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내다'와 '짓다'가 손가락질받는 시대
'글짓기'라는 단어는 나의 세대에게 익숙한 말이다.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타기 이전 국민학교 시절, 글짓기는 중요한 교과 과정의 하나였다. 그 시간을 무척이나 즐겼고 제법 잘해 내었던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들 덕분에 '글짓기'라는 말은 내게 다정스럽다. 그러나 그 다정스러운 말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지 꽤 되었다. 오해가 정설이 되는 말의 파편화의 시대에 이 논란은 한걸음 물러서 본다면 본질의 무게보다 실제의 파장이 능가해 버린 사르트르식의 푸념처럼 보인다.
글짓기가 글쓰기에 밀려나 마치 잘못된 표현으로 오해받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교육계에서 먼저 일었다. 글짓기는 역사가 오래된 표현이다. 보통 초등 교육과정의 글짓기는 중등 과정으로 넘어가면서 한자의 옷을 입어 작문이 되었다. 그리고 고등교육에서 논술로 발전했다. 작문(作文), 글을 만들어 짓는다는 의미의 단어가 글짓기의 원형이다. 그래서 보통 글을 직업적으로 쓰고 짓는 사람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이 글짓기가 오해를 받기 시작한 것은 존경받는 아동 문학가이자 교육가 이오덕 선생의 문제제기에서 시작해, 한국글쓰기연구회 활동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면서부터다. 아이들이 일기나 동시를 억지로 지어내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세상의 공감을 얻은 바가 크다. 어릴 적 기억의 몰아치기식의 방학숙제와 반강제적인 작시 과제에 대한 건강한 비판에서였다. 틀림이 없어 보이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조응은 당시 '교육 제도 체계'에 대한 거시적 비판이 주를 이룬다. 이른바 주입식 강제 교육에 대한 반발과 비판의 정서였다. 그 주장이 애꿎은 글짓기라는 말을 문화혁명의 분서갱유처럼 처형대에 세웠을지도 모른다. 사실 글을 짓는 일과 억지로 지어내는 일은 그 어원의 뿌리가 같을지 몰라도 전혀 다른 말이다.
글을 '짓는 일'은 생각보다 뿌리 깊은 인간 본연의 특성이다. 축복과 염원, 기도와 주문 같이 말과 글에는 본디 주술적 힘이 있다. 글쓰기를 엄숙한 무엇으로 여기던 세계는 계급이 나누어진 통제 사회였다. 반면 억지로 쓰는 반성문과 어쩔 수 없이 쓰는 일기도 일면 자기 수양의 효과는 있는 법이듯 글을 쓰는 일은 놀이의 개념이었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놀이와 같이 가벼운 유희가 본질이다. 지나친 엄숙주의가 이 원초적인 인간 행위에 인위적인 가드레일을 만드는 것을 유의해야 하지, 말과 글을 유희적 자아가 지어내는 일을 억제해서는 안된다. 유희적 자아의 발현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시라는 것도 말의 유희고 소설도 사실 이야기를 꾸며 내는 일종의 장난이었으니까.
문학이 한때 대중문화였던 시절도 있지만, 이제 대중문화의 영역은 온갖 미디어와 콘텐츠들이 가득 채워진 지 오래다. 이런 시대에서도 글을 쓰고 이야기를 짓는 일은 중요한 교육이라 생각되어 각종 백일장이나 글쓰기 대회는 매년 성황이다. 대회와 수상이라는 강박도 문제지만 그 안에 말장난 같은 과제물이 늘어나자 교육계에서는 '지어 내는'일을 터부시 하고 교육 엄숙주의로 일관하는 모습도 여전하다. '짓는 일'을 그래서 회피하게 된 것은 아닐까. '거짓'과 '억지로'라는 한계 전제로 인한 다소 과잉 비판의 요소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존재'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은 '작화', 즉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지어 서사를 쌓는 활동이 인간의 뇌작용을 발달시켰고 그 결과가 문화의 토대 위에 쌓은 문명이라는 주장이다. 무언가를 지어내는 일은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고 이를 흔히 창조(創造) , 창작(創作)이라 이야기한다. 만들다는 의미의 조(造)와 작(作)이라는 글자의 차이를 떠나서 짓는 일은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종의 특성이고 인류와 문화를 이루어낸 근본인 것은 틀림없다.
글을 쓰는 것이 맞는지 글을 짓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쟁에 끼어들거나 부추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더욱이 글짓기가 맞고 글쓰기는 틀리다는 주장도 아니다. 글쓰기라는 것은 단순한 필기와 달리 의견, 정보, 이야기와 감정을 일정한 질서가 있는 문장으로 엮어내는 일이니까. 글을 쓴다는 표현도 순작용의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안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 누군가의 강요와 억지 추궁으로 만들어지는 습관이 된다면 끔찍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계 한편에서 글짓기라는 말에 날을 세우는 것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짓기'라는 말이 잘못된 표현으로 취급받는 일은 서글프다. 무수히 많은 사유와 고뇌들이 이야기라는 서사 위에 그들만의 집을 지어 놓은 것이 문학이라는 저수지가 아닐까 싶다.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나는 아직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글을 짓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작가라는 호칭이 무겁고 불편하다. 이런저런 잡문을 쓰는 사람으로서 글을 짓는 사람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그들이 지어 낸 이야기의 행간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일은 여전히 설렘 가득하다. 물론 <아Q정전>의 루쉰이 그랬던 것처럼 잡문을 꾸준히 끄적거리는 일도 대단하다. 그 쓰는 일을 건너 짓는 일로 가고픈 것이 마지막 소망이 아닐까 싶다.
엊그제 아내가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삼성동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 들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에서 만나 볼 일을 보기 위함이었는데, 아내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도서관이라 이름 붙은 장소를 둘러보았다. 쇼핑몰 가운데 만남의 광장과 포토존이 되어버린 거대 책장들 사이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살펴보았다. 가장 좋은 장소는 자본주의가 차지하고 있었다. 잡지책들과 판매 유도를 위한 온갖 신작들, 베스트셀러들. 그 책들 사이에 잘 지어낸 이야기 책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퉁이 구석지고 그늘진 자리에서나 쥐스킨트, 헤밍웨이와 헤르만 헤세를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요즘 세상에 글쓰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흔하다 못해 넘친다. 결과로 책을 엮어 준다는 달콤한 말에 혹하기 일쑤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글쓰기는 가르쳐 주고 배울일은 아닌 듯 싶다. 그저 그 습관의 형성을
위한 보조적 도구로 각종 강의들이 성행했으면 한다. 오히려 글쓰기보다 글짓기가 더 배움이 필요한 영역이 아닌가 싶다. 글의 목적과 방향, 그리고 문장의 완성도 중요하지만 글감을 잘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일은 모든 크리에티브의 근간이 된다. 이 창작의 결실을 위해서는 구조를 만들고 서사를 얹는 방법과 경험의 조언이 큰 힘이 된다. 이렇듯 무언가를 쓰는 일이 습관의 작용이라면 무엇을 짓는 일은 결심의 반작용이다. 쓰임새가 본디를 덮는 순간 가짜가 되기 십상이다.
글을 쓰기 이전에 결심을 세우는 것. 그 자체가 글짓기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목수가 집을 짓고, 농부가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가 밥을 지어내듯, 그 결심에는 우주정복이나 세계평화 같이 거대한 무엇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각자의 경험과 고민이 사유와 통찰 위에 글로 뼈대를 만드는 '글짓기'라는 말이 나는 좋다.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