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이 연극이 되는 순간... 망한다
'극장국가’라는 말이 있다.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발리의 고대국가 느가라(Negara)의 사례를 통해 제시한 새로운 통치 체제에 대한 개념 정의다. 간단히 추리자면, 물리적 강제와 통제가 아닌 주목을 끄는 과도한 의례와 이벤트의 과시로 통치되는 국가를 말한다.
느가라(Negara)는 네덜란드 식민시대 이전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던 국가였다. 네덜란드 식민시대 이전 인도네시아의 고전적 국가를 이른다. 20세기의 서양의 정치학자와 인류학자들은 느가라라는 국가의 정치체제를 관개농업의 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전제군주 독재체제로 이해했다. 하지만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극장국가'라는 틀을 통해 이루어지는 발리의 상징적 의례 행위가 단순히 권력의 장식품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쇼'가 이념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라는 말, 선뜻 이해가 어렵다.
느가라 주민들에게 국가의 의례는 정치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국가의 목적이자 인간 존재의 확인 그 자체였다고 기어츠는 이해했다. 의전과 화려한 국가 예식 등이 선전과 홍보를 위한 수단을 넘어, 그 자체가 국정이 되고 통치가 되는 실체이며, 국가는 커다란 극장이 되고 통치자는 주연 배우가 되며 국민은 관객이자 액스트라가 되는 것이다. 극장에 올리는 연극은 지배권력 강화를 위한 스포트라이팅을 유지하는 것이며, 국가 구성원들은 이미 쓰인 각본 때문에 일상과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질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극장국가 대한제국>에서는 고종이 연극의 연출자이자 주연 배우이며, 백성은 그 관객이라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해외 열강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취약해진 조선의 왕 고종이 최후의 수단으로 택한 것이 바로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의 초유의 연극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의도에서 대대적으로 의례를 정비했다. 이전 어느 때보다 규모가 커진 화려한 종묘제례악이 행해졌으며, 황실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끊임없이 오르내려 백성들을 관객석 1열로 끌어들였다.
공연에 집중하는 관객들이 공연과 하나가 되듯이, 백성들은 국가의 거대한 연극에 심취해 대한제국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세뇌하고 있었다. 고종은 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내지 못했지만, 당시 백성들에게는 하나뿐인 존엄이고 임금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대한제국에 대해 혹자들이 '가장 쓸데없는 나라'라고 하지만, 그 10년 동안의 극장적 요소가 지금까지 주요한 국가 정체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도 사실이다. 씁쓸하게도 그 시절 만들어진 태극기가 대표적인 예다.
학자들이 손꼽는 또 하나의 '극장국가'는 "북한"이다. 김일성 사상을 승계하는 김정일, 김정은 세습 구조를 큰 반동 없이 구축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극장'의 유용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서구나 제3세계의 독재와 전체주의와 유사해 보이지만, 북한이나 중국, 베트남의 공산당 1당 독재의 모습은 특이하다. 국가의 구성원이 통치자를 정치적 권력자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기에 '무력 제압'만 내세우지 않아도 독재적 지배가 수월해진다. 가족주의적 국가를 중요시하는 주자학인 유교가 현대 국가에 스며든 이유로 보인다.
통치자는 곧 나라의 '어버이'가 되고 국가 구성원들은 그 '자녀'가 되는 거대한 연극이 유효해진 이유다. 본 적도 없는 수령이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되어 '당'에 대한 충성은 곧 가족사랑이 된다는 세뇌 교육이 가능해졌다. 집합 체조나 공연, 문화예술의 계도, 빈집 투성이의 빌딩 숲, 그리고 열병식과 당원 대회. 이 모두는 종묘제례에 버금가는 '국가 정체성'으로 자리 잡고, 이 의례와 행사가 '수단'이 아닌 '국가' 그 자체가 된다.
10.29 이태원 참사의 공식적인 '애도기간'이 끝났을 무렵을 기억한다. 이 기간 동안 뉴스의 첫 꼭지는 분향소를 찾은 윤석열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참사는 사고로, 희생자는 사망자로 부러 의미 축소하는 희한한 행정 지침 속에서 국가 안전의 포괄적 책임자의 모습은 어색하게 국화 한 송이 들고 뒤뚱뒤뚱 헌화하는 것만 보였다. 희생자의 사진도, 이름도, 위패도 없는 분향소의 헌화 의례의 주인공은 윤석열 대통령 자신이었다.
그뿐인가. 기이한 행동은 지속되었다. 불교ㆍ개신교ㆍ천주교의 위령 종교 예식에 모두 다 참석했다. 성경을 외운다는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어색한 합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종교적 결례일 수도 있는데 천주교를 제외하고 강단과 제단에 올라 자신의 '애도의 노력'을 설파하려 했다. 애도기간의 스포트라이트는 자신의 모습을 미디어 프레임에 잘 걸리게 만들려고만 했다. 정작 '제사'와 '위령'의 주체인 희생자와 유가족은 온 데 간데 없이 말이다.
그 후 그 연극의 2막이 열렸다. 회의 석상에서 격노하며 깨알같이 경찰을 질타했다. 마치 경찰은 이 나라 행정 기관이 아닌 듯 몰아붙였다. 부러 방송에 장면을 공개했다. 극장이 문을 연 것이었다. 그 후 유체 이탈식의 부조리극은 계속되었다. 주연을 보조하는 측근 조연의 교체는 자칫 극을 망칠 수 있으니 선을 그었다. 말단 경찰, 소방관을 악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팔짱 낀 검사 출신 법무부 장관은 속으로 메롱 대며 조롱하고, 경찰 수사권 확대가 문제라며 기승전 문재인 탓을 해 대었다.
참혹스러운 죽음마저 자신의 연극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 같은 생각이 깊게 들었다. 이 연극의 부조리함을 지적하는 사람은 관객이든 관계자이든 취재이든 상관없이 입장 금지시켰다. 자신의 대본대로 정적과 반대 세력을 빌런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제압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어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더 이상 이 삼류극장을 두고 볼 관객이 아니었다.
정권이 유한하다 느끼는 것은 아이들이 방학이 끝나갈 무렵 개학의 압박을 감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방학 중 자유로운 시간에 여러 핑계로 해야 할 일과 해내야 하는 숙제들을 미루다가 개학날을 마주하는 마음. 이 정권은 겨우 반을 지내 보냈는데도 사람들은 벌써 개학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보여주기식 주술에 기대다가 무지와 무능이 한꺼번에 드러난 벌거벗은 임금의 모습을 오천만이 목도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극예술에 '마당극'이라는 게 있다. 연극적 요소에 풍악과 춤사위를 더해 당대의 기득권을 비판하는 풍자와 해학의 '쇼'다. 마당극의 특징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특징은 '방백이 곧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관객에게 내뱉는 방백이 다시 추임 되어 메아리로 돌아온다. 어느 면이 정면인지 구분할 필요 없이 청중으로 사방을 둘러싼 연극판은 주인공, 배역의 뜻대로만 굴리기 쉽지 않다. 관객들의 호응과 수긍이 없이는 쇼는 지속되기 어려우니까.
어리석은 자들의 광대놀음에 다시 촛불을 치켜들어 호통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무거운 날이다. 그래서 광장은 늘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