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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피 Feb 28. 2021

22. 나도 나를 모르겠어!

/ 신화와 소설 속 자아 상실

고대 그리스 도시 테베의 왕 라이오스의 아들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마저 범할 것이다라는 신탁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양치기는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코린토스의 다른 양치기에게 위탁하게 된다. 몇 년 후 코린토스의 왕자로 성장한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는 도중 사소한 실랑이 끝에 테베의  왕이자 자신의 친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만다. 또한 여자의 얼굴과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을 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인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이윽고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왕비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아 자식까지 낳게 되었다. 그러던 중 원인모를 전염병의 해답을 얻기 위해 신전을 찾아갔으나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마저 범했다는 사실을 듣고 스스로 두 눈을 뽑은 후 딸 안티고네와 함께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신화는 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1875~1955년)'에 의해 재해석되기도 했다. '토마스 만'은 괴테 이후 현대 독일 문학을 이끈 독보적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마의 산>이라 할 수 있지만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또한 독일 나치 정권에 반기를 들며 미국으로 망명,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며 반나치 방송에도 참여하였다.

토마스 만

1951년 쓴 <선택받은 사람>은, 플랑드르의 군주 그리말트의 쌍둥이 남매로부터 시작한다. 오빠인 빌리기스와 동생 지빌라는 근친상간을 통해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에 죄책감을 느낀 빌리기스는 예루살렘으로 참회의 길을 떠나지만 죽음을 맞게 된다. 또한 오빠이자 연인을 그리워한 지빌라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버리고 만다.

버려진 아들 그리고리스는 위험에 처한 왕비 지빌라를 구하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참회의 길을 걷게 된다....

<선택받은 사람>은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인간의 죄와 참회를 그린 소설이다. 비록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소재로 삼았으나 읽는 내내 인간의 참회에 대해 방점을 찍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인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년)는 그의 저서 <꿈의 해석>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론을 발표했다. 이는 유아기 때의 사내아이가 이성인 어머니에게 성적 애착을 느끼고 반대로 아버지를 향해서는 심한 적대감을 갖는다는 이론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동시대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1875~1961년)은 어린 여자 아이가 아버지에게 성적 호감을 갖고 어머니에게 경쟁심을 느낀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발표하기도 했다.

자신보다 힘이 세고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어린아이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서서 경쟁하고 싶지만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욕구를 아버지와 타협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극복되고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성인으로 성장하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기 위한 것과 흡사하다. 프로이트는 모든 정신병의 원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 과정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유년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은 구성원들과의 타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흔히 ‘밀당’을 통해서 타인과 접촉하고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자존감도 무너지게 된다. 우울증이 찾아올 수도 있다.

우울은 이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울은 우리의 일상에 늘 산재되어 있다. 누구나 겪게 되는 감기와 같은 것이다. 나았다가도 다시 찾아오고 남녀노소 또한 가리지 않는다.

사회적 도구는 획기적으로 발전하지만 개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은 더 많이 사라지고 있다. 참회의 시간보다 쾌락의 시간을 더 즐기며, 기다림보다 조급함을 앞세우며, 이해보다 강요를 택하게 만든다. 점점 사이는 멀어지고 있으며, 다수 안에 늘 혼자가 되고 만다. 그렇게 우울은 틈새 안으로 스며든. 나도 모르게 서서히.


힘쓰지 않는 생각이면 좋겠다. 적당한 선에서 배려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선을 그으면 된다. 적당하다는 의미는 ‘타인에게 피해 안주는 정도’이다. 우울은 오랜 기간 우리와 동거해 왔다. 이미 삶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주변에 있던 것처럼 인정하면 조금은 편해질 수도 있다. 무기력한 마음도 무너지는 자존감도 누구나 겪는 하나의 과정이며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당신이 조금 더 심한 편일 수 있지만, 잠시 심호흡의 기간을 갖고 감정의 체력을 쌓는다면 소진된 자신감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모르면 이겨도 이기는 게 아니다. 타인에게 이긴 들 무엇하랴, 이미 난 상처 받고 죽어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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