라 삐삐'를 사주고 싶었었다. 하지만 용돈도 빠듯한 나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궁리 끝에 '김창완의 골든디스크'로 기억하는 오전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내 당첨되는 것에 기대기로 했다. 사연으로 뽑히면 모토로라는 아니어도 소중한 '삐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억지스러운 조작의 흔적이 보였는지 보기 좋게 탈락. 무슨 사연을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한 달 정도 후인가, 그 날의 일을 기억한 그 여학생은 삐삐 2개를 사들고 왔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자기 꺼라며 실컷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내게 건네주었다.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용돈을 모은 건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무지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는 '최신 모바일'을 손에 쥐게 되었고 그날 이후로 내 품으로는 늘 SK, KT 또는 LG의 전자파가 파고들었다.

출처-Pixabay

핸드폰은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만남도 헤어짐도 이것의 중재하에 이루어지게 된다. 사랑이 핸드폰에 종속되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나의 감정을 핸드폰에 실어 그녀에게 전하고 숨죽이며 핸드폰 알림을 기다린다. 애꿎은 전원 스위만 켜다 꺼기를 반복하며...

가히 살아있는 반려견이나 반려묘보다 '반려폰'이 삶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핸드폰을 손에 쥐게 되면 최소 일주일에서 길게 한 달 정도는 행복하다. 밤마다 새로운 기능을 업데이트하고 혹시라도 전화번호나 메모 , 갤러리의 사진은 빠진 게 없는지 꼼꼼히 뒤져본다. 이젠 워낙 좋아져서 자동으로 업데이트되지만 그래도 새 핸드폰을 직접 다뤄봐야 그 맛이 있다.

따져보면 옛 핸드폰과 새 핸드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몇 가지 새로운 옵션과 디자인적인 측면 말고는 크게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통화 음질은 말할 것도 없고 카메라, 음악, 인터넷 속도 등 모두 그대로 인 것만 같다. 오히려 이전의 핸드폰이 손에 착착 감기는 게 더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낯선 이와 부대끼며 각자의 일상을 중성화하여 더불어 살아가려 노력한다. 불편해도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조금씩 양보하며 무리 없이 살고자 한다.

사랑의 처음도 이와 비슷하다. 알지 못하는 이성의 속내를 얻는다는 것은 무척 까다롭고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내 연인이 될 수만 있다면 손해와 불편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필히' 거치며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왔다.


사랑에는 유효기한이 없지만 언제까지나 처음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최초의 느낌은 무뎌지고 장점보다 단점을 먼저 찾게 된다. 때론 칭찬도 하고 화도 내며 이해도 하지만 오래된 상대방에 싫증이 나는 건 사실이다.

연인에게 신선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나와 다른 또 다른 나를 보듯 예상된 생각과 행동은 새로움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그를 또는 그녀를 믿고 있다는 증표일 수도 있다. 만일 아직도 새롭다면 상대방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반복된다는 것은 익숙함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때론 반복에 지루해져 새로운 것을 찾게 된다. 1년도 안 된 핸드폰을 바꾸는 건 이런 이유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새 핸드폰도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곤 예전 핸드폰의 그립감과 익숙함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사람은 오래 두면 냄새가 스며든다. 비록 공간상으로는 멀어졌다 해도 감정의 냄새는 머릿속에 기억되고 만다. 이별이 힘든 것은 익숙함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 핸드폰은 언제든 보고 만질 수 있지만 떠난 인연은 다시 재생할 수 없는 과거일 뿐이다. 새로운 사랑은 적을수록 좋을 것 같다. 자주 핸드폰을 바꾸는 것이 물질적 낭비라면 익숙한 이들과의 잦은 이별 또한 삶의 낭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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