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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피 Mar 01. 2021

23.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그냥 내버려 두면 어때?

비 오는 날 아침이면 영 개운치 않은 몸으로 출근길에 오르게 된다. 축축하고 뭔가 어수선한 기분으로 지하철을 타고 질퍽한 보도블록을 하나 둘 집어가며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향한다. 하지만 아무리 ‘는개비’(안개비와 이슬비 사이)라 하더라도 바지 밑단을 적시기에는 충분하다. 이상하게도 새로 드라이한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월요일이면 자주 비가 내리곤 했다. 엄하게 세탁비 3,000원만 날린 날이 많았다.  오늘은 삼일절이라 휴일이지만 월요일이며 비가 내리고 있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큰 개비린내가 온다"


천재 시인 '백석(1912~1996년)'이 쓴 <비>라는 시이다. 2행으로 끝나는 짧은 글이지만 시각후각의 느낌을 잘 살리어 마치 눈 앞에서 비 내리는 광경을 보고 있는 듯하다. 백석 시인의 특징인 풍부한 방언 사용도 글의 감칠맛을 더 해주고 있다. 백석 시인은 평안북도 정주 태생이다.  때는 월북작가로 그의 시를 읽을 수 없었지만 1988년 해금 조치되며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나도 예전 지하철에서 백석의 시집을 끼고 그 멋진 구절을 외우려 무던히 애를 쓰곤 하였다. 시뿐만 아닌 외모마저 멋있었다 한다. 훤칠한 키에 양복을 즐겨 입는 패셔니스트였으며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6개 국어가 가능한 언어 천재였다.

영어 교사 시절의 백석

또한 대원각의 '김영한'여사와의 인연은 유명하다. 기생과 모던보이와의 만남은 집안의 반대와 6.25 전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백석은 김영한을 그리워하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지었으며 김영한 또한 1000억 원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며(현재의 길상사) '1000억 원은 그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다시 볼 수 없었지만 평생 그리워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는개비'는 생각보다 많이 겪는 비다. 장마철 밤새 내린 비가 지쳐서 이젠 그칠 건지 더 내릴 건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애매한 녀석이다.

한 여름이 되면 장대비가 내리곤 한다. 장대비와 비슷한 말에는 채찍비, 무더기비, 달구비 등이 있다. ‘달구’는 집터나 묘지를 다질 때 쓰는 장대를 말하는데 그만큼 강하고 굵게 내린다는 뜻에서 달구비라 부르게 되었다.

모내기철에 내리는 비를 ‘목비’, 세차게 내리다 잠시 그친 비를 ‘웃비’, 먼지만 살짝 걷히게 할 정도의 비를 ‘먼지잼’, 햇빛 사이로 잠깐 내리는 ‘여우비’, 초가을 오락가락하는 장마를 일컫는 ‘건들장마’, 큰 비 후 또다시 내리는 ‘개부심’, 장대비와 같은 뜻의 작달비 등 비(雨)를 일컫는 말도 참 다양하다.

‘급시우(及時雨)’라는 비도 있다. 때 맞춰 내리는 단비와 같은 비다. 중국인들이 많이 쓰이는 말이다. 중국인들의 비에 관한 표현도 다양하다. ‘매우(梅雨)’는 매실이 익는 시기에 내리는 비를 말하는데 장마를 뜻한다. 물동이처럼 쏟아지는 비를 ‘분우(盆雨)’라 하였고 하늘에 구멍이 난 듯하다 하여 ‘천루(天漏)’, 소낙비와 같이 요란한 비는 ‘취우(驟雨)’, 땅을 흠뻑 적시는 비를 ‘투우(透雨)’ 또는 ‘투지우(透地雨)’라 불렀다.


우울은 햇볕을 쬐지 못하면 악화된다. 일조량이 부족하면 멜라토닌의 조절이 어렵고 몸과 마음이 가라앉게 된다. 북유럽 지역 사람들은 이러한 일조량 부족 현상을 겪는데 이로 인해 사색을 즐겨한다. 철학과 문학이 발달한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한다.


비가 오거나 장마 기간에 접어들면 우울의 강도는 심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비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기후 조건이다. 신화에서도 비를 다스리는 은 불가결한 능력이어야만 했다. 비는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며 생명의 터전 또한 마련해 준다. 환웅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때 우사(雨師)를 거닐고 온 것처럼 비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반대로 비로 인간의 죄를 묻기도 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수메르 홍수와 구약 성경의 노아의 홍수처럼.  


부족함과 과함이 문제일 것이다. 우울도 이와 같은 이유로 재생되어 간다. 통제되지 못한 감정은 늘 불안과 공포를 부르고 말 것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 보자. 더 이상 감정을 소모하지 말고 필요할 때만 조금씩 아껴 써 보자. ‘뭐 어때!’하며 내버려 두자. 비틀즈의 'Let it Be'처럼, 어쩔 땐 가만히 있는 것이 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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