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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가 아닌, '잃어 버린 아들'의 비유

사순 묵상 13

by 박 스테파노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루카 복음 15.17,21-


사순 4주 주일의 복음은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이야기다. 루카 복음은 양, 돈, 아들의 세 가지 비유로 ‘잃어버린 것’과 ‘다시 찾은 것’에 대해 말한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잘 알려진 것들이다.


잘 알면서도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우선 자신의 몫을 탕진한 아들을 반겨 잔치까지 연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거슬린다. 그리고 꿋꿋이 집을 지킨 큰 아들에게 오히려 가르치듯 훈계하는 모습도 이해가 어렵다.


오늘의 복음은 24절 후반 ‘그래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말로 전후반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각 부분 끝에는 똑같은 아버지의 말씀이 나온다.


“이 자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여기서 ‘잃어버리다’라고 사용된 아폴류미(ὰπόλλυμι)는 루카 15장의 핵심 키워드가 된다. 이 동사는 다른 구절에서는 ‘죽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의미)


아들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은 아버지의 곁을 떠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들의 비참은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아폴류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된다. 아폴류미는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떠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멸망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잃어버렸다’고 번역할 때, 그 의미는 단순히 ‘모습이 없어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멸망을 향해 떨어져 추락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그래서 이 ‘잃어버린 아들의 귀환’은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 된다. 단지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멸망을 향해 추락하던 아들이 스스로 깨우쳐서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기적 같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소를 잡고 큰 잔치를 여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림: The Return of the Prodigal by Father/ 작가: Sieger Köder


25절부터 후반부가 시작된다.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질시하는 큰 아들이 등장한다. 형은 “아버지는 저런 아들을 위해 왜 소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가?”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형은 동생을 부를 때 ‘내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저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동생을 질시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했다고 생각했던 형은 돌아온 동생을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만약 큰 아들이 언제나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생각하며 살았다면 당연히 동생의 귀환도 함께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그럴 수 없었다. 형이 아버지의 설득을 따를지는 말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 맡겨질 뿐이다. 들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들리는 말씀처럼 말이다.


이 부분이 흔히 ‘탕자의 비유’라 일컬어지며 잘못 해석되는 지점이다. 교회나 서적에는 방탕한 자의 ‘회개’만을 강조하는 설교가 가득하다. 하지만 앞선 두 비유—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을 보면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양과 동전이 ‘회개’나 ‘회심’으로 주인의 손에 돌아왔을까? 아니었다. 온 마음으로 찾아 나선 주인이 찾아낸 것이다. 이렇듯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집에 남아 있는 큰 아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이야기이다.


그냥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 신의 축복과 천국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지 않는다. 그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각하고 공감하는 것, 질시와 미움에서 이해와 사랑으로 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회개’가 된다.


예전에 독실한 개신교 신자들에게 물었다. ‘교회에서만 선한 이중적인 사람과 교회에 다니는 것 자체가 사치인 가난하지만 선한 사람들 중에 누가 천국에 가는가?’라는 질문에 열에 아홉은 둘 다 못 간다고 말했다. 참 오만한 신념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집단에 있다고 해서 모두 선한 사람들이 될 수는 없다. 그 안에서의 깨우침은 늘 필요하다.


동생을 맞이하지 않으려는 형의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동생의 귀환을 형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이해하고 품는 것이 ‘회개’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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