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값은 내가 책정한다
누군가에게 사는 것의 목표를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그 이유는, 나오는 답변이야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졌겠지만 핵심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답의 핵심은 '성공'이라는 결실들이다. 대부분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성공'을 목적에 두고 산다. 크고 작던 말이다.
올해 안에 국가고시를 통과하겠다는, 분기 매출 목표를 초과 달성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달성도 성공의 영역이다. 유튜브 보고 사놓은 주식이 떡상하기를 기다리고, 영혼을 끌어 모아 사둔 집이 두배로 오르기를 바라는 기복적인 세속의 욕심도 성공이 된다. 그뿐인가. 오늘은 저녁 7시 이후에 절대 먹지 않겠다고, 꼭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아침 시간을 늘리겠다고, 매일 물을 2리터 이상 마시겠다는 작은 다짐도 성공에 대한 노력이다. 이처럼 우리는 작게든지 크게든지 '성공'에 목말라한다.
52년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였을까 되뇌어 보았다. 유치원 시절 사생대회에서 급똥으로 미완성 그림을 그려 겨우 장려상을 받고 모친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던 날,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처음으로 나간 태권도 전국대회에서 6학년 형을 만나 손 한번, 발차기 한번 내지도 못하고 수건을 던진 그때, 그리고 열심히 준비하고 온갖 정보와 묘안을 짜내어 제안했지만 결국 고객사 최고위층의 친지에게 빼앗긴 수 백억 대의 수주 건. 성공보다 실패가 앞서 떠오르는 이유는 아직도 성공이 고프기 때문이 아닐까.
'성공'이라는 단어를 떠 올리자면 이런 "큼직한 일"들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를 들면 들수록 열패감에 젖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성공들이 있다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천식으로 체육 시간 열외되던 아이가 태권도를 하고 학급 달리기 대표가 된 일, 성당 문학지에 김동리 단편을 만화로 그려 좋아하던 선배(이 선배의 이름이 '봉준호'다)에게 칭찬을 들었던 그 중학 시절, 자신을 돌보지 않아 불어난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 피트니스 클럽 주최 최다 감량자가 되어 공짜 회원권을 받았던 그때, 그리고 33세에 금연을 하고 45세에 금주를 하게 된 작은 의지. 이 모두가 '작은 성공'이었다.
이전 안정적인 환경에 살았을 때, 내게는 글을 쓰고 나서 의 습관이 있었다. 그 글들을 다양한 판본으로 프린트하여 읽고, 쌓아 두는 일이었다. 사실 이 습관은 숱한 프로젝트 제안서 작성 시 생긴 버릇이 남은 것이었고, 글쓰기 시작한 처음에는 퇴고와 편집의 아웃풋을 보고 싶은 마음이 되었지만, 어느새 그 일이 소중한 루틴이 되어 있었다.
일종의 성취감이랄까. 엉덩이 무겁게 인내한 결과가 하찮은 종이 몇 쪽이라도 손에 잡히니 그 순간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이만큼이나 활자를 쏟아 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며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렇듯 내 일상의 '작은 성공'임에는 틀림없다.
제법 시끄러웠던 글값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고 의견 동참도 하였다. 글쓰기 플랫폼 운영에 대한 '공정시비'가 마치 '글값에 대한 푸념'으로 읽히는 것도 참 불편하였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할 수 있었다 싶었다. 그러다가 편성준 작가의 연재 칼럼 [글쓰기로 먹고살기]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84465?sid=110
어쩌면 우리를 가장 가슴 뛰게 하는 건 ‘창조의 불꽃’을 경험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숨어 있던 창조의 불꽃을 잡아내는 것, 그래서 생애 처음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그걸 소리 내어 읽어본 뒤 ‘내가 정말 이 글을 썼단 말이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그런 순간을 목격하는 쾌감이었다.
(중략)
베스트셀러 작가 채사장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내적 성장을 가장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게 바로 글쓰기다. 내 직업이 글쓰기라서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니 한 번 믿어 보시기 바란다.
-칼럼 본문 중-
솔직히 '창조의 불꽃'까지 가기에는 내 글솜씨가 비루하다. 하지만, 작은 성공을 이루어 내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전에 글쓰기에 대해서 "굉장한 일", "즐거운 일"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고백컨데 그 명제는 이루어 놓은 성공 후기라기보다는 이루고 싶은 찜 리스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던 중 살아가는 생계에 '글값'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서툰 희망이 더해져 그 찜해 놓은 가치 목적이 상실되어 있었다. 작은 성공마저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비싼 글로 인정받으면 좋을 것이다. 당장의 곤궁을 잠시 뒤로 미루어 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비싼 글'이 꼭 '좋은 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플랫폼의 기업 운영 방향성에 맞추고, 그들이 의도한 바에 잘 따르면 보상이 온다고도 열심히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어여쁨을 받아 한번에 4~70만 원의 보상을 받고 즐거워도 했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글들이 좋은 글일까? 열어 본 그때의 글들은 읽을 엄두도 서기 힘든 구린 글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때 '작은 성공'을 거두었을까.
이 작은 성공에 대한 글감을 정리하던 중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한림원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나약한 일상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문장(산문)'이라는 선정평도 인상적이었지만, 일전 한강 작가의 인터뷰가 먼저 떠올랐다.
"어쩔 때는 독자도 신경 쓰지 않고 글을 써요. 그저 내가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을까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글을 썼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채점을 기다리는 일은 아니다. 더욱이 상이나 베스트셀러의 보상을 받으려는 욕심이 앞장서는 일도 아니다. 그저 내 안의 '작은 성공'을 찾는 일이다. 그 작은 성공의 목표는 '좋은 사람'이 되고픈 마음이 아닐까.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그리고 덤으로 내적 성장이라는 평생 보상을 받는다. 글을 쓰는 것 자체로 '작은 성공'을 이룬다. 그 성공의 판단 기준은 플랫폼의 보상도, 타인들의 좋아요와 댓글도, 옆지기의 칭찬도 아닌 스스로의 '만족감'이어야 한다. "내가 이런 문장을 썼어!" 하는 자뻑의 나르시시즘이 허락되는 유일한 순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글은 지속될 것이고, 그 작은 성공들이 시간과 함께 불어나 내 인생의 성공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 글들이 나를 올바르게 성장시켜 '좋은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니까. 그 '좋은 사람'이 쓰는 글이 '좋은 글'로 향하게 된다고 믿는다.
https://v.daum.net/v/20221210040419140
나는 이 칼럼을 읽는 분들에게 글쓰기의 즐거움을 전파하고 싶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글을 쓰면서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확실히 다르다. 사이토 다카시 교수의 ‘내가 공부하는 이유’엔 “책 읽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글쓰기도 그렇다. 자신의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젊다.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칼람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