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은 더 되었을지 모를 담장 돌 틈 사이에 비쭉이 몇몇의 들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절은 때때로홀로임을 자각하게 해주곤 하였다. 파란 하늘에 우둑커니 선 시선과 레몬처럼 시린 찬바람과맑은 종소리 같은 햇살과 그리고 사라질 듯 조금씩 기울어가는 햇빛의 그림자만큼,이젠투명하다 곧 어둑해질 우울의계절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뜻한 빛과 싸늘한 바람, 이 둘이 섞이면 외로움은 깊어지게 된다. 높은 고도에서 내리쬐는 빛을 보며 초라해지고가냘픈 갈비뼈 사이를 오가는 찬 공기에 나의 감정은 야위여 간다. 그리 두텁지 않은 외투 탓에 추위는 한 결 더 쉽게 다가오며 쌀쌀함에 적응하지 못한 피부는 늘 수축되어 마음 안으로 조여들어오는 것 같다.
그렇게 위축되어우울해진다. 내게 가진 것보다 잃은 것이 많으면 우울해지고, 할 수 있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을 때도 우울해지며 나와 상관없는 것에 미안해질 때도 나는 우울해진다. 그러나, 가장 우울할 때는 움직여야하고 생각해야하고 다짐해야하건만 그 모두의 대상이 사라질 때이다.
가을은 맑고 거친 공기를 동시에 준다. 가을은어떠한 것도 소유하고 싶지 않은 듯 투명하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 일지도 모른다. 그 많던 푸르름이 사라진 것에 대한 예의.
나는 여름이 좋다. 땀 뻘뻘 흘리며 북한산을 올라갈 수 있는 여름이 좋다. 내 몸에 찌들었던 일체의 부정을 토해내는 것 같아서 좋다. 억수로 뿌리는 장대비도 좋고 짙푸른 나무에 탁색 된 더운 공기도 좋다. 무엇보다 지친 날에도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그들의 땀에 젖은 셔츠가 맘에 든다. 그렇게 뜨거운 날이 나는 좋다. 우울이 무서워서일까? 땀은 우울의 감정도 씻겨내는 듯하다.
하지만, 가을은 우울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처럼 늘 나에게 싸늘함을 주었다. 서슬 같은 아침 날의 서늘함, 나는 이 차가움이 싫다. 움츠러듦이 싫고 초라하게 만드는 그 서늘함이 싫다. 쌀쌀함을 잊게 할 따스한 여분이 내겐 남아 있지 않다. 몸도 마음도 나누어 줄 밑천이 없다. 그것마저 우울의 시작일지 모른다.
가을밤은, 남진우 시인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서 처럼 차가운 달의 심장에 죽은 자들이 웅얼거리는 것 같다.
죽음으로 일체의 기억은 사라지고 만다. 사랑도 증오도 기쁨도 슬픔도 사라지고 만다. 나는 죽음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에 두려운 모든 이는 실오라기 같은 숨으로 기억 속 나를 붙잡곤 한다.
죽음을 택하면 기억은 사라질 수 있으나 흔적은 그대로이다. 흔적은 기억만큼 선명하다. 그저 죽음만으로 내가 사라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내가 사랑했던 흔적 사랑받던 흔적 모두 그 자리에 남아 있다. 흔적은 남은 자들에겐 고통일 수 있다. 기억과 흔적은 내가 만든 삶의 그림이다. 먼 후일, 기억을 담보로 흔적을 찾아갔을 때 그때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미리 상상하면 지금의 난, 어리석은 궁리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을 들꽃엔 냄새가 없다. 두드림 없이 방문한다. 많은 이는 그 옅은 향기가 좋다 하지만 시나브로 그들은 엄습해오고 갖은 쓸쓸함으로 나는 공격당하고 만다. 우울과 죽음도 냄새 없이 다가온다. 나의 약점을 잘 파고들어 들꽃처럼 조용히 아픈 감정만을 헤집는다. 즐겨야 한다. 들꽃의 아픈 기억만이 아닌 그 소소함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즐겨야만 한다. 즐기는 것만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죽음이 나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기억은 유전되어 세상 누군가 또는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