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전방위적 침략에 붙여
이슬람(اسلام, Islam)은 하나님(알라)을 유일신으로 믿고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여기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다. 이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입니다."를 기본적인 신앙고백인 샤하다로 두고 지킨다. 이슬람을 따르는 신자를 무슬림(مسلم, Muslim)이라고 한다. 오늘날 세계에는 19억 명의 무슬림이 있으며, 기독교, 힌두교, 불교와 함께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무 위키 "이슬람 개요"-
세계 3대 종교는 그 나눔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로 이야기된다. 이 구분이 혼동과 왜곡을 주기도 하는데, 이스라엘과 유태인의 종교 '유대교'를 어디에 넣게 되는지에 따라 '종교학 개론'의 성적이 달라진다. 유대교는 어느 종교와 더 가까울까? 부처 석가모니의 불교는 아닌 듯하고, 기독교 집회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며 반기기도 하고, 예수의 고향땅이니 '기독교'를 고른다. 맞았다 확신이 들며, 쉬운 문제에 빈정댈 감이 될 법하다. 그러나 정작 핀잔은 그 대답을 고른 자들의 몫이다.
Q. 유대교(Judaism), 기독교( Christianity ), 이슬람교는 서로 다른 종교다
A. 세 종교 모두 구약을 인정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믿는, 뿌리가 같은 종교. 이 점이 유일하게 태극기 기독교 집회에 성조기와 이스라엘기가 함께 등장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합리화됨.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불인정하는 유대교가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세계관에서 환대를 받는 현상이 상식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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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키워드가 몇 가지 있다. '유일신', '셈 어족', 그리고 '아브라함 계열 종교'가 그것이다. 유일신과 셈 어족에 대해서는 종교나 세계 역사의 귀동냥으로 얼추 들어 본 것들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라니.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는 비교종교학에서 분류하는 대표적인 종교다. 셈 계통의 종교에서 출발하여 아브라함의 유일신 신앙에 기원을 둔 유일신 종교를 통칭한다. 이에 속하는 종교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주변의 작은 종교들도 있다 (드루즈, 만다야교, 바하이교, 사마리아인 신앙 등). 기독교가 24억, 그다음으로 많은 이슬람이 19억의 신앙 인구를 가진다. 미미해 보이는 유대교를 제외하고도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쉬이 넘기게 된다. 그래서 종교의 '빅 텐트'라고 불린다.
기독교 복음 서두에 예수의 족보를 읊는 부분이 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데, 그 아브라함이 이 종교 분류에서 참 중요하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늦둥이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는 심신이 신앙의 시조가 된다. 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지금 종교 지형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사악은 적장자고 이스마엘은 서장자다.
이 상징성으로 아브라함이 아흔아홉에 낳은 이사악으로 이어지는 예수의 족보가 완성되고, 여든 살에 낳은 이스마엘이 무함마드의 조상으로 여기어지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사라가 서자의 존재를 못마땅히 여기어 없애 버리고자 하지만 아브라함은 고심하다가, 광야로 내 보내게 된다. 이때 갈증과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의 이스마엘 모자에게 천사가 나타나 물을 주면서, 큰 민족을 내려 주겠다 약속한다. 이 경전의 해석만 보아도 두 종교는 같은 뿌리이지만, 반목의 태생을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 두 종교는 공통점이 많다. 유일신을 믿는 신앙과 그를 기반으로 하는 정직과 순결에 대한 보수적 규율이다. 이 신앙을 기반으로 한 문화권에서는 살인자보다 거짓말쟁이가 더 치욕적인 낙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호전적이다. 기독교 성경도 예수 이후의 신약은 한없이 너그럽고 인간을 가엽게 여기는 신으로 그려지지만, 구약의 하느님은 무섭기 끝이 없고 분노와 응징의 신이었다. 중동의 척박한 환경으로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본능이 엄한 신의 모습으로 당위를 얻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는 이들의 인사말은 늘 '평화'를 이야기하는데, 아이러니와 역설이 모두 담겨 있다.
종교적 특징으로는 종말론과 내세를 믿는 공통이 있다. 그리고 성경과 꾸란이라는 대표적인 경전 중심의 종교로 그 모습이 유사하다. 단 구세주, 즉 메시아 신앙은 둘 다 있지만 그 해석과 지향이 다르다. 기독교는 이미 2천 년 전 예수가 그리스도로 변모하며 구세주가 이 땅에 왔다고 믿는다. 그래서 '재림', 즉 다시 오기를 구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된다. 유대교는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물이 있었다고 하지만 거짓 예언자, 사기꾼으로 규정한다.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슬람은 예수를 무함마드와 같이 주요 예언자 신의 사도로 인정하지만, 아직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는 교리다.
서로 뿌리가 같다고 하면 무슬림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의 반응은 다르다. 유대인들은 '민족 종교'라 믿고 선민사상이 가득해서 타 종교에 배타적이다. 물론 개신교의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이 더 거세긴 하지만. 가톨릭은 종파에서 공식적으로 타 종교와의 공존을 선언했다. 그러나 개신교 진영은 쉬이 타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이지만 '신흥종교'의 조바심으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유대교는 '민족종교'로 협소하게 정립되면서 종교의 모습과 입장이 배타적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이는 역사적인 침탈과 수난의 경험이 작용한 이유가 크다. 실제로 재창조된 종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반신반인인 예수가 부각되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해결하는 신의 의지는 그리스 신화의 레거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세 종교중 가장 막내의 입장이 되었다. 더 그럴듯한 당위적 정당성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정치권력을 종교에 들여온 것이 중세의 기독교의 모습이다.
한국 개신교 교회 신도들은 공식적으로 금연, 금주를 한다. 사실 이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규범이 아니다. 미국의 인디언 자치주와 한국만 유독 강요한다. 이유는 복음주의 선교에 의한 종파적 입장이 넓게 퍼진 탓이다. 보다 엄격한 보수주의가 짧은 교파의 역사를 극복해 줄 것이라고 믿은 탓이다. 막내의 투정이 깊은 종교 간의 갈등과 배척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종교는 이전의 신앙과 교리를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성장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구약에 맞대어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며 급성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깊은 역사의 모든 역사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종교의 배타성은 그저 구절과 기도문만 외어대는 피상적인 구복적 이기심에 기인한다.
대구 이슬람 사원의 이야기는 매우 씁쓸하다. 이전 사찰의 불상을 훼손하던 맹신적 크리스천의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조금 더 심각한 문제다. 바로 제노포비아, 인종차별의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사실 인종이라는 것도 슬프도록 웃긴 표현이다. 종이란 모름지기 서로 교접하여 새로운 생명, 후대를 생산할 수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되는데, 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었던가.
한국은 '인종차별(제노포비아)'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 사회의 인적 구성 자체가 인종적 다양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현대사회의 대한민국의 경우 제3세계 국가들인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카리브해, 태평양 등이나 제2세계 국가들인 동유럽,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의 국가 출신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사회 문제로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문 중-
이슬람 문화를 배척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우선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불안정한 정치, 인권의 탄압 등으로 무섭다는 두려움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 대부분이 극빈국이거나 가난하거나 미국이나 서방과 척을 지는 '우습게 보이는 나라'에 살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대한 방어 기제는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의 발현'이라 치자. 그러나 폄하하여하는 차별은 '저열한 우열감'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역사에서 테러 분자의 성분을 보면 극단적 기독교인들이 더 많았다. 아일랜드의 여러 극단주의자, 스페인 내전의 테러들, 하다 못해 소련 냉전 시기의 주변국의 사람들의 피 속에는 크리스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감'으로 무지한 '통념'으로 그들을 일반화하여 퉁치지 말기를 바란다. 미드와 영화에 편견 가득하게 왜곡된 이슬람 사원 말고, 진짜 그들의 일상과 사원을 방문해 보기를.
4대째 가톨릭 신자로 모태 신앙만큼 깊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오만은 가지지 않았다. 부친은 무슬림 성지의 나라에서 그들의 정직함에 늘 존경을 가졌고, 모친은 법사님과 보살들과 차담 기우는 일상을 보냈었다. 내가 경험한 무슬림들은 존경스러웠다. 성실하고 근면하며 거짓 없고 검소했다.
그들은 예배나 의식 전에 몸을 청결히 하는 것은 일종의 '예식'이 있다. '하다스'로 통칭되는데, 보통 상황이 허락하면 '우두'라는 작은 하다스를 한다. 머리, 귀, 귀 뒤, 손, 발, 얼굴을 씻으며 자신의 작은 더러움도 씻어 내는 의식이다. 이슬람 사원에는 우두를 할 수도꼭지와 그보다 큰 하다스인 구슬을 위한 시설이 있다.
우두는 꾸란을 만지거나, 기도를 할 때, 예배를 드릴 때 무조건 한다. 일상에는 늘 사소한 몸과 마음의 더러움이 있으니까. 방귀와 트림마저도 작은 티끌이니까. 그보다 큰 것, 화를 내었거나, 죄를 짓거나, 성교를 하거나, 기타 규율을 위배하거나 그런 유혹에 있을 때 '구슬'이라는 예식을 한다. 이런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하는 약식 의식도 있다.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기도의 절을 올리는 그들의 심신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들은 어떤 허례와 낭비도 금기하고 진정한 우상, 돈과 권력 같은 것들의 숭배를 금한다. 이자를 받지 않는 이슬람 은행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스라엘의 전방위적 군사 행동은 위태롭다. 그들이 믿는 구석이 이천 년 전부터 핍박했던 기독교 세력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서울의 광장에 모여든 노인들의 집회에 태극기는 물론 성조기가 나부낀다. 거기에 더해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가가 나부끼는 기독교 모임이라니. 예수를 십자가에 단 이들은 로마 섭정이 아니라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율법학자와 귀족, 왕족이 결탁한 유대의 기득권층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상식과 묵상에는 없는 듯하다.
예수를 믿는 독실한 신자인 히틀러는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을 말살하려 하였다. 십일조 헌금을 내는 장로는 지출 아끼려 최저임금도 지불하기 주저한다. 그뿐인가 주술과 미신에 물든 이 나라 통수권자의 '죄씻김' 안수를 한 이들은 목사 세습의 지탄을 받던 목회자들이었다. 그저 열심히 기도하고 봉헌하면 구원이 오는 세상이 그들에게는 진리이니까. 무지는 차별을 낳고, 그 차별은 결국 혐오가 된다. 적어도 이런 사실들을 알고나 반대했으면 싶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