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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Oct 03. 2024

나는 <흑백요리사>가 불편하다.

'대결 과잉'의 시대의 불공정한 '가짜 비범'

언젠가 '난 오은영 신드롬이 불편하다'라는 글을 쓴 후 작은 폭풍을 경험한 적이 있다. 질투와 시기가 진실과 진위를 가려내지 못한다는 팬덤의 질책들이었다.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불편한 마음'을 수정할 마음은 여전히 없다.


https://brunch.co.kr/@parkchulwoo/447


연장선상이라고 할까. 요즘 넷플릭스 콘텐츠의 대세인 <흑백요리사>가 무척이나 불편하다. 불편하다면서 왜 보냐는 반문에 적절한 핑계는 없다. 그 불편한 것들을 보며 욕지거리 내뱉는 마음으로 일종의 '해소'를 얻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처럼 미디어 비평에 대한 원고의뢰도 없어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이렇게 삐딱하게 보는 내 모습이 여전히 짠하다.


이 콘텐츠에 열광하는 일반대중의 짧은 감탄사부터 이런저런 이유가 장황한 평과 리뷰를 읽어 보아도 쉽사리 동조하기 어렵다. 이유는 한가지다. '평가 방식의 비상식'이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많은 사람들이 흑수저, 백수저라는 계급대결로 시작하는 서론부터 매료된 듯하다. 그 서론의 선명성은 초반 '흑백대결' 이후 퇴색되어 가지만, 그 서론이 남긴 잔영으로 대중의 팬덤을 형성한다. 대부분 이 서사가 '대결'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콘텐츠의 서사의 중심은 '품평'이다. 품평, 품질의 평가, 즉 Quality Assurance가 이야기의 근간이다. 이 품평에 기대어 참가자들은 매회 멸망전(elimination game)을 치른다.


품평의 배후에는 그저 대결 양상으로 재미와 흥미를 기대하는 방송쟁이들의 설정만 있을 뿐이다. 이번 주 공개된 8~10화의 큰 이벤트인 '레스토랑 대결'에서 그 설정이 확연해졌다. 매출 대결의 최소한의 출발선도 규정하지 않아 꼼수가 승리하기 쉬운 구도였다. 이 대결에서는 공정한 출발의 기준이 되는 '시장의 논리'가 배척되어 있다. 바로 Pricing이다.


출발선의 설정이라고는  재료비 300 원만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객단가의 합리성은 대결을 위한 꼼수에 전적으로 맡기어졌다. 대결에서 1등을 한 최현석 팀의 프라이싱은 비합리적이다. 그 비합리적 결단에는  하나의 이유만 있다. 매출의 극대화. 판매 수량이 동일하거나 뒤져도 가격으로 이긴다는 꼼수다. 이 콘테스트에서 우열을 가리는 유일한 기준이 '매출 총액'이기에 이를 최대한 이용하겠다는 잔머리였다. 이전 대결에서 가리비를 먼저 선점하는 최현석 다운 꼼수의 연장,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그다음은 소비자들의 구성과 설정이다. 유튜브 먹방러라니. 이들이 보편적 가치를 대변할 포커스 집단인가에는 큰 물음표만 생길 뿐이었다. 더욱이 1인당 100만 원의 소비 재원을 일률적으로 방송국이 제공하는 것부터가 시장 원리를 왜곡시키기에 충분한 변수를 제공했다.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불한다면 4만 원이 넘는 짬뽕에 5만 원이 넘는 알밥을 시켜 여러 번 먹었을까?


경쟁의 출발선이 없다


이 시합이 공정하려면 철저하게 시장 원칙으로 진행하던지, 아니면 제공되는 음식의 품질 평가가 되었어야 한다. 시장 원리라면 매출의 극대화가 아닌 이윤으로 평가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의 본인 지출에 기반했어야 한다. 방송국이 준 돈으로 플렉스 하기에 랍스터와 캐비어는 너무나도 그럴듯한 욕망의 되먹임이 반복될 뿐이다.


품평이라면 매출액이 아닌 주문 총량으로 평가함이 공정하다. 10그릇이 5그릇을 이기는 것이 공정한 품평이 된다. 명색이 '요리사 대결'이 아니던가 '식당 대결'이었다면 천박한 자본의 되먹임을 이용한 꼼수도 용납이 되겠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토록 열광하는 이 '대결구도'는 총체적으로 NG다.


두 사람이 공정의 전부다


패자부활이나 최종 대결 품평의 대부분을 제작진이 억지 합리화한 두 사람이 진행한다. 요리사이고픈 사업가와 요리사의 요리사가 되고픈 셰프의 품평이 유일한 바이블이 된다. 그 품평으로 가려지는 '비범'이 마치 '정답'처럼 각인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수년 전 칼럼 <슈퍼히어로의 서바이벌>에서도 이야기한 바가 있어 그 일부 발췌를 아래에 첨부해 본다.




https://brunch.co.kr/@parkchulwoo/27


매스미디어라는 말의 직접 의미답게 이 시대에는 무수한 매체들이 대중의 문화라는 것을 양산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문화와 상호작용하는 대중은 스스로 팬덤을 만들어 트렌드를 조성하거나, 조금 더 깊은 각성으로 담론이라는 문화비평적 흐름을 생산해 내고 있다. 그중에 요즘 넘쳐 나는 것들이 이른바 공개경쟁 프로그램이라는 ‘서바이벌’ 형식의 버라어티쇼 프로그램에 대한 유행 현상이다.


탈락자 선정을 하는 형식의 생존경쟁 프로그램까지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의 황금시간 내내 경쟁과 생존의 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소위 패밀리 타임이나 주부 타임이라고 일컫는 시간대에 내 보내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에도 PIP형식의 프로젝트성 생존 경쟁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또한 각종 포털사이트의 공모전이나, 신입사원의 선발, 그리고 결혼 상대를 찾는 일에도 비슷한 포맷의 이벤트들이 넘쳐난다.


각 매체들이 유행과 트렌드에 따라 좌턴 우턴하며 지르박 스텝을 밟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쏠림의 정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데에 있다.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최소한의 문화적 고찰이 상실되었으며, 콘텐츠 소비자들도 역시 무분별한 경쟁 프로그램에 노출되어 버린다. 그 결과 부지불식간에 경쟁이라는 문화 사회적인 양상의 일부분이 마치 가치관의 전체를 관장하는 황금률처럼 변질 오용되기 쉬워진다는 점에 있다.

영화 <킥 애스>


‘비범(非凡)함’에 대한 동경은 원초적인 것이다. 야생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성이 개입되기 이전의 본능적인 것이다. ‘비범’하다는 단어의 뜻은 사전적인 의미로 ‘보통 수준보다 훨씬 뛰어나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말로 ‘평범’이라는 말이 배치되기도 한다. ‘비범’함과 가까운 말은, 그 문장의 의미적 해석에 따라 달라 지겠지만, ‘비상’함, ‘특이’함, ‘불범’, ‘이륜’이라는 보다 좁은 의미의 단어다.


다시 말하자면 ‘비범’함이라는 것은 평균적인 기대 이상의 성과나 능력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범함의 기준이 될 평균적인 기대라는 것은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비범’이라는 단어에 대한 단편적 고찰은 자칫 이 사회와 인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 이 ‘비범’함을 ‘우수’, ‘양질’, ‘절대적 선’, ‘정답’, ‘이상’과 혼동되어 사용하는 해석의 오류는 사고와 행동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선택인 것이 된다.


요즘 쏟아지는 공개경쟁 형식의 문화 콘텐츠는 바로 ‘비범’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비범’한 일인자를 찾기 위한 프로그램은 ‘비범’함의 기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도전자 간의 물리적, 기능적, 심리적 목표 달성 경쟁을 통한 도태/ 생존 방식의 프로그램


2) 심사자와 평가자를 선정하여 상대평가 계량하여 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의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중


두 가지 형식의 프로그램이 모두 저마다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후자의 순위 부여 방식의 프로그램 형식이 대중에게 보다 자극적이다. 소위 말하는 이슈를 생산하고 그 콘텐츠의 상업적 가치를 높여줄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제공되는 공개경쟁 프로그램의 형식은 대다수가 후자인 평가자에 의한 순위 부여 형식 2)를 취하고 있다.


앞서 말한 목표의 달성을 통한 경쟁방식 1)은 이전 세대에도 익숙한 프로그램의 형식이었다. ‘아빠의 도전’, ‘출발드림팀’, ‘열전 달리는 일요일’, ‘명랑운동회’ 등의 운동기능적 대결 프로그램과 ‘퀴즈아카데미’, ‘장학퀴즈’, ‘도전 골든벨’ 등의 퀴즈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그 예이다. 이들의 비범함의 기준은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지표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기록경기의 일반적인 형식처럼 보편타당한 절대기준을 마련하여 경쟁하게 된다. 그것이 시간의 장벽이든 중력의 극복이든 두뇌 용량의 한계이든지 그 기준에 대하여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누구보다 나은 비범함을 따지기 보다, 절대적 기준을 초월하는 초인의 탐색에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프로그램 형식의 콘텐츠는 반짝하기보다는 지속적이고 매니아적이다.


그러나 요즘 화두로 떠 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 2)는 그 평가 기준의 방식이 다르다. 평가하고 심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에 의해 ‘비범’함을 인정받아야 살아남는 형식의 콘텐츠인 것이다. 그들의 남달리 뛰어난 능력은 평가하고 심사하는 사람들에 따라 비범해질 수도 있고 평범해질 수도 있는 운명이다. 그 평가와 심사는 규정에 의해 선정된 자칭 타칭 분야별 전문가의 몫이기도 하고, 지켜보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이 콘텐츠는 다수의 대중에게 관심을 받고 이슈를 생산하곤 한다.


바로 ‘평범’한 대중들이 ‘비범’한 히어로를 선택하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범’함을 결정짓는 기준이라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인 것이다. 그들이 열광하는 히어로의 ‘비범’함은 절대적으로 우수하거나, 불변의 원칙이거나 반드시 옳은 선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비범’함은 매우 위험하다.


(중략)

슈퍼맨이 필요해요?

이 세상은 나보다 비범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헌신과 기여로 인해 발전한다. 그들의 비범함은 그들보다 우월하지 못한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범한 능력이 각각 개인의 본연적인 인성보다 우월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헌신적 우월함에 우리는 투표도 하고 지지도하고 인정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정치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검찰과 경찰의 모습으로, 때로는 재벌과 기업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한류(인정하기 싫지만)를 이끌어 가는 아이돌의 모습으로, 그리고 가끔은 내 스스로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의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이지 그들의 쫄쫄이 빤스와 망토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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