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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영광, 낙화 삼킨 신록의 영광에 대하여

부활 묵상 04

by 박 스테파노

어떤 시절, 오월 오일은 골프장에서 맞곤 했었다. 그곳의 풍경은 계절의 이행을 눈 시리게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초봄, 필드는 여지없이 이분법적이었다. 공이 떨어지는 페어웨이의 중지는 아직 겨울의 누런빛을 머금고 있었고, 홀컵을 향해 공을 굴리는 그린의 벤트 그래스만이 홀로 짙은 초록을 뽐냈다. 생기와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선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오월 초입에 접어들면, 땅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겨우내 얼었던 뿌리들이 깨어나고, 누런 줄기 속에서 연두빛 물감이 번지기 시작한다. 오월 오일 즈음, 비로소 페어웨이 전체가 여린 연두로 물들고, 그린의 초록과 만나 마침내 온전한 '초록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런 죽음을 딛고 솟아난 연두의 기립.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영광이었다.


오월은 죽음이 생명으로 치환되는 시간. 이미지=Google Sora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은 <낙화>를 통해 소멸이 지니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봄의 절정이었던 꽃들은 오월이 당도하기 전에 여지없이 진다. 그 흐드러졌던 순간의 퇴장은 언뜻 소멸이자 상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떨어진 꽃잎들은 그저 허공으로 흩어지는 무(無)가 아니다. 그것들은 땅에 스며들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다음 계절의 신록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스스로 절정을 불사르고 기꺼이 스러지는 자기 산화, 그 덧없음 속에서 다음 단계를 위한 비옥함을 마련하는 과정. 오월의 눈부신 신록은 바로 그 사월 낙화의 아픈 자리가 밀어 올리는 생명이다. 지난한 기다림과 짧았던 절정의 폭발, 그리고 그 절정의 겸허한 퇴장이 합쳐져 비로소 가능한 영광이다.


그런데 이 오월은 한국인에게 있어 자연의 순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1980년 오월, 이 땅에는 또 다른 의미의 '낙화'가 있었다. 불의한 권력 앞에 맨몸으로 맞섰던 시민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사월의 꽃잎처럼 짧고 강렬하게 스러져갔다. 총칼에 흩어진 몸들, 길바닥을 적신 뜨거운 피. 그 순간의 오월은 '영광'이라는 단어로는 차마 형용할 수 없는 파열과 상흔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그 낙화는 결코 소멸로 끝나지 않았다. 오월 광주의 대지 위에 뿌려진 피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 처참했던 '낙화' 위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이름의 '신록'이 더디게, 그러나 기어코 돋아났다. '오월문학'은 바로 그 참혹했던 낙화의 순간과, 그 이후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신록의 시간을 기록하는 문학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남겨진 자들의 트라우마와 부채감을 통해 희생된 영혼들의 부재를 각인시킨다면, 김준태 시인의 '오월시'들은 비극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공동체의 연대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신록을 길어 올린다. 이 문학들은 '오월의 영광'이 승리자의 기념비가 아니라, 쓰러져간 이들의 고통스러운 숨결과 살아남은 자들의 아픈 기억으로 짜여 있음을 증언한다.


오월의 영광을 자기 산화와 그로 인한 생기 부여의 변증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과 윤리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월의 꽃이 다음 계절을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듯, 오월의 희생자들은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았다. 그들의 희생은 단순히 끝맺음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 가능성이 바로 오월의 신록이다. 그러나 이 신록은 그저 주어진 자연적 풍요가 아니다. 그것은 피 흘린 대가로 얻어진 윤리적 채무와 같다.


오월의 영광은 역사의 채무 위에 씌여진 무거운 왕관. 이미지=Google Sora


우리는 오월의 신록을 누리며 살아간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공기 속에서 숨 쉬고, 표현의 자유라는 햇살 아래 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월의 낙화, 오월의 희생 위에서 돋아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페어웨이의 연두빛 잔디가 겨우내 누런 죽음을 견딘 결과이듯,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또한 과거의 아픈 희생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오월의 영광은 축제가 아니라 책무다. 쓰러져간 이들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그들의 낙화가 일군 신록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윤리적 의무. 뜨거웠던 오월의 투쟁이 끝난 후, 우리는 그 희생 위에서 각자의 일상이라는 여름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 치열함이야말로, 낙화가 일군 신록의 진정한 영광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오월의 영광은 그러므로, 아름다운 초록의 배후에 숨겨진 누런 시간과 붉은 흔적의 고통스러운 서사다. 그것은 쉬이 가시지 않는 상흔이며, 동시에 그 상흔 위로 기어코 돋아나는 생명의 기세다. 오월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은, 당신이 누리는 이 시대의 신록은, 어떤 낙화 위에서 피어났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오월은 그 질문을, 눈부신 초록빛 침묵으로 던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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