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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17. 2024

거짓말의 정의(定義)

거짓말이 넘치는 세상을 살다

거짓은 두 모습이다


<페르마의 밀실>이라는 영화가 있다. 2007년에 나왔지만 2012년에야 한국에 소개된 작품이니, 굳이 몰라도 괜찮은 작품이다. 4명의 유명한 수학자들이 피에르 드 페르마라는 사람의 초대장을 받게 되고, 밀실에 모여 문제를 풀어야 살아 나간다는 밀실 공포물이다. 한때 중고등 수학 시간에 이 영화를 단체로 보는 곤욕도 겪었다고 한다.


영화 <파르마의 밀실> (사진=키노라이츠)

영화 중에 거짓말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거짓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고, 진실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진실을 말한다.

한 외국인이 문이 2개 있는 방에 갇혔다. 하나는 자유로 가는 문이고, 하나는 아니다.

한 문은 거짓 나라의 간수가, 다른 문은 진실 나라의 간수가 지키고 있다.

외국인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각 간수에게 한 번씩 질문을 하고, 답을 들을 수 있다.

어느 쪽이 진실 나라 간수이고 거짓 나라 간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외국인은 어떤 질문을 해야 자유로 갈 수 있을까?"


정답은 "상대편 간수에게 이 문이 자유로 가는 문이라고 물으면 맞다고 할까요?"이다. 각 간수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한 간수만 선택해서 물어보고, 아니라고 하면 그 문으로, 맞다고 하면 다른 문으로 가면 된다는 풀이다. 이렇듯 거짓은 원래 논리, 수리의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거짓이라는 의미는 늘 양가적이다. 국어사전을 펼치면 두 가지의 양가 해석이 나온다.


1. 사실과 어긋난 것.
2. 또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민 것.


그리고, 논리 명제의 해석.


1. 이치(二値) 논리에서 진릿값의 하나.
2. 명제가 진리가 아닌 것.


너무 어려운 말이 아닌데 머리에 안 잡힌다. 좀 더 풀어내 보자. 어떤 정보 따위가 사실이 아닌 것이 거짓말이다. 진실과 반대의 개념이다. 그 사실이 아닌 것을 말로 꾸며 대는 것도 거짓말이다. 논리 명제는 잊어도 된다. 이치 논라란 참ㆍ거짓의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니까.


‘거짓말’은 거칠게 정의하자면 거짓을 말로 하는 것이다. 거짓의 정의로 비추면 이것도 두 개의 모습이 있다.

1. 사실이 어긋난 것을 전달하는 것.
2.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이야기하는 것.


두 가지가 비슷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그 간격이 보인다. 사실이 어긋나는 것을 전달한다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한 화자의 판단은 알 수 없다. 일종의 전언이다. 그러나 거짓말이다. 또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 꾸며 대는 것이다. 화자는 거짓을 판단하였을 뿐 아니라 의도를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통념을 들어주자.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위험해 보이는가?


거짓말이라는 자체로 위험해 보일지도 모른다. 사고 투성이 YG의 보이밴드 빅뱅이 부른 <거짓말>의 후렴구가 떠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세기말 1999년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의 가학적인 성애 묘사가 생각났을 수도 있다. 가수 승리가 버닝 썬에서 무엇을 태워 물었든, 작가가 구속된 왜설로 낙인찍힌 소설 속의 주인공 제이의 위험한 살색이든 거짓말은 최소한 언짢은 무엇이다.


영화 <거짓말> (사진=namu.moe)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거짓을 판단 보류하거나 진실이라 오인하여 전파하는 것, 그리고 거짓인 것을 알고 사실인양 말하는 것의 차이는 명백해 보인다. 인지하거나 판단하지 못했다고 면죄부가 주어질까? 너는 순해 빠져서 속아 넘어간 것이니 감경 사유라고 염라대왕이 손들어 줄까? 어쩌면 무지로 핑계의 무덤을 쌓는 이는 더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실에 어긋난 것을 모르거나 인지하지 못한 채 거짓을 전달하는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 보자. 믿기 쉽고 속아 넘아가기 쉬워진다. 진심이 진실을 대변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실 추궁의 궁지에 몰리면 버릇 같은 말을 한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라는 변명이다. 자신이 듣거나 믿은 사실을 전했을 뿐 속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라는 주장이다. 이 지점이 사실 더 위험하다. 거짓말은 결론적으로 사실의 어긋난 말이다. 그럼에도 핑계와 구실이 자칫 연민과 동정의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짓을 인지하고 말로 꾸며대는 것은 더 악질적인 것인가? 여기에서 ‘미메시스(mimesis)’라는 이하 힘든 이야기가 나온다. 미메시스는 쉽게 풀이하자면 ‘모방’이라는 말이다. 모든 모방은 거짓이다. 모창, 모작, 모사, 모형 등 모조는 실체의 진실이 아니다. 플라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물은 이데아라는 참된 실재의 모방이라고 했다. 일생 저너머의 무엇에 대한 탐구에서 보면 인간의 생은 모두 상징이고 거짓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는 이 모방에 대한 구체화의 산물이다. 어렵지만, 이해를 했다 치자. 못해도 큰 상관없다. 모방은 거짓인 것을 알고 하는 거짓 행위라는 것이다. 예술이 여기에 해당이 된다.



"믿을만한 거짓말"은 어느 쪽일까?


다시 던져진 화두를 보자. "믿을만한 거짓말"에 사람은 더 잘 속는다라는 것. 속는다는 표현이 거슬리면, 거짓말을 믿는다 해도 상관없다. 이 정리를 반대할 이유도 반증할 능력도 없다.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가치부여가 된 정보 따위에 믿음이 더 간다는 비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더 잘 믿음을 주는, 가치부여를 하는 거짓말은 앞선 두 가지 유형 중 어느 쪽일까? 거짓인지 모른 채 전하는 거짓, 거짓을 잘 꾸며대는 거짓. 이 지점은 각자의 가치판단 영역일지도 모른다. 모든 거짓말은 파생되고 진화되고 변모한다. 유기체처럼 생애주기가 있으면서 무기질처럼 외력에 변성되기도 한다. 두 양상의 거짓은 서로 뒤엉켜 공존하는 것이 현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근원의 거짓은 알면서 꾸며낸 무엇이기 때문이다.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이 아담에게 건넨 속삭임은 거짓이다. 꾸며댄 거짓이다. 그 후 아담이 하와에게 건넨 꼬드김은 믿음 가득한 확신이다. 결론은 거짓이나 아담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아담은 거짓말쟁이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벌을 받아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누구의 거짓이 더 믿을 만 한가? 더 위험한가?


미켈란젤로 <원죄와 낙원에서의 추방> (사진=늘푸른나무)


화자와 청자의 관계와 주변의 환경을 모두 고려해야 하지만, 거짓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전달되는 거짓이 더 위험해 보인다. 적어도 그 거짓말을 전한 화자의 ‘진심’은 진짜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르게 확산되고,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선동’은 이 반응 효과를 재빨리 알아챈, 영리한 모사꾼의 비기로 둔갑되는 것이다. 믿고 싶은 거짓은 화자가 믿을만할 때 가장 위험하니까.



믿을 만한 존재의 거짓이 가장 위험하다


거짓인 줄 알고 꾸며대는 거짓은 오히려 덜 위험할 수 있다. 전제가 있다. 화자가 거짓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청자가 거짓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재량이 전제이다. 이런 경우의 대표가 ‘예술’이다. 모든 예술은 실재의 모방이 기본이 된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사진 모두 실재하는 사물과 사건을 모방하는 행위니까. 그래서 화자는 그 거짓을 표시한다. 프레임으로, 지면의 한계로, 무대라는 장치의 노출로. 청자도 알면서도 속아 준다. 재미로, 영감으로, 자극으로, 감동으로 느끼면서 말이다.


이 거짓말이 사실에 근접할수록 인간은 자극과 감동을 더 받게 된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핍진성이라고 한다. 그럴듯함이라는 핍진성은 문학, 미술, 영상의 꽃이 되었다. 그래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게 된다. 거짓의 시간은 작가와 독자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책이 덮이고, 그림의 화폭이 한정하고, 영화가 끝나면 거짓의 시간은 끝이 나니까.


이 거짓을 옮기는 전언의 화자가 사실처럼 묘사해 전한다고 치자. 이야기 할머니가 김정은 할아버지 김일성은 혹이 난 돼지 괴물이라고 너무 진짜 같이 말해 준다. 이것을 들은 철이와 영이는 사실로 여기어 친구들에게 전달한다. 평소 반장 부반장인 두 친구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지고 아이들은 모두 김일성이 빨간 돼지 괴물이라 여긴다. 무섭게도 진실처럼 믿는다. <똘이 장군>을 본 80년대 아이들도 겪은 이야기처럼. 이를 보통 프로파간다의 거짓이라 한다.


똘이장군 (이미지=아이엠피터)


거짓을 최초 꾸미는 사람은 비교적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양치기 소년의 교훈을 떠 올려 보면 쉽다. 그러나, 내가 신뢰하는 사람, 존재의 입에서 나온 거짓은 믿기 십상이다. 우선 믿고 본다. 거짓 선동과 가짜 뉴스는 이런 틈을 노린다. 설마 교수가, 정부가, 언론이, 검찰이, 경찰이, 목사가, 신부가, 대통령이 거짓을 말하겠냐는 ‘모두의 일반화’가 모든 사달의 씨앗이 되곤 한다.


최근 정치와 사회의 일면을 보면 ‘거짓말’과의 분투처럼 보인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은 물론 그 권력을 이용하려는 라스푸틴 같은 괴승의 궤변도 정설처럼 보도된다. 하기사 70년 전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지금의 언론이라는 것들은 ‘모기’소리나 다름없어, 사람들의 귓가에서 들릴 듯 말 듯 윙윙 거리는 일이 다이니, 언론은 정론이길 이미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이든’이냐 ‘날리면’의 듣기 평가부터 트럼프 당선 예언 골프 연습까지 해명이라 쓰고 거짓말이라 읽히는 일들이 넘쳐나고 있다. 부러 거짓을 고하는 원발의 주체보다 그 거짓을 의심 없이 전달하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위태롭게 만든다.


하얀 거짓말이란 것은 없다. 거짓에 대한 수많은 핑계 중에 가장 그럴듯한 연민 호소일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 정보와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면, 사실 그대로 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낸다. 결국 사실과 진실은 알게 된다. 미제의 일이라도 귀신이라도 알게 된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 거짓이란 역설적으로 참이 되니까.


진실을 고할까 거짓으로 덮을까의 기로에서는 주저할 이유란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가 없다. 결국 참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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