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디즈니플러스에서 <조명가게>를 스트리밍 하며 웹툰 작가 강풀에 대한 애정을 <무빙>에 이어 드러냈다. <무빙 2>도 곧 스트리밍 계획되어 있다니 강풀 만화의 오랜 팬으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디즈니는 '새삼' 왜 강풀의 만화 작품에 주목하는 것일까?'새삼'이라는 표현에는 여러 의미와 감정이 중의적으로 작동한다. 강풀의 작품은 여러 번, 아주 많이 영화,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었다. 그리고 그의 세계관이 요즘 만화, 웹툰, 웹소설의 그것과 거리가 한참이다. 회귀물도 이 세계 저세계 따지는 이야기도 아니고 얼토당토 하지 않은 로맨스 퓨전 역사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담백한 척 속마음만 뱉어 버리는 로맨스물도 아니다. 철 지난 말로 '구식'이다.
디즈니 플러스 <조명가게>, 강풀 웹툰 <조명가게>
강풀의 만화 작품은 '동화적 주제'가 뼈대를 이루고 '만화적 상상'이 살을 만든다. 그 동화, 만화라는 살 위에 역사, 종교, 과학, 사회와 철학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입혀 감동과 여운을 주는 작품이 된다. 이 감동과 여운이라는 게 엄청나게 거창하고 복잡한 것이 아닌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것이 디즈니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의 교훈은 여섯일곱 살도 금방 깨달을 뻔한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 형식의 이야기 파급력은 생각보다 강하다. 이리저리 꼬아 만든 이야기의 장치는 자칫 그 멋에 빠져 정작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맥락을 잃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풀의 웹툰은 매우 디즈니적이다. 직관적이며 순진무구하다. 선과 악이 쉽게 구분 지어지고, 곤란과 역경이 금세 규명되고, 그것의 해결과 극복을 위한 솔루션도 단순 명확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수없이 만들어진 이유일지도 모른다.
장르의 혼종으로 엮는 동화적 세계관
강풀의 세계관은 일종의 혼종이다. 폼나게 말하자면 하이브리드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잡종의 장르다. 단 <파묘>나 <곡성>같이 한 작품 내에서의 장르적 혼종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일종의 진화이자 성장이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처음 순정물(<순정만화>, <바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통증>, <마녀>)로 시작한 그의 작품 세계에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등장(<아파트><타이밍><이웃사람><어게인>)하더니, 좀비(<당신의 모든 순간>)와 사후세계(<조명가게>), 초인적 히어로와 타임슬립 등의 SF 액션장르(<무빙>, <브리지>, <히든>)가 연이어진다. 이는 큰 세계관의 설계가 있었다기보다 한편 한편 연재 성공으로 커리어와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어느 웹툰 작가의 현실적인 대처의 결과로 해석하는 편이 수월하다 싶다.
강풀 작품들 (출처=S&T)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 장르와 세계관 구성을 겸양의 표현으로 말한 것은 그저 겸손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스스로의 강박적 자격지심의 반향일 수도 있다. 만화라는 하위문화 장르에 스스로 작화와 문학적 구성을 전문적으로 학업한 바도 없고 사회적 계급에서도 저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강풀의 작품 세계는 그리 넓지 않은 시공간적 배경을 사랑과 인생이라는 커다란 우주적 담론으로 극복해 낸다. 강풀의 작품의 공간은 그가 자라고 살고 있는 서울 강동구가 대부분, 아니 전부다. 천호동, 암사동, 길동, 성내동이라는 서울 확장기의 주요 주거지역에서 둔촌동, 명일동, 상일동, 고덕동에 이르는 5 공화국 마지막 서울 개발지역까지 그의 작품에는 이 강동구가 가득 담겨있다.
강동구는 88 서울 올림픽 이전에는 송파구를 아우르는 영등포의 동쪽 대칭점이었다. 1970년대 이전의 영등포의 위용은 '영동(영등포 동쪽, 지금의 강남 4구를 이른다)'이라는 말이 설명을 다한 듯 성장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최대 부심이었다. 그 동쪽 대칭에는 천가구나 살고 있다는 뜻의 '천호'가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로 편입되어 또 다른 부심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올림픽 특수로 잠실을 중심으로 송파지구가 급부상하면서 상대적으로 개발 후진, 부동산 특수 소외 지역으로 급변했다. 이런 지역적 특수성에서 강풀은 대한민국 사회의 골목길을 조망하며 이야기를 구상했을지도 모른다.
배경뿐만 아니라 강풀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성격도 그의 친구나 지인 등을 차용하곤 한다. 가장 그럴듯한 배경과 인물은 핍진성을 강화하여 그의 작품이 확장하는 디스토피아적 공상을 상쇄하는 효과를 준다.어쩌면 어설픈 구성과 세계관 빌드업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그 직관적이고 순진한 주제의식 도출의 장치들은 또 다른 탈출구를 관객이나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흑마술같이 처연하고 비루한 현실은 동화같이 낭만의 히어로가 나타가 구출해 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강풀의 작품은 슬프고 우울할지언정 희망 가득하다. 그 정수를 <조명가게>라는 과도기적 작품이 잘 보여 주고 있다.
'여기'와 '이곳' 사이의 어딘가
<조명가게>는 2011년에 연재되어 일 억 뷰 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얻은 강풀의 웹툰이 원작이다. 디즈니에서 스트리밍 하는 드라마도 강풀이 각본을 직접 썼고 제작에도 참여하여 원작의 이야기에서 큰 벗어남 없이 구성되었다. 배우로도 좋은 연기를 보여준 김희원의 첫 연출작인데, 2018년 배경이나 아역배우들의 모습을 볼 때 적어도 5년 전에 찍어 놓은 작품을 지금 내어 놓은 모양이다.(나무위키 등에서는 2023년 연말부터 촬영했다 하지만 아마도 후반작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유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추측의 영역이겠지만, 영화 배급이나 드라마 편성이 여의치 않아 묵혀 두었다가 <무빙>의 성공과 그 이면의 OTT라는 새로운 콘텐츠 시장이 열리면서 꺼내 보지 않았나 싶다. 최근 OTT에 스트리밍 되는 작품들 중 이렇게 묵혀 놓은 것들이 제법 되는 것도 일종의 현상, 트렌드가 아닐까 싶다.
감독 김희원, 작가 강풀 (출처=스포츠 조선)
<조명가게>는 지금까지 강풀 작품 중 중간 시기(2011년)에 연재되었고, 그 주제와 장르구성도 그 중기의 세계관을 과도기적으로 이어주고 있다. 강풀 만화의 세계관은 장르의 진화와 융합에 따라 성장해 왔다. 그의 초기작들은 순정만화의 모습으로 우리의 작은 이웃들을 조명하며 세상에서 점점 잊히는 중요한 가치를 일깨웠다. 그 가치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이 사랑이라는 가치는 강풀 작품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가 되어 변주하고 혼용되어 후작들에 투영했다. 순정장르는 이내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뜬 것 마냥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물로 진화하였다. 강풀은 이 장르를 '미스터리 썰렁 심리물'이라 스스로 명령하였다. 이내 그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초능력의 세계, 초인 히어로물들을 쏟아 내었다. 이 또한 겸양과 눈치의 소산으로 그저 '액션만화'라 일컬었다.
그의 주된 장르인 미스터리 썰렁 심리물에서 액션만화의 장르로 연결하는 과도기적 작품이 <조명가게>다. 작품의 공간은 익숙한 우리 동네지만 실제 그곳은 여기와 다른 삶과 죽음의 경계다. 경계라는 것이 그저 치기 어린 국민학교시절 짝꿍과 그어 놓은 선 같은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실제 경계라는 것은 단정 지을 수도 규명될 수도 없는 생각보다 깊고 넓은 공간일지도 모른다. 현실 세계에서의 계급과 계층, 진영과 파벌, 그리고 민족과 종교가 그 '경계의 딜레마'위에 살고 있다. 그중 '죽음 너머의 세상' 이전의 못다 한 소명이 남은 자들이 머무는 중간계의 이야기를 미스터리 서스펜스로 그려내었다.
바람이 불어 오는 곳 (출처=<조명가게> 스틸컷)
실제의 공간은 병원의 중환자실이지만, 당사자가 경험하는 공간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미련과 염원의 발로가 된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도는 동네 골목길은 뫼비우스의 고리보다 더 기괴한 원점 회귀의 블랙홀이지만, 실제는 중환자실에 누워 이생과 저생사이를 가름질 하는 자를 위한 응원이다. 한참을 헤매던 이들은 조명가게에 들러 아리송한 문답 속에 '여기'와 '이곳'을 구분하려 애쓴다. 그 구분이 확신이 되는 순간 삶을 이어갈지 중단할지의 문제는 오롯이 자신의 '의지'의 문제가 된다.
"의식이 없는데 의지가 있을까요?"
중환자들 가족들에게 의료진들의 단골 멘트는 '이제 환자의 의지에 달렸다'라는 공감 먼 말이다. 의식이 없는데 의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생과 저생을 경험한 중환자실 간호사 권영지(박보영)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늘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딱 일 년 전, 중환자실을 경험했다. 멈추지 않는 내출혈에 크리스마스 휴일 집중관리를 위한 중환자실 입실이어서 그곳에서 가장 명료한 의식을 가진 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도를 낮추고 여기저기에서 기기들이 경고음을 뱉어 내는 공간은 여간 낯선 게 아니었다. 그때 이생과 저생의 중간이 있다면 이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대부분의 병상엔 의식이 없는 환자들로 가득했다. 과연 그들에게 의지라는 것이 발현될까 하는 남걱정이 앞서던 날들이었다. 일 년이 지나 아직 살아내는 날에 <조명가게>를 보면서, 그 '의지'가 머무는 우주를 아주 어설프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의지는 우주에 머물 나 자신이다
의지와 의식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고찰에 집중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 자신에게>로 불린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의 <명상록>의 구절들이 한 꼬집씩 들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순 없다.현자는 우주에는 법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들은 본성과 이성에 의해 할당되고 배정되는데, 이를 우주의 관점에서는 섭리라 하고 인간의 관점에서는 운명이라 일컬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의 의식은 운명이라는 인간 관점의 본성이라면 의지는 우주의 관점에서의 섭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영화, 드라마, 소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늘 한 가지 답을 낸다. 바로 여기, 지금 조응하는 '시대정신'이 있는 가에 대한 가늠이라고 답한다. 강풀의 세계관에서 현실은 비루하기 그지없다. 가난, 장애, 시련, 피박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이 주인공이 된다. 그들의 삶의 서사는 처절하고 가엽다. 그럼에도 현실의 상황에서 그 고난을 구원할 시스템이나 장치는 요원해 보인다. 그런 디스토피아적 암울한 현실에서 작가는 희망을 싹 틔우려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생과 사의 중간계를 그려 내고, 현실 세계에서 절대 조우할 수 없는 초인 히어로를 작품에 솔루션으로 등장시켰을 것이다. 그 허술한 현실성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동화적 낭만이라는 사랑을 끼어들게 해 준다. 강풀의 작품은 암울한 현실에 사랑이라는 희망을 꿋꿋이 던지는 우직한 기도이자 시대정신이다.
강풀이 '강풀 닷컴'이라는 자체 업로딩 웝툰 홈페이지를 운영할 때부터 그의 팬이었다. 만화로 한글을 깨친 만화가게 옆집 아이 출신답게 그의 신작 연재를 기쁜 마음으로 마주했었다. 잠시 정치활동을 할 때 강동구 행사와 유세 때마다 달덩이 같이 큰 얼굴의 거구인 강풀은 우리 진영의 고마운 서포터였다. 그런 그의 의지를 알기에 그의 작품이 <26년> 이후 정치적 함의로 해석하는 일은 이 시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동화 같은 비현실적 설정의 유명배우들이 가득 찬 흥행코드의 콘텐츠로 소비되는 경향을 지양하였으면 한다.
이 나라 통수권자가 스스로의 집권 강화를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탄핵되어도 뉘우침이 없는 시간이 지속이었다.와중에 드러나는 일들은 현실인지 공상인지 가늠하기 어렵고, 모든 것이 요상한 마술에 의지한 사악한 인간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근원에 치가 떨렸다. 세상은 종말이라는 디스토피아로 향하는지도 모르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며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침울하고 암담함의 연속이었다.
그림=이정헌 작가 (https://www.facebook.com/share/p/ktzCaXFroYdr5Bjn/?mibextid=qi2Omg)
답답한 날들 중 동화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농민 트랙터 행진을 응원지지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손에 든 것은 8년 전 까만 밤을 환히 밝힌 촛불도 아니고, 강경한 메시지 가득한 손팻말이나 정치 단체의 깃발도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응원봉과 자신의 입장 가득한 재기 발랄한 표식들, 그리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리지 않아 아쉬울 틈도 없이 이 젊은 세대의 등장은 마치 위기에 등장한 망토 걸친 슈퍼맨과 다름없다. 그렇게 디스토피아가 현실화된 이 시대에 동화적 낭만이 세상을 구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었다. 우리가 지금 강풀의 세계관을 다시 조명하며 정처 잃은 영혼의 쉼터가 되는 <조명가게>를 찾아보는 이유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