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피 Mar 13. 2021

26. 실업급여가 월급이 되던 날

/ 생각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월 3~4만 원씩 공제하는 고용보험료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월급명세서를 볼 때마다 공중에 뿌려지는 허튼 돈 같아 속이 쓰라렸다. 월급의 0.8%, 소주 한 잔 값이지만 긴 돈이 아까워 그 보다 더 많은 돈으로 술을 마시며 투덜거렸다.  때때로 농담 삼아

'나도 한번 받아봤으면 좋겠다'

'공짜 돈 받지 말고 일해야 하는 거 아냐!'

'공산당이냐, 왜 놀고 있는 사람에게 돈을 줘!'

라며 비상식적인 객기 섞인 말을 내뱉었다. 평생 기부라는 것에 담쌓고 지내온 나는 고용보험을 그저 어쩔 수 없는 기부 정도로만 여겼다. 

그릇생각이 고쳐진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20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알량한 출판사를 세웠지만 이도 지지부진하여 다시 취업한 후 만 2년을 다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퇴사 한 나는 지난해 3월 난생처음으로 '무직자' 신세가 되었다. 중년이 돼버린 나에게 재취업은 정말 로또보다 힘든 일 같았다. 나름 업계 최고라고 자부하지만 나를 부르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쉽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직장을 그만둔 이유가 경영상의 문제였으니 실업급여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매우 어리숙한 모습으로, 송파구에 위치한 동부고용센터를 방문하여 실업급여를 신청하였다. 코로나로 인하여 어지간한 일은 온라인으로 대체한다고 했으나 센터 안엔 많은 이들로 붐비었다. 간단한 서류 작성을 마치니 다음부터는 오지 말고 온라인상으로 구직활동을 기록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열흘 정도 후 수십만 원이 입금되었다.

처음 받아본 나랏돈이었다. 오로지 연말정산만이 국가가 주는 유일한 돈으로만 알았었다. 그 후 몇 달간 190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을 월급처럼 받았다. 그 돈으로 딸의 용돈과 대출금을 갚았다. 회사 다닐 때의 반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요긴한 월급이었다. 그렇게 국가가 주는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우연은 결코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전 상의 '우연'은 '아무런 인과 관계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연은 늘 행동의 결과로써 일어난 듯하다. 느슨한 삶은 딱 그만큼일만 이루어졌고, 최선을 다한 삶엔 긍정의 우연이 꼭 일어났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노력에 대한 보상은 반듯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실업급여는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며 일상으로 복귀하도록 하는 수단이었다. 실업급여는 예상하지 못한 삶에 반전을 위한 위로금이기도 했다. 수년  또는 수 십 년 죽을힘으로 살아온 직장인들에겐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무직자가 된 많은 이들에겐 실업급여가 그전에 받던 월급보다 더 가치 있는 역할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한숨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다.


누구에게나 생각하지 못한 일은 발생한다. 그것이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그 모두는 본인이 뿌린 그대로 우연히(?) 발생하는 법이다. 우연은 필연이   택한 차선책 일지 모른다. 우연 기다린다고 오는 것도 간절히 바란다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우연은 묵묵히 인내한 이들에게 주는 하늘의 또  다른 기회이다. 최선을 다한 이에게 주는 혜택인 것이다. 가만히 있는 자에겐 절대 우연은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한 일, 그건 다시 말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우연은 그럴 때 기대조차 하지 않은 보너스와 같은 새로운 일상의 경험하게 해 준다. 당신이 수고한 만큼 우연의 횟수는 늘어날 수 있다. 우연은 충분히 필연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