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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Sep 29. 2024

출판 시장에도 스며든 '세로 본능'

‘세로 본능’은 자존감의 생존 본능

https://nzine.kpipa.or.kr/sub/hotcool.php?ptype=view&idx=695

2023년 7월, 출판산업진흥문화원 웹진 <출판N>에 기고한 칼럼을 공유합니다. 긴 글입니다. 긴 글에 긴 시간 동안 제법 깊은 생각을 담았습니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낡은 말이 되어 버렸다. 어느 시절인지 애써 가늠하지 않아도 TV 광고에서 “돼지털?”이라고 되묻던 할머니의 외침은 늙수그레한 세대나 기억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디지털이 사람들의 일상에 많은 변화와 충격을 가져다준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그 디지털이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하게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는 것도 놀라울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세대를 막론하고 이 디지털 세상을 마주하는 일은 생존의 필요조건이 된 지 오래지만, 아직 그 자체로 적응하기 어려움을 지나 두려운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런 것에서 발현되는 사회현상을 흔히 ‘디지털 격차’라고 이야기한다. 차이도 다름도 아닌 격차라니. 제법 무서운 말 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주류에서 멀어져 가는 나이로 익어 가면 그 무서움이 현실이 되고 만다.


이런 사회현상인 디지털로 인한 격차 발생이 여러 사안에서 목격되지만, 가장 흔하면서도 유의미한 현상이 바로 ‘세로 본능’이 아닐까 싶다. 세로 본능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모바일 퍼스트’의 세상이 되면서 모바일의 ‘폼팩터(화면의 크기, 비율, 생김새 등을 이르는 말)’에 모든 주요 정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이해가 작용하였다. 지금 당장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어 보 면 아마도 99%가 가로가 좁고 세로가 긴 형태의 액정이 마주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모바일 폼팩터가 모든 정보의 프레젠테이션 기준이 되면서 ‘화면’이라고 칭하는 정보의 출력 바탕은 모두 위아래로 긴 세로 본능이 작용하게 되었다. TV와 영화 스크린에 익숙한 ‘가로의 시대’에서 모바일 위주의 ‘세로의 시대’를 맞이한 지 오래다.


그림 1 삼성전자 ‘가로본능2’ [사진 출처=삼성전자 글로벌 뉴스]


정보의 습득을 위한 인간의 인지 활동은 눈의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눈으로 사물이나 정보의 단서를 파악하고 뇌로 전달하여 각종 연상과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사람의 눈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더라도 가로로 길게 찢어진 형태를 띤다. 이런 태생적이고 생리적인 탐구의 결과로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 도서나 미디어, 그리고 영상물들은 모두 가로가 긴 소위 ‘와이드 팬’의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문자를 식자하는 방법이 가로로 이루어지는 어족(영어나 아 랍어)과 세로로 써 내려가는 어족(한자문화권)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결국 정보의 습득은 좌에서 우로, 혹은 우에서 좌로 움직이는 안구의 운동에 의지한다.


이런 이유에서 ‘프레젠테이션 레이어’라고 일컫는 각종 출력물은 가로가 대세였다. 각종 모니터와 수신기, 수상기, 사진 등 미디어는 물론 간판이나 광고물로 가로로 만드는 것이 상식인 시대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지속되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의 총아인 ‘모바일 퍼스트’ 시대가 되면서 가로의 대세는 세로 본능에 점차 자리를 내어 주었다.



세로 본능은 그저 문화적 유행은 아니다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배경 좋은 지점에서 사진을 찍는 광경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달라진 점을 굳이 찾자면, 카메라보다 스마트폰이 대세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 사진을 찍는 셀카가 많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전보다 '실례합니다'가 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먼 배경을 사진에 담거나, 일행이 다수가 되면 누군가의 손을 빌리기 마련이다. 길을 가다가, 학생들이 다가와서 사진 한 장(?)만 부탁하고 스마트폰 터치 포인트를 알려 준다. 나름 사진을 좀 찍어 보았다는 자부심으로 구도를 이리저리 잡아 '하나~, 두~울'을 외치는데, "잠깐만요. 아저씨" 하며 한 친구가 시급한 듯 만류한다. 약간 찌푸린 미간으로 요구사항이 쑥 하고 들어 온다.

"아저씨, 세로로 찍으셔야지요."


손에 들린 스마트폰은 가로로 길게 잘 누워 있는데, 구도도 황금비율로 높고, 노출에 ISO까지 다 맞추어 주었는데, 문제가 '가로'라니 좀 당황스러웠던 그날이 떠오른다.


그림 2 : 세로 본능 [사진 출처=pixels.com 무료이미지]


기술 중심 기업이라고 하는 네이버, 카카오, 삼성전자 등은 일제히 ‘세로 영상’에 그야말로 꽂혔다. 스마트폰은 손에 쥔 채로 그대로 생활하는 MZ세대의 콘텐츠 소비방식이 주요 마케팅 요소로 확산하면서다. 세로가 가로를 넘어서 ‘뉴노멀’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 일지도 모른 다. 그 ‘오래’라는 기준이 무척 짧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불과 몇 해 전이다. 기껏해야 10년 정도 지난 시절에 핸드폰의 '모바일 폼팩터-핸드폰 화면의 크기, 비율, 모양, 방향 등'은 다양성의 극치를 이룬 적이 있었다. 작은 디짓 액정에서 화소가 향상되고 영상과 이미지가 지원되면서 모바일 기기 개발자들이 고민이 시작되었다. 바로 DMB 같은 방송 수신 기능을 탑재하면서 가로로 누워있는 화면비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전화기는 송신과 수신기를 이어주는 손잡이가 있는 형태로 태생부터 길죽이인 데, 눕혀서 보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필요한지가 한때 모바일 기술의 핫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출시된 휴대전화가 ‘가로 본능’이었다.


그림 3 ‘가로 본능’ 모바일폰 [사진 출처 = 폰아레나]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2020년까지 '가로본능' 모바일 기기가 연구 개발, 출시까지 되었다. 이 마지막 시도가 시장에서 스스로 용퇴한 LG전자의 유작 같은 'LG Wing'이었으니 불과 2년 남짓한 이야기다. 이것이 트렌드와 사용자 이용 양태의 급변을 견지한 예고편이었는지는 나중에 꿰맞추어진다. '가로 본능'의 퇴출과 LG전자의 퇴장이 마치 운명같이 느껴지는 점이다. 이처럼 ‘세로 본능’은 그저 새로운 세대의 소비 양태나 생활 특성에 그치지 않고 기술 산업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현재 기술 시장을 선도하는 네이버나 카카오가 '세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MZ세대의 UX, 즉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을 바로 상품 개발에 투여하는 최근 '애자일' 경영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세로 시청'이 모바일 세상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 전반에 주류로 떠오르는 것은 대세라는 발 빠른 대응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영상이 콘텐츠의 주류로 삼은 모바일 플랫폼의 영향을 이해하고 반영한 결과다.


미국 모바일 분석 스타트업 ‘사이언시아모바일’은 보고서에서 스마트폰 사용자의 82.5%가 동영상 사이트에서 스마트폰을 세로로 쥐고 사용한다고 이야기한다. 가로 영상을 볼 때도 스마트폰을 돌리지 않고 작은 화면으로 시청하는 비중이 높다는 결과를 곁들인다. MZ세대가 유튜브·인스타그램, 그리고 틱톡 등에서 영상과 댓글을 함께 감상하는 문화가 퍼진 까닭이다. 광고도 웹툰도 블로그도 세로가 대세다. 시력이 좋아서인지 귀차니즘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이미 생활의 양태로 자리 잡았다. 현대 기술 기업들이 사용자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을 개발하고 진화시키는 일은 기업의 필수적인 생존 요소가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세로 본능은 그저 새로운 세대의 특이한 생활 양상을 넘어 산업과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출판 시장에도 스며든 ‘세로 본능’


“이달 출간된 소설가 구병모의 신간 ‘파쇄’(위즈덤하우스)는 초콜릿 바처럼 폭이 좁고 기다란 형태다. 가로 109mm, 세로 187mm로 세로 길이가 가로의 두 배가량인 스마트폰 비율과 비슷하다. 성인 남성이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아담한 크기. 가로가 짧다 보니 한 줄에 들어가 는 글자 수는 20자가 채 되지 않는다. 부지런히 다음 줄로 눈길을 옮겨가야 하는 이 책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이 출판사의 ‘주력 상품’이다. 이곳은 이 같은 판형을 시리즈로 만들어 앞으로 50권 이상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 조선일보 윤상진 기자 <몸집은 작고 키는 쭉~ ‘세로 본능’... 요즘 책들, 스마트폰을 닮아 가네> 2023. 3. 30 기사 인용 -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3/30/JHKOZOJCRRBO5CYS5CAA7GI MXQ

그림 4-1 신간 ‘파쇄’는스마트폰(아이폰14 pro 모델·71.5×147.5mm)처럼 가로보다 세로가 훨씬 길다. (사진출처=조선일보 윤상진 기자)


출판 시장에도 세로로 길쭉한 스마트폰 화면 폼팩터를 반영한 ‘세로 본능’이 파고들고 있다. 책 판형(版型)도 스마트폰의 폼팩터를 닮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용한 기사에 따르면 다양 한 ‘세로 본능 출판 기획’이 쏟아지고 있다. 조예은 작의 소설 <쇼트 시리즈 (출판: 안전 가옥)>의 경우는 더 극단적인 세로 본능을 선보였다. 가로 100mm, 세로 182mm로 스마트폰의 폼 팩터에 가까워졌다. 출판사 ‘현대문학’이 내놓는 ‘핀 시리즈’는 가로·세로 길이가 110x190mm로 스마트폰과 유사한 모양이 되었다. 이 외에도 민음사(쏜살문고), 유유출판(땅콩문고), 자음과 모음(트리플) 등의 출판사에선 길쭉한 책들을 시리즈와 개별 단행본을 시장에 내놓고 있다.


그림 4-2 A4 용지 크기와 비교한 안전가옥의 “쇼트 시리즈”(100×182㎜)와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110×190㎜)


예전에도 ‘문고판(106x148mm)’ 같은 작은 책은 있었다. 그리고 더 축소하여 ‘포켓 사이즈’도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몸집이 작은데 날씬한 책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유행을 그저 가독성의 효율의 문제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정보 습득의 최적화된 방법이 세로로 길쭉한 형태의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증명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출판 시장의 ‘시장 논리’에서 출발한 궁여지책으로 생각되는 지점이 많다. 책이라는 것은 지난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주는 지적 유산과도 같은 것인데, 최근 MZ 세대의 경우 넘치는 정보와 더불어 각박한 경쟁 상황에서 책을 진득하게 들고 읽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된 것이 사실이다. ‘문해력 논쟁’ 같은 소모적인 세대 갈등적 담론을 차치하고서라도 최근 세대가 책시장의 잠재 고객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활 습관과 문화적 양태를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소비자 요구(Customer Needs)의 반영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보통 책 한 권이 나오려면 200,000자 즉 200자 원고지 1,000매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 절반인 100,000자 내외의 책이 기획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오래 읽는 힘’ 이 떨어진 세대들에게 맞춤을 주고, 웹소설과 웹진, 웹툰에 길든 독자들의 사용자 경험을 그대로 가져와 출판에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즉 책의 총량은 줄어들지만, 책이라는 특유의 물질적 성향은 유지하는 고육지책의 고민이 보이는 지점이다. 한때는 ‘벽돌책’ 같은 두껍고 정형적인 판형의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네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부피의 총량 자체가 기피의 이유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런 시점에서 출판계도 시장의 논리에 맞추어 소비자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행이 지속될지는 미지수에 가깝다.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20년 전에 컴퓨팅 기술이 발달하면서 각종 ‘디스크’와 ‘메모리’라는 저장매체가 발달하면서 “이제 곧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전망한 것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첨단의 기술과 문화적 변화가 많은 미디어 세계에 변화를 유도하게 되었지만, ‘종이책’을 ‘전자책’이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보관 수명부터 보편적 정보 접근성에 있어서 아직 종이책은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출판 시장에서 ‘세로 본능’은 한 철 유행하는 패션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정보 습득의 최적화’의 유용성이 있다.


‘세로 본능’은 정보 습득 방법의 최적화는 아닐 수도

세로 본능이 단지 '사용자의 편의'라는 기능적 편의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편적이다. 되려 기술적 한계에 따른 궁여지책이 소비자들을 길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정형화된 모바일 기기에 맞춘 프레젠테이션 화면의 비율을 고려해서 폼펙터를 개발하는데 가장 경제적이고 실효적이기에 사용자의 경험을 기술이라는 관성이 길들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세로 본능은 정보 습득의 최적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 중 편의와 효능 면에서는 가로 본능이 세로 본능을 현저히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말한 인간 눈의 모양이 새로 보다 가로의 가동 범위와 유연성이 월등하기 때문이고, 이에 따른 정보처리, 미디어 역사에서 이미 숱한 실험과 변용이 진화되어 왔다.


지금부터 28년 전 정보와 미디어 세계에서는 큰 변화가 시작된 바가 있다. 바로 신문의 '가로 쓰기'가 정착이다. 이전에는 한자 문화권의 영향으로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써내려 가는 '우종서(右縱書)'가 출판 미디어 활자 쓰기의 기본이었다. 그러다가 컴퓨터 조판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한 신문산업과 기타 사회의 합의로 좌에서 우로 옆으로 쓰는 '좌횡서(橫書左)' 로의 전환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개인의 의견으론 이것이 한국식 '디지털 혁명'의 시초라 고 생각한다.


그림 5 가로쓰기 시대의 시작 [사진 출처=조선일보, 증앙일보]


한글 전용과 가로 쓰기를 주장한 주시경과 제자 최현배의 노력으로 광복 후부터 교과서, 1961년 이후부터 공문서 등에서 가로 쓰기 했다. 그래서 교과서나 공책 쓰기 등, 이미 교육의 현장과 실생활에서는 '가로 쓰기'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유독 출판계와 신문 미디어는 우종서의 세로 쓰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일종의 '권위'의 상징이 세로 쓰기와 음차 포기 없는 '한자 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판 조판 시스템을 갑자기 바꾸기엔 경제적 효능도 따져 봐야 했다. X세대들까지는 종종 오래된 참고서나 고전을 세로로 쓰인 우종서의 출판물을 경험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를 앞장 세워 단행본이나 신문은 세로 쓰기를 고집했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그 고집을 꺾고 완전히 가로 쓰기로 다 바뀌었다. 영화 자막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가로 쓰기로 전환되었다. 그 이전에는 세로 쓰기였기 때문에 이전 시대 영화가 재개봉되면 자막이 세로 쓰기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가로 쓰기'가 완전 정복을 하게 된 이유는 다름 이 아닌 '컴퓨터', 즉 '디지털 세상'이 코앞에 다가와 생활의 모든 습관을 바꾸라는 엄중한 종용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보 습득의 원류였던 책, 즉 출판도 그 변화에는 어쩔 수 없었다. 컴퓨터 사식 조판 시스템, 즉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의 등장으로 혁신이 일어났다. 당시 조판 시스템의 독점적 위치에 있었던 미국의 IBM사의 CTS 시스템은 가로 쓰기만 가능했고, 이를 세로 쓰기로 변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기술, 그리고 비용이 필요한데, 한국은 아직 그 만한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최고의 경제 호황기에 내수와 Made in Japan에 경도된 사회여서 세로 조판 시스템을 자체 개발하기도 했다. 이 지점이 한국과 일본의 '디지털 격차'의 추격과 역전의 신호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구한말과 일본 개화기의 상황의 정반대가 일어났다는 평가와 함께 말이다.


물론 컴퓨팅 시스템을 미국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부작용도 있었다. 한국어의 자연어 처리가 늦어져서 영어가 디지털 세상에 깊게 침투되었다. 그리고 본연의 독자적인 기술을 구축할 겨를도 없이 기술이 종속된 경제 구조가 심화하였다. 이는 여전히 산업 경제의 숙제이지만, 가로 쓰기의 도입은 확연한 생활 편익을 사회에 주었다. 신문사에서는 같은 글자를 적은 지면에 할당할 수 있게 되었고, 눈의 방향과 맞아 가독이 높아져 정보 습득의 시간 대비 성능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대세가 된 '가로 형식'의 콘텐츠, 디지털 콘텐츠를 바로바로 흡수하게 되었다. 아주 단편적인 예로 마이크로 소프트의 ‘파워포인트’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디지털’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이 글로벌 주류의 기준에 스며들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서 근간을 찾을 수 있다.



'세로 본능'은 '자존감'의

문화적 최면일 수도


세상의 흐름을 읽고 싶을 때는 서점에 가곤 한다. 베스트셀러와 신간들을 주욱 둘러보노라면 뒤처져 있던 ‘감’을 느낄 때가 있다. 21세기 특히 2020년 전후로 서점의 주류는 ‘자기 계발서’가 아닌가 싶다. 20세기말에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표제에 들어 있다가, 어느새 '웰빙 ', '힐링'이 주욱 늘어서더니, 요즘은 온통 '자존감'이라는 말이 펼쳐져 있다. '자존감'이라는 말은 X세대가 지나서 온 학창 시절에는 사용하지 않던 단어였다. '자존심'과 '자신감'을 대비하며 이야기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돌이켜 보건대 '자존감'은 일상에 없던 단어였다. 그냥 '자존심'의 다른 표현 정도라 여기게 되었다. Self-esteem이라는 표현으로 '스스로를 존중하는 감정'을 자존감이라고 하는 사전의 의미를 보고서야 차이를 인지하게 되었다. 존재의 어필을 자신에게(자존감) 하는지, 외부에(자신감) 하는지의 큰 차이가 있다.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인 윌 스토는 자신의 저서 <셀피(Selfie)>에서 자존감 열풍의 핵심을 ‘이상적인 자아에 대한 높은 기대감’이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스토는 미국, 영국, 캐나다 대학들의 4만 개가 넘는 데이터를 분석한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들어 주장한다. 1989년 보다 2016년의 사람들이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에 비정상적인 중요성’을 훨씬 많이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상적 자아를 추구하는 완벽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하고, 우리를 완벽주의자로 만드는 문화적 요인들을 근거로 자존감 열풍을 설명한다.


그림 6 윌 스토 <셀피>


MZ세대는 이상적 자아를 추구하라는 문화적 압박을 더 많이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SNS 접속을 넘어 ‘셀피’ 중독자의 이야기가 윌 스토의 책에서도 언급된다. 요즘 세대들은 계속해서 자기 얼굴 사진을 찍고,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 수십만 장의 셀카 저장용 클라우드 이용료를 내고, 새벽까지 사진을 보정하곤 한다. 평범한 사람들까지 유명 인사들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유명인과 비교하게 하면서 이상적 자아상을 추구하게 만든다. 또한 계속해서 SNS상에 나오는 모습들처럼 완벽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렇듯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중하는 경향으로 인해 사람들이 더 극단화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으로 빚어지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에서 SNS에 몸매를 보정한 사진을 올릴 때 ‘보정된 사진’ 임을 명시하도록 하는 법안이 지난 2022년 발의되며 화제를 모았다. ‘디지털상 변형된 신체 이미지(Digitally Altered Images Bill)’라고 명명된 이 법안은 영국 보수당 하원 의원 루크 에반스가 발의한 법안인데, 인플루언서들이 SNS에 올리는 완벽한 몸매 사진에 영향을 받는 젊은 세대들이 신체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을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비롯하였다.


자존감을 강조하는 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닐  있다. 허울만 그럴싸한 '신자유주의' 사회적 고통을 개인의 낮은 자존감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모든 차별적 요소가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라는 인식에 기인한다는 자각은 어렵다. 그저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한다면서 세대와 시대를 구분하여 혀를 끌끌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병폐를 특정 세대의 현상으로 가리는 것이  시대의 어른들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부정적인 것은, 사회적 고통  우리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집중시키는 경향을 수용하는 점이다. 산업재해 현장에서 '운행자' 잘못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들은 '자유' 강조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무언가 집단적인 유기체는 개인의 편이   없다는 인지에서 '스스로에 대한 책임' '완벽'이라는 강박으로, 그리고  강박은 '자존감'이라는 문화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구조적 문제를 자신의 존재가 원인이라 생각하게 되는 , 그래서 OECD 최고의 청년 자살률이 말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림 7 셀피는 자존감과 상관이 있다 [사진 출 처=stockvault.net)


솔직히 '세로 본능'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삐딱한 시선으로 MZ세대를 젊잖게 까 보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디지털 기기의 화면비의 변화가 플랫폼 기업과 하드웨어 제조사의 기술적 ' 한계'를 포장한 상술이고, 젊은 세대는 그 이유에 대한 감지도 없이 끌려가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SNS 중독처럼 보이고, 모든 사진을 그곳에 업로드하기 위해 찍는 문화에도 혀를 끌끌 차기만 했다. 그러나, 자료와 참고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다. 이 세상을 구축한 장본인, 지금의 '신자유주의' 같은 세계관을 방치한 방관자가 기성의 어른들이니까. 엉터리 구조를 만들어 놓고, 넘치는 물질과 재화의 총량만 보면서, 도와 달라는 그들의 목소리를 폄훼하며 무시했었다. 마지막 방법이 '자존감'을 키워 스스로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이 '세로 본능', 그리고 '생존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전 명작에서 자아에 대한 탐구를 마친 철학자나 작가가 내어놓은 답은 단순해 보인다. 자존감이든, 신경증이든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특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자아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일 뿐이다. 스스로 마음에 일어나는 극단적으로 완벽함과의 전쟁을 멈추고, 주변을 보아야 한다. 젊은 미래 세대들뿐만 아니라 이 ‘세로 본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책임 있는 노력도 필요하다. 우선 '이해'와 지금의 고통은 너희들 탓이 아니라는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시간이다. 꼭 읽어야 하는 책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읽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기란 참 어렵다. 무언가 읽기 위해서는 기술 자본의 욕심에 길들이는 모습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서의 탐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세로 본능 시대에서 책 읽기는 참 중요하다. 다음에 시간이 주어진다면 여전히 ‘책’이 필요한 이유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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