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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Oct 08. 2024

'적정기술'은 '적절한 선심'이 아니다

기술 소비 시대의 양극화, 그 이면

"얼마나 쓸 줄 알아?"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1050616200005782

우리가 뇌의 일부만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여러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지만, 뇌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 중 하나다. 우리는 매 순간 서로 다른 뇌의 여러 영역들을 사용하고 있고, 뇌 전체에서 몇 퍼센트만을 사용하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조차 없다. -기사 본문 중-


어릴 적부터 '인간은 뇌의 능력을 10%도 사용 못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안도와 기대를 함께 품은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도 고작 15%만 사용했대더라, 집중력과 활용도를 높이는 훈련을 통해 뇌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 초능력이라는 게 결국 인간의 뇌의 능력 활용도에 때라 실현된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아무리 외어도 헷갈리는 조선왕조의 왕들 연대표나, 화학 주기율을 머리에 넣기에도 버벅대면서 유리 겔러의 염력을 따라 한다고 숟가락 부러 뜨리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니까.

뇌의 활용도

그런데, 요즘은 '뇌의 활용'이라는 말을 듣기 쉽지 않다. 아마 뇌인지 과학적으로 '사용도 측정'이 의미 없는 추산이고, 빈 캔버스에 그림과 색을 채운 퍼센티지처럼 뇌의 활용을 단 차원의 도식과 미적분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학자'님들 생각이고 내 생각은 사뭇 다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적어도 '기억'의 영역에서는 망실의 두려움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진학이나 취업의 변별에 있어서 '암기력'은 우세한 비기가 되지 못하고 있으니까. 기술이 뇌의 활용도 가성비의 불만을 메워주는 형국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정보통신, IT기술 용어와 그 활용에 적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차 하는 순간 뒤쳐지기 십상이고, 뒤쳐지다 보면 생존과 직결되는 필수 생활 요건을 상실하기 일쑤다. 바짝 긴장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것이 없을수록, 학습의 능력과 여건이 부족할수록 그 도태되는 격차가 점점 커진다. 또 다른 양극화가 '기술의 생태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 다른 세렝게티가 내 손 안의 낯짝 만한 네모난 터치스크린 안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이 또 다른 계급을 만든다.



'적정기술'은 무엇일까?


브런치에서도 '적정기술', '중간기술'에 대한 코멘트가 이따금 눈에 띄었다. 말을 얹고도 싶었으나 고민의 정도가 다르고 생각하는 눈높이가 다르면 오해가 생길 수 있어 늘 주저했다. '적정기술'의 그 시작의 철학적 사유는 좋으나, 현재 일부 스타트업과 사회적 경제 씬에서 남발하는 용어의 붙임에는 매우 비판적이다. 쉽게 말하는 '적정'의 의미에는 '적절한'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은근한 우월감과 자의식이 들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정기술'의 그 시작부터 되짚어 보는 것이 의미 있다.


적정기술의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은 인도의 '간디'에서 시작했다. 영국의 방직산업이 인도에 침투되는 것을 보고, 간디는 기계 중심 대량생산 산업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생각한다. 인간의 노동력으로도 가능하고, 기계의 생산으로도 가능하다면 두 가지의 생산 방식이 공존해야 인간성을 지키고, 근본이 되는 일자리도 지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이 기계 중심적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계와 대안으로 인도 국민에게 자신과 함께 물레를 돌리며 일하자고 역설한 것이 그 시작이다.


적정기술의 원조 '간디와 물레'

실을 잣는 도구인 물레는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방식보다 그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자본은 기계를 활용하여 자본 투입 생산성을 극대화하지만, 정작 경제의 주체인 사람은 일자리를 잃고 소비의 여력마저 잃어버린다. 그래서 물레로 실을 잣는 것은 산업의 퇴보라기보다 커다란 경제 공동체의 전체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이 일었다. 첨단의 기술이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는 문제의식의 시작점이 되었다.


'적정기술'이란 단어는 간디가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니다. '적정기술'이란 말은 독일 출생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umacha, 1911-1977) 교수가 만든 명칭이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기계의 위용에 감탄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것에 우려를 하게 되었다. 그런 혼란한 교차적 생각에서 개념이 정립되었다.

슈마허 교수

슈마허는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용어로 그 개념을 시작하였다. 당시 슈마허는 선진국과 제3세계의 빈부 양극화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중 간디의 자립 경제 운동과 불교 철학에서 영감을 받아, 올바른 개발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중간 규모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1970년대의 석유파동과 같은 에너지 대란 후 자원의 고갈과 환경을 파괴하는 과도한 대량생산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지구의 자연과 자원,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되면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에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다. 적절한 수준의 과학기술을 사용할 때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를 토대로 정리하자면 ‘적정기술(適正技術, appropriate technology)’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을 지칭한다. 또한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기술을 통칭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정기술이 개발되어 왔다. 대표적인 적정기술 제품으로는 라이프 스트로(LifeStraw)와 같은 구호 제품, 수동식 물 공급 펌프(Super MoneyMaker Pump)와 같은 농업 관련 기술, OLPC(One Laptop Per Child) 사의 XO-1 컴퓨터와 같은 교육용 제품 등이 있다.

적정 기술의 예


중간기술이 아닌 대안기술로


슈마허가 주창한 적정기술은 가난한 나라를 돕는 일이나 지구환경을 보전하는 일에 적합하다는 의미 축소된 평가를 받았다. 너무 이상적이고 일방적이라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국제정세와 경제에 적합적이 않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다 이유가 있는 노골적 기술 권력의 폄하로 생각되기도 하는 지점이다.


미-소 냉전시대의 격한 군비경쟁으로 인해 원자력, 거대 산업 등 큰 기술이 우위 선점의 최선으로 선택되었다. 군산 기업과 컴퓨팅 기술을 앞세운 IBM과 같은 IT 공룡들은 그 끝을 모르는 기술발전의 무한 자가발전을 시동 건다. 그로 인해 적정기술 활동은 사회적 관심과 국가적 지원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 후 새로운 인류 공생의 어젠다인 에너지 고갈, 911 사태, 기후변화, 원자력 사고 등 내 것 같지 않지만 무서운 위협에 대한 '대안'으로 적정기술이 언급되곤 했다.


슈마허 교수가 처음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란 말을 사용한 이유는 '지속 가능성'에 있다. 자원과 에너지 소비가 큰 대량생산 방식이 늘 모두에게 공리적 편익을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토착적인 재래 기술과 첨단기술의 중간 정도의 기술로도 충분한 편익이 도모되고, 이를 이용한 점진적 발전이 인류의 생활과 지구환경의 지속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중간”이란 단어가 주는 모호함에 더해, 슈마허 교수가 실제로 중간기술로 뒤쳐진 가난한 나라를 도와 본 실제 경험으로 명제의 한계가 왔다. 기술이 그 지역의 경제, 문화, 종교, 사회, 기후 등에 적합(Appropriate) 해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중간기술이란 말을 적정기술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적정하다. 과유불급

"적정하다"라는 말은 부족하지 않고 과하지도 않다는, 즉 '과유불급'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기능과 용량, 성능이 모자라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고, 너무나 과도한 경우는 비용과 관리 노력이 많이 들기 마련이다. 적정함이란 "Nice to Have-있으면 좋은 것"에 대한 요구를 조절하여 "Must Have- 있어야 하는 것"으로의 수렴을 만드는 과정이고 노력이다.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 기능의 어느 정도를 사용하고 있을까? 일렬로 나열하면 수백 가지가 넘는 기본 기능도 사용 못하는데, 자꾸 새로운 앱은 받아 놓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운영체제는 스스로 업데이트와 패치를 반복한다. 세상은 온통 5G 광역대 네트워킹이니, 천만 화소 카메라 달린 전화기에 8K 고화질 디스플레이가 도배되고, 누렀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터치패드의 결과는 실체 없어 보이는 '알고리즘'타령이다.


진짜 우리는 광속도의 네트워크가, 인간의 눈으로 식별 불가능한 고화질 화소가, 스스로 학습하여 빅데이터로 최적을 제공한다는 이 기술이 '꼭 필요한' Must Have일까? 혹시 기술이 스스로 발달하는 관성에 인류 모두가 가스 라이팅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에서 '적정기술'을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 왔다. 적정기술이란 50원짜리를 100원짜리 같이 해 준다는, 3인분 같은 2인분이라는 듯의 얄팍한 우월의식의 '동정'이 아니다.



기계식 버튼, 진정한 '적정 기술'


공장이나 건설현장 등 중장비의 효능과 인간의 노동력이 교집합을 이루는 곳에 가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바로 "딸깍, 딸깍"하는 클릭 소리를 내는 투박하게 생긴 버튼들이다. 대부분 컨트롤러나 긴 연결선이 달린 투박하고 작동기에 달려 ON/OFF를 직관적으로 표시하는 빛과 작동 소리로 먼 곳의 큰 장비와 기계를 작동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세상은 온통 '터치 스크린'이라는 액정 화면 LED가 대세이고, 스마트폰이 본격화된 10년 동안(10년 밖에?) 사람들의 디지털 경험은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스마트폰뿐이던가. 엘리베이터 버튼도 정전기, 압력 인식 방식의 터치 스크린이 설치되고 자동차의 대시보드도 스마트폰 폼팩터의 그것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이 불러온 '비대면'의 확대로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한 소매, 금융, 미디어 서비스 현장에서는 대면하는 접객 대신 "키오스크"라는 놈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런데 '기계식 버튼'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http://naver.me/5eFQv0Oi

서울디지털재단은 만 19살 이상 서울시민 5000명(55살 이상 고령층 1779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10~12월 ‘서울시민 디지털 역량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17일 발표했다. 보고서를 보면, 55살 이상 서울시민 중 키오스크를 이용한 적이 있는 이는 절반(45.8%)에도 미치지 못했다. 55살 미만 서울시민 대부분(94.1%)이 키오스크 경험을 갖고 있다고 응답한 것과 대비된다. -기사 본문 중-


나름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20년 넘은 짬밥 먹은 영피프티도 새로운 키오스크 앞에서는 잠시 부동자세를 취하게 된다. 우선 어디를 터치하고 누르는지부터 애매모호하다. 모바일앱이야 그동안의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의 축적으로 표준화되어 인지가 습관화되었지만, 대형 스크린의 키오스크는 낯설고 저마다 제각기라 참 어렵다. 가장 어려운 것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화면 구성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버튼'같이 온/오프를 인지하기 어려운 터치스크린 "입력"에서 큰 장애물을 만난다.


산업 현장에서 기계 컨트롤러는 왜 '터치 스크린'이 힙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비용? 내구성? 그것보다 우선 고려되는 것이 '안전보장'이기 때문이다. 육중하고 커다란 기계와 장비의 운용을 버튼 하나로 하는데, 정전기로 인해 안되고, 습기 때문에 안되고, 손가락이 굵고 뭉툭해서 안된다면 현장은 매일이 전장이 되고 말 것이니까. 그래서 직관적으로 동작 명령이 인지되는 기계식 버튼을 고집한다. 미국 대통령이 늘 옆에 두는 가방, 핵무기 발사 명령기가 '기계식 버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마트폰


그 '기계식 버튼'은 유니버설 한 기술 적용, 즉 '적정기술'의 아주 가까운 예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마트폰이나 그 접속 보조기가 있다. 점자 키보드를 차용하거나, 단순한 10개 미만의 버튼을 조합하여 다양한 명령으로 일반 사용자와 유사한 효율을 담보해 준다. '딸깍'하는 클릭 소리가 임무의 완수와 작동의 담보를 쉽게 알려 준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에서 키오스크 일부를 '기계식 버튼'으로 작동하게 대체하면 어떨까? 마치 자판기-밴드 머신처럼 누구나 쉽게 키오스크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기술의 관성은 또다른 계급 권력을 만든다


'첨단'은 과학 기술의 위용을 드러내는 자랑스러운 성과가 맞다. 하지만, '적정하지 못한' 기술, 특히 효용가치를 벗어난 too much의 과도한 기술 적용은 불편은 물론 사회적인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 두어 자리 덧셈 뺄셈 문제에 주판이면 되는데, 공학용 계산기를 들이미는 격이다. 사용 방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말이다. 마치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역효과를 걱정해야 하는 꼴이 된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3/2017092300766.html

"스마트폰 없이 당신은 살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스마트폰 중독'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스마트폰은 우리 일상에 이전까지 없었던 경험과 편리함을 제공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이 기기에 의지했고 삶은 크게 변화했다.
 -기사 본문 중-


기계공업과 전자산업의 발전으로 인류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마주했다. 편리한 생활, 풍부한 정보, 빠르고 신속한 업무처리 등을 경험하고 있다. 작은 컴퓨터 상자와 손바닥만  스마트폰이 인간의 생활패턴과 문화를 혁신적으로 바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의 진화와 적용에 적정함이 사라지면 다양한 사회문제, 자연환경 파괴와 자원고갈 같은 문제가 발생.


또한, 이는 결국 '디지털 격차'를 불러오고, 그 격차로 인해 필수적인 서비스와 권리 행사를 못하게 되는 도태된 계급이 생산될 수밖에 없다. 이는 묘하게도 부의 격차, 그로 인한 학습의 격차와 연동하여 고착화된 계급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보다 포괄적인 '모두를 위한 기술'로서의 '적정기술'이 필요하다.


적정기술은 기술 권력이 빈자들에게 베푸는 '적절한' 연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프리카에 전력과 식수가 없다면 대용의 아이디어 상품을 선심 쓰듯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대체 에너지 생산과 유통, 치수관리에 대한 궁극적 기술과 산업의 이전이 더욱 효과적이다. 더 이상 적정기술이 투자자들의 눈먼 욕심이 아닌 기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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