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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Oct 06. 2024

핀트와 포커스: 저널리즘적 글쓰기란?

질문이 없으면, 답변도 없다

사진 촬영의 3요소:

구도(프레임), 노출, 포커스


사진 좀 찍으시나요?


50여 년 살이를 돌이켜 보니, 글쓰기 다음으로 집중했던 것이 '사진'이 아니었나 싶다. 다 애증 하던 부친의 영향이었다. 중동 파견 근로자였던, 부친은 금주, 금욕의 사막에서 취미를 가진 것이 '사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 늘 자리 잡은 커다란 트렁크 가방 한가득 카메라와 주변 장비들이 채워져 있었다. 지금도 유명한 니콘, 아사히 펜탁스, 미놀타, 미녹스, 라이카 등등 카메라와 대포라는 망원렌즈부터 쩜사 단렌즈, 삼발이에 각종 액세서리들. 그 덕분에 사진에 친숙하게 되었다.

사진 좀 찍습니다

요즘은 똑똑한 스마트폰에 각종 디지털 촬영기기로 진화되면서 누구나 쉽게 '촬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 필름 카메라의 미러 방식의 사진 찍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사진 찍기를 '배워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오늘 사진학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간단한 3가지의 사진 찍기의 기본이 있다. 우선 피사체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구도(프레임)이고, 그 피사체를 얼마큼 보여 줄 것인가 하는 노출과 심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ㆍ조연을 구분해 주는 초점(포커스)이 그것이다.


사진은 '실사'라는 착시가 있다.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마그네틱 저장 필름에 거울 상을 통해 기록하는 것인데, 인화를 거치면 '사실'로 인지하게 되니까. 그러나 사진은 '실제'가 아니다. 사실에 가까운 기록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 촬영자의 의도와 생각, 그리고 여건이 만들어 내는 작은 변형과 왜곡들이 숨어 있는 기록의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찍기는 글쓰기와 참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에서 피사체가 되는 대상을 고르고, 작가의 의도 방향에 맞추어 구도를 짜고, 깊이와 무게를 위해 노출과 심도를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포커싱을 한다. 글쓰기도 그러하다. 글의 소재와 글감을 골라내어, 어떤 형식으로, 구조로 담을지 생각한 후, 그 대상의 묘사, 설명, 논평, 감상을 맞추어 가니까. 구도, 노출, 포커스 중 가장 많은 물리적 에너지와 시간은 '포커스'에 쓰기 마련이다. 렌즈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고, 한발 두발 재어 가며 표현하고 싶은 대상이 최대한 '사실'인 듯하게 잡아 내는 일, 글쓰기에서 상세한 묘사와 설명, 그리고 논거와 분석이 그러한 작업이 된다.



포커스만 제대로 되었다고 끝이 아니다


포커스의 중요성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포커스'는 누구의 몫일까? 피사체? 관찰자? 사진을 보는 이? 아니다. 바로 '촬영자의 것'이다. 어떤 피사체에 집중의 서선을 던질 것인가, 그 피사체의 어느 순간을 포착할 것인가는 찍는 사람의 의식ㆍ무의식 속의 '자의식'이 발로다.


어렵고 중요한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련의 사건, 현상, 개념을 선택하고 그 소재의 어떤 면을 투사할 것인가는 작가의 몫이다. 우크라이나-라시아 전쟁에서 다수는 '나쁜 악의 축 공산당'에 대해 조명하겠지만, 다른 경험과 식견이 있는 일부는 우크라이나 정치세력의 욕심과 미국의 허둥거림을,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끊기지 않는 충돌에 포커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의 선택이고 의지이며 의도가 된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닌 것이 문제다.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대중에게 공개', 즉 PR(Publish and Release)의 순간에 발생하는 것들이다. 자신의 생각과 식견, 감정을 필름과 원고지에 담아낸 후, 타인과 세상과 나누고 싶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 세상 밖으로 나의 시선과 생각을 표출하는 과정과 순간은 자칫 간과되기 쉽다. 인화, 출판, 출력, 포스팅, 업데이트, 에디팅, 그리고 복사와 프린트 아웃.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끔 사달이 나기 쉽다. 바로 '핀트'라는 것이 문제 삼아지곤 한다.



'핀트가 빗나갔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할 때 핵심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본질에서 멀어질 경우 흔히 핀트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 사진을 찍을 때 노리는 피사체에 핀트를 맞춘다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매우 어렵다. 특히 피사체가 다중적이거나 촬영자의 의도가 다채로울 때는 더욱 그러하다.


다시 말하자면, "어디에 핀트를 맞출 것인가"라는 것은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과 직접 결부된다. 예를 들어 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한 사람의 얼굴에만 핀트를 맞추고 다른 사람들은 포커스가 흐려지고 있는 사진이 있다. 작가가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려고 생각한 것은 그 한 사람이다.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이 모두 받는 느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핀트를 맞춘다는 것은 하나하나 포커스와 아웃 포커스, 심도를 아우르는 사진 전체의 '주제 의식'이 된다. 그러나. 이 '핀트'는 촬영 시에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핀트'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본 적이 있을까?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핀트'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니까. 영어의 Out of Focus, Out Focusing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다. 핀트는 엉뚱하게도 영어가 아닌 네덜란드어 brandpunt (브란드퓐트)가 어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낙인(brand)의 고정핀(punt)이라는 의미다. brandpunt에서 뒤에 있는  punt 만 발음했는데 이것이 삔토 -> 핀토 -> 핀트로 사용되는 것이다.


핀트가 나간 것

핀트가 나갔다는 것은 인쇄 핀의 '정렬'이 잘 못 된 일을 이르기도 한다. 3~7도 옵셋 인쇄를 하다 보면 간혹 아귀가 맞지 않는 경우가 나오곤 했었다. 디지털 출력도 레이저 핀이나 잉크 셋이 틀어지면 생기는 오류가 된다. 핀트는 사진의 촬영 시 포커스와 노출의 문제로 나갈 수도 있고, 구도와 주제 자체가 NG일 수도 있지만, 인화나 인쇄의 과정, 즉 '대중 공개'의 과정에서도 틀어질 수 있다.


사진의 경우 왜 특히 핀트라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시되는 것일까? 사진의 묘사의 리얼리티란 것이 렌즈라고 하는 물리적인 수단을 개입시켜 결부된 화상은 필름 위에 실물과 거의 같은 조형을 이루게 된다. 빛의 마술이 나타난 것이다. 형태나 질감, 또는 입체감까지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재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핀트'의 구현은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다.


핀트는 사진이라고 하는 시각언어를 잘 다루는 위에서 중요한 문법 요소의 하나가 된다. 그와 함께 중요한 문법인 구성, 구도나 카메라 포지션, 빛의 효과, 셔터찬스 등과 어울려 다소 다중적인 의미의 출력물을 낸다. 글쓰기, 문학에서 핀트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콘텍스트, 행간, 함의와 유사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 콘텍스트(context)라는 것을 한국어로 대체하고자 한다면 어떤 단어가 좋을까. 바로 맥락(脈絡)이다.



얼룩소는 저널리즘이었을까?


https://alook.so/posts/Djt3eox

그러므로 저널리즘은 맥락을 생산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정치 저널리즘이 현실정치, 사회구조, 역사를 한데 꿰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정치 저널리즘의 모범이라 생각하는 글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얼룩소 에디터 <얼룩소가 하려는 일> 중-


사진 이야기로 아주 긴 라포(rapport)를 늘어놓았다.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 지금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파산한 어느 글쓰기 플랫폼 에디터의 '플랫폼의 방향성'과 같은 선언문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당시 기분이 별로였다. 회사의 공식 입장이라면 개인이 아닌 계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고, 에디터 개인의 입장이라면 '맥락'상 뜬금없는 글에 답글로 숨어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정제되지 않은 개인의 선언은 대문에 걸렸다. 뭐 익숙한 행태였다.


고백하건대, 직업들에 대한 편견이 다소 많이 있다. 사회생활 25년의 편항적 인식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기자'들, '언론인'들을, 돌려 말하자면, 그 직업군 자체로 존경하기 어렵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존중하지만 존경하지 않는다. 이유는 백만 가지라도 댈 수 있지만, 한 마디로 근거 미약한 '식자(識者)의 자의식'이라 해 두고 싶다. 스스로 '인텔리전트 피플'이라 생각하는 집단의식이 거북하다. 솔직한 말로는 재수 없다. 더 존경할 수 없는 지점은 효율과 효능이 무시된 자신들만의 세상이 전부라 생각하는 무모한 용기다.


글쓰기 플랫폼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저널리즘'이라는 선언을 듣고 뜨악했다. '저널리즘이라고?' 하는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과연 에디터들이 생각하는 저널리즘이 무엇일까? 색다른 시각? 정보의 편집? 사실과 진실 사이의 거리 좁힘? 아니면, 습관적 단문의 인텔리 노릇?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속단도 금물이니까. 그리고 이곳의 에디터들은 친절한 설명은 업무에 포함되지 않은 듯하니까.

바흐친

기자 출신 에디터는 콘텍스트, 맥락을 이야기하며 '저널리즘'의 구현을 이야기한다. 콘텍스트와 맥락을 어찌 이해하는지도 '종속변수'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맥락은 혈과 혈의 상관관계, 인과관계의 점 연결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와 텍스트의 상호 간의 관계와 조응을 촉진할 이정표다. 이런 것을 문학 비평가 미하일 바흐찐은 '상호 텍스트'라고 말했다. 각기 존재하는 텍스트가 하나의 코드 토닉처럼 화음과 조응을 이루는 '화성 음악'과 같은 조율을 콘텍스트라고 말이다.


그 플랫폼 초창기에 데이터 저널리즘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며 다소 긴 콘텐츠를 올린 적이 있다.

보통 저널리즘은 일반인에게 "언론"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의미의 확장이 있어도, 결국 대중에게 공개하는 매체는 언론이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이 스스로의 도태적 삽질로 더 이상 "진실 추구의 최후 보루"가 아닌 것이 들통 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매우 비약하여 말하자면, 언론이 궁여지책으로 내 건 탈출구가 "데이터 저널리즘"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말의 뜻은 넓고 좁은 갖가지 의미가 있어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좁게는 정기적인 출판물을 통하여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 구체적으로는 신문과 잡지에 의한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고 합니다. 보다 넓게는 모든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비정기적인 것, 출판물 이외의 비 인쇄물에 의한 것, 내용적으로는 단순히 오락·지식 등을 제공·전달하는 경우도 포함해서 사용된다고 합니다. 흔히 '출판 저널리즘', '라디오·방송 저널리즘', '영화 저널리즘' 등의 말이 이에 해당되지요.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정책"과 "입안" 그리고 "공약"도 넓은 의미의 저널리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중-
-본문 중-



질문이 없으면, 답변도 없다


저널리즘의 어원이 라틴어의 'diurna(나날의 간행물)'에서 유래되었다. 직관적 해석으로 '날마다의 이야기'가 저널리즘이다. 바로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에도 이어 질 듯 하지만 지속되어야 하는 우리 범인(凡人), 아주 작은 시민들의 일상다반사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이야기의 '전문가'는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범인'들이 아닐까?

맥락

팩트를 받아들이는 입장은 '종속변수'가 되고, 본질을 헤아리는 '맥락'의 문제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맥락을 짚어 가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은 '핀트'를 맞추는 일이 될 테니까. '저널리즘'이라는 단어에 꽂히지 말고 그 맥락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그러나, 팩트와 현상의 맥락은 생성하거나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예시로 든 마르크스의 저널리즘은 '정-반-합'의 변증적 논거의 집대성이라 생각한다.


얼룩소의 시작을 존중했다. 특히 존경하지 않는 직업군의 분들이 모험적인 도전을 하는 것을 존중했다. 하지만, 기존의 미디어, 저널리즘의 습성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수많은 범인들이 참여하는 가치 있는 작은 이야기들은 묻혀 버리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애초에 생각한 구도와 구상에서 벗어나, 핀트가 어긋나 버린, 주제 의식이 공유되지 않는 결론이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존 미디어의 고질적인 유전병이 앞서 언급한 '식자의 자의식', 쉽게 이야기하면 잘난 체와 배운 척의 은근한 깔보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얼룩소의 '오리지널 시리즈'가 인기가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 특성은 '소통'이 없다는 것이다. 그 소통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음표'가 없다는 것이다. 물어야 답이 나오거나 반문이 이어지는 법이니까. 오리지널 콘텐츠는 '답정너'로 느껴질 뿐이었다. 물음표는 없고 온통 마침표에 큰 따옴표가 써져 있다고 할까.



'식자의 자의식'이 아닌 '범인의 호기심'이 되길


쌍방의 소통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필자는~"으로 시작하는 프로필의 위용이 아니다. 아주 작은 소소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묻거나, 그들에게서 물음을 받아 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얼룩소에는 물을 곳도, 묻는 운영 주체도 없었다. 마침표와 따옴표뿐이었다. 이사  때나 쓰는 '신문 조가리' 되어 버릴 기존 미디어들과 다름없어 보였다.



'질문'이 없는데, '답'이 있을리가

개인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여러 유형의 글쓰기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질 때가 있다. 듬성 듬성한 문장이라도 친절한 설명을 해 주는 아저씨가 될 것인가, 남들보다 '문, 사, 철'을 많이 읽었으니 각주는 알아서 찾아보라는 선생님이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이 둘 중 무엇이 더 나은가에 대한 논쟁은 귀에 걸어도 귀걸이고 코에 걸어도 귀걸이라는 주장에서 맴돌 뿐이다. 그래서 핀트와 포커스는 중요하다. 내용의 쉽고 어려움, 문장의 깊고 얕음을 떠나 맥락을 형성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글쓰기는 생각을 엮어 행간에 맥락을 심는 일이 아닐까.


가장 중요한 선행적 노력은 읽는 것이다. 읽기가 부재한 쓰기는 그저 죽비가 무서워 생각하는 체하는 아이들의 템플스테이와 같을 뿐이다. 읽고 난 후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남들에게 독서 목록을 내어 보기 전에 자신에게 설득하는 맥락을 만들어 본다면, 그것이 좋은 서평, 또는 독후감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힘들다면 나의 책장은 잠시 '나만 보기'로 설정하면 맘 편히 이 가을에 독서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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