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폭력 앞에 인간 존엄을 증거 하는 다성악
그때 너는 죽었어.
...
그때 그곳으로 가야 했을까. 그곳으로 힘차게 날아갔다면 너를, 방금 네 몸에서 뛰쳐나온 놀란 너를 만날 수 있을까.
- 2장 검은 숨 p64 -
너를 찾는다.
그날의 너를 찾는다. 그리고 오늘의 너를 부른다. 그 서늘했던 이야기의 시작은 낯설게도 '너'를 호명한다. 너를 부르는 호명에 좌우를 둘러보고, 앞뒤를 살펴보며, 어제와 오늘을 가늠해 보아도 너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표만 가슴에 부풀어 오른다. 너는 곧 그가 되고 그녀가 되었다가 그놈과 그 녀석을 훑어 다시 당신이 된다. 그리고 너는 결국 내가 된다. 아니 처음부터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렇게 너를 찾는다.
복잡한 호명에 서성대며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다. 그 뜨거운 오월의 아스팔트 위, 서늘한 밤의 눈이 내려다보는 도청 2층 그 구석, 열십자로 서로 포개져 수십개의 다리가 달린 커다란 괴물이 되어 버린 그 구덩이, 서로의 체온이 살기가 되고 각자의 허기가 증오가 되는 그 철창 안,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내 안의 여자를 도려낸 취조실 그 철제 책상 위, 되려 도망친 신세가 된 절름발이 검은 사슴이 숨어든 서울의 어느 대학병원의 그 등 없는 의자, 그리고 발목까지 젖어든 눈 녹지 않은 그 묘비 앞. 그곳에서 너를 찾아 결국 나를 만난다. 그제야 그 호명이 소리 먹은 초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를 부르는.
소설 <소년이 온다>는 이렇듯 대뜸 너를 호명하며 어리둥절 낯설게 한다. 이 자체로 문학이라는 거대한 벌판 위에 작가는 자기만의 울타리를 친다. 소설을 마주한 어리석은 자는 낯섦에 당황하다 이내 깨닫는다. 너는 바로 나였음을. 고통스러운 증거 속에서 처음 그 순간부터 그 호명이 나였음을 알아가는 제법 무겁고 서늘한 이야기다. 단지 변화무쌍한 인칭과 시점에만 당황스러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시간이 모호한 것인지 너와 내가 서있는 이 세상이 흔들리는 것인지. 모든 서술어의 어미를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야 그제야 소설의 시간 변주를 알아챌 수 있다.
시점은 작가의 시선이 아닌 공간의 눈높이다. 시제는 시간을 가르고 세우는 거리석이다. <소년이 온다>는 그 시점과 시제를, 공간과 시간을 엮어 억센 직물의 물성처럼 직조한다. 그저 한 숨결로 펴내리는 흔한 직물이 아닌 여러 겹의 시간과 공간이 꿰어 낸 수의, 안동 모시 삼베 같다. 여섯 장으로 구성된 모든 이야기의 시선은 다채롭고 그 시선들이 머문 시간들은 변주된다. 바흐찐이 말한 상호텍스트의 다성악이 한 작품 내에서 조응한다.
첫 장의 너를 부르면, 다음장의 내가 답하고, 나를 넘으면 그녀가 있고 그와 당신이 있으며 비선형으로 회귀해 다시 너를 부르는, 정확하게는 너의 혼을 부르는 초혼을 만난다. 시선과 시간의 모호함과 복잡함을 건너고 나면 이야기를 따라간 우리는 결국 한 점에서 만난다. 그날의 광주. 1980년 5월 그 밤. 폭죽이 터지듯 죽음이 내려치는 도청의 검붉은 밤.
소설의 시점은 여섯개의 장마다 시선을 바꾼다. 열여섯 동호로 남은 너를 부르며 곁에서 관찰하는 시선에서 시작해, 정대가 혼이 되어 나의 독백으로 너를 찾는다. 선택의 순간 학살의 현장을 떠나 살아난 은숙은 그녀로 불리고, 살아남은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진수는 그저 김진수로 증언된다. 무참히 짓밟혀 통각마저 혼란스러운 선주를 당신이라 불러 세운 뒤, 마지막 어무이의 쉰 목소리로 너 동호를 보듬는다. 각 장마다 얼굴을 바꾼 화자는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을 겪어낸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시선이 변검처럼 바뀌더라도 사건의 당자들과 목격자들이 애써 증거 한 진실은 언제나 한 가지다.
단지 인칭과 서술 시점만 변주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흐르게 되고 죽은 자의 오늘은 산 자의 어제가 되듯 소설의 서술은 시제를 넘나 든다. 시제뿐만이 아니다. 각장의 시점과 화자가 변하는 만큼 말과 소리로 읽히는 문체와 글색이 탈바꿈한다.
변화하는 화자와 서술을 가만히 느껴 보면, 애써 묻어 놓았던 우리 문학의 문장들이 튀어나온다. 그 시절 깊게 읽었던 이청준과 김승옥이 있고, 큰 산 같던 박경리와 조정래를 만난다. 운율과 건조의 운문과 산문이 주고받는 꼴에 윤동주와 기형도를 잠시 떠 올리고 이창동과 황석영의 젊은 날을 마주한다. 그리고 아련하게 그리운 우리말에 김유정의 만무방과 정지용의 시어들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문학의 힘이란 유연할리 없는 고발과 증거의 말들을 압도하는 무엇이 있는 법. 그 힘이 문장 틈틈이 자리 잡아 문학적 낯섦으로 승화한다.
관심 가득히 너를 관찰하는 말투에서 어리숙한 중학생의 독백으로, 다시 살아남은 자의 검은 가슴을 대변하는 희곡과 연극으로 옮겨진다. 진수를 진술하는 녹취와 증언 같은 것들이 들려지다가 이내 곧 마음 굳게 닫은 당신 선주의 방백이 무겁게 깔린다. 결국 어무이. 어무이의 찰진 사투리로 너를 애달프게 그리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렇듯 서사의 변주는 결국 나름 나름의 고통을 겪어 내는 너와 나, 그와 당신, 아들과 어무이의 이야기로 화성의 노래탑을 쌓는다. 그 오월의 광장에서 애국가처럼.
소설은 현재형과 과거형의 서술 어미를 옷을 바꾸어 입어 가며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을 가르어 나눈다. 이 이야기는 커다란 장례식의 어떤 날일지도 모른다. 초혼(고복)-염습-입관-발인-장묘의 전통 장례 중 처음 단계 초혼에 아주 긴 시간 머문 애달픈 상을 치르고 있다. 아직 당신들을 잃은 뒤 너를 찾지 못해서, 너를 찾지 못해 장례를 치르지 못해 여전히 혼을 부르며 초혼을 할 뿐이다. 저녁에 머문 우리들의 시간은 거짓 조명에 잠시 환한 듯 밝아지는 것 같이 착각이 들지만 이내 곧 너를 찾지 못했음을 알게 되면서 저녁이 깊어 간다.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그리 많이 죽어 사라졌는데 어찌 너를 잊을까.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 3장 일곱개의 뺨 p79 -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3장 일곱개의 뺨 p99 -
우리는 아직 상(喪)중이다.
그날의, 그 밤의 사건은 결국 하나의 커다란 길고 긴 장례가 되었다.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산자의 몫이 된다. 살아남은 자의 환각통과 살아가는 자의 쓰린 가슴으로 죽은 자를 마주 해야 하는 일. 그것이 검붉은 폭력에 대한 씻김의 정화이고 산자가 원죄에서 벗어날 유일한 세례가 되니까.
그 장례의 당위를 3장 '일곱개의 뺨'에서 어느 작은 연극 무대를 빌어 말한다. 군부독재 시대에 먹지가 되어 버린 검열로 대사가 통째로 날아간 그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은 삭제된 대사를 잎만 뻥긋대고 소리는 그저 신음만 토해낸다. 슬프고 비통한 죽음 앞에 서글프게 곡을 하고 초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살아남은 자 은숙은 다짐한다. 인간을 믿지 않겠다고, 어떤 표정, 진실이나 유려한 문장도 신뢰하지 않겠다고. 그저 세상에 대한 의심과 역사를 거스른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겠다고. 억지 살아남은 자들의 초혼은 구슬픈 곡소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 뿐이다.
군중의 도덕성을 결정하는 요인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
...
인간은 무엇인가?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2장 일곱개의 뺨 p95 -
죽음은 그 모든 걸 한 번에 지우는 붓질 같은 것이라고 김진수에 대한 증언을 빌어 작가는 말한다. 비루하고 비참한 무엇의 존재로 하루하루의 일상이 되어 버린 삶을 지우는 것이 죽음이다.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았던 지독한 고문의 일초,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으며 식판 앞의 서로를 증오하던 살기로 채운 삶을 지워내듯 죽음은 늘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이라고. 그래서 느닷없는 죽음을 목격한 생존자들은 이따금, 아니 어쩌면 자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김진수처럼. 이제 남은 자들의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모든 진실의 주검을 찾아 장례를 다 치르고 봉긋한 묘지를 양지바른 곳에 올릴 때까지 말이다.
내 맨 처음의 광주는 영화 같은 목격담이었다. 80년 5월의 그날 이후 몇 해가 지난 국민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광주에서 전학 온 녀석이 군인이니 총알이니 시체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현실감없이 거부감만 가득했다. 나라가 국가가 그럴리 없으니까. 또 몇 해 지나 주일학교 교사였던 대학생 형 누나들을 따라나선 사진전에서 보았던 그 참혹한 사진들을 기억한다. 한강 작가가 보았다는 그 사진들이 아닐까 싶은 훼손된 주검의 사진들. 하지만 모두 남의 일처럼 받아들일뿐였다. 그럴 수도 있지만 다 지난 일이니까.
대학을 가서야, 아니 부친의 보증으로 가계가 무너지고 주머니 텅 빈 고학생이 되어서야 광주를 동조했다. <죽음을 넘고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숙제처럼 읽어야 예비학회에 참석 가능했던 그 대학 시절, 민주화가 되었다는데 아직 최루탄 직격에 죽어 나간 동지를 기리며 만장을 들고 삼일고가도로를 넘던 그 시절에서야 흐릿하게라도 광주를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그 이해와 공감이 그날의 아픔 때문인지 내 삶의 처지 때문인지 헷갈림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흐릿하게 그날의 광주를 기억의 뒤편으로 흘리며 제법 오래 살았다.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할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p207 -
광주는 그날의 광주의 참혹한 사건으로만 남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광주는 때마다 철마다 수없이 되태어 났다. 작가가 회고하는 2009년 1월의 용산 뿐이던가. 아직 끝나지 않은 피폭은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이름으로 다른 얼굴로 다시 태어나고 곧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해 파편화되어 버린 광주는 용산에서 팽목항에서 이태원에서 또 다른 검붉은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태어나 죽어 나갔다. 어쩌면 작고 어두운 골목에서는 날마다 광주가 되태어나고 살해당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른 체 하며 살았다. 그렇게 모른 체 모른 척하는 체 모르고 싶은 체 살아남았다. 우리 모두.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여전히 상중이다.
따뜻함이 끼어들 수 없는 문장은 틈을 내어 주지 않고 끈질긴 의심으로 차가운 질문을 던지며 소설을 맺는다. 좀 더 따뜻하게 보듬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며 억지 해피엔딩에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들이 무려 '서평'이라 써놓은 말들을 보았다. 아마 그들은 날마다 되태어나고 다시 살해되는 광주를 느끼지 못하거나 모른 체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봄이 오고 무더운 여름이 와도 늘 시린 가슴으로 사는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어무이는 심장까지 뼛속까지 차가워져 갔는데도 말이다.
한강 작가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둘만큼 상주로서의 마음을 다진 듯하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이 그저 글을 쓰고 문학이 허락한 상상을 입히고 정성 들인 문장으로 엮어 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벨상이라는 이벤트가 없었다면 나는 한강을 다시 읽었을까, 아니 다시 이땅의 소설을 쥐었을까를 되물어 본다. 그 물음이 풀린 실타래처럼 늘어지며 그날의 광주를 그 광주의 죽음을 그 죽음이 갈라놓은 깊은 상처를 떠오르게 했다. 문학이 시대와 정신을 공유할 때 벌어지는 작은 내적 소란이 내게도 찾아들었다. 이런 작은 성공이 작가의 커다란 산을 만든 것이 아닐까. 서늘하고 차가운 이야기 마무리에 작가는 나더러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가라고 한다. 꽃이 피는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란다고. 그래서.
조금 쉬었다 한강을 다시 만나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