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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목자 레오 14세, 모든 길 위의 교회를 위해

부활 묵상 06

by 박 스테파노

어제, 2025년 5월 8일, 바티칸의 은빛 제단 너머로 한 사람의 이름이 천천히 울려 퍼졌다. 미국 시카고의 바람마저 품은 듯한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그 울림은 깊었다.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 추기경—1955년 9월 14일 시카고 변두리에서 태어나 가난한 이들의 손을 놓지 않았던 사목자이자,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학자로 살아온 그가, 마침내 교황으로 선출되어 “레오 14세”라는 이름을 택했다. 북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첫 번째, 성 아우구스티노회 출신으로도 첫 번째라는 기록 위에, 그는 “교회는 길 위에 서야 한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레오’—사자는 어둠 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다. 숲의 문턱을 미끄러지듯 걸어 나올 때, 그 발걸음은 고요히 울려 퍼진다. 교황명으로서 ‘레오’는 곧 그 울림의 계승이다. 위태로운 시대의 바람 속에서도 교회가 흔들림 없이 걸어가기를 다짐하는 의지다.


첫 축복하시는 교황 레오 14세. 사진=평화방송


레오 교황명의 계승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신학적·역사적 궤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5세기 레오 1세가 “두 본성의 연합”을 천명하며 칼케돈 정의의 토대를 놓았듯, 이후 레오 3세는 교회와 제국의 관계를 재구성해 중세 정치신학의 토대를 다졌다. 르네상스기의 레오 10세는 예술과 인문주의를 후원하며 교회의 문화적 역할을 확장했지만, 동시에 면죄부 사태를 통해 개혁의 필요성을 드러냈다. 19세기 레오 13세는 산업사회의 격랑 속에서 가난한 노동자와 연대하며 “정당한 임금”과 “노동조합 결성권”을 천명, 교회 사회교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렇게 ‘레오’라는 이름은 시대마다 교회가 맞닥뜨린 과제 앞에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신학과 권위를 현실과 화해시켜 혁신을 이뤄낸 역사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먼 옛날, 5세기 로마의 폐허 위에 홀로 선 레오 1세. 훈족 아틸라의 무거운 발자국이 제국을 짓누를 때, 그는 칼 대신 말로 응수했다. “하늘의 권위가 땅의 검보다 높다”는 듯, 「토메」에 새긴 ‘두 본성의 연합’은 진리의 숲에 단단한 횃불 하나를 꽂았다. 그 횃불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론의 어두운 구석을 비춘다.


시간이 흘러 8세기, 북해를 넘은 레오 3세는 프랑크의 새 황제 카를 손수 쓴 성관(聖冠) 아래에 세웠다. 짓눌린 중세의 음울함 속에서 교회와 제국을 묶는 끈을 단단히 틀어 맸으니, 그 결속은 이후 천 년 가까이 유럽의 정치와 신앙 풍경을 수놓았다.


르네상스의 태양이 로마를 휘감을 때, 레오 10세의 이름 아래 메디치 궁정은 문화의 제전이 되었다. 천장 위에 펼쳐진 화가의 붓질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눈부신 자태였지만, 그 화려함 뒤편에는 면죄부의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침내 루터의 절규가 울려 퍼졌고, 교회는 스스로 내던진 씨앗으로 개혁과 분열의 소용돌이를 맞이했다.


그리고 19세기, 산업혁명의 굉음 속에서 레오 13세는 회칙 《사회적 사안에 관해》(Rerum Novarum)를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철로 위를 달리는 증기 기관차의 그늘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정당한 임금”을 요구했다.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를 천명하고, 자본과 노동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을 메우기 위해 “연대”와 “상호 협력”을 설파했다. 국가는 약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으며, 교회는 그 목소리를 들려주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글줄마다 인간의 존엄과 사회 정의, 그리고 사랑의 손길이 숨 쉬었다.


9일(한국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 새 교황 레오 14세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녀들이 환한 미소로 반기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제 레오 14세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는 이 모든 ‘레오’들의 발자취 위에 서 있다. 올리브나무 그늘처럼 온유하면서도 단호했던 그의 사목 여정은, 레오 13세가 뿌린 사회교리의 씨앗과 만나 새로운 결실을 예고한다. 길 위에 선 교회가 연대와 정의를 노래할 때, 그 목소리는 사자의 포효처럼 세상의 어두운 구석마저 환히 비출 것이다. 레오 14세의 첫 미사는 이미 그 약속을 읊조렸다. “교회는 길 위에 서야 한다.” 그 길 위에서, 그는 진리의 횃불을 더욱 높이 들 것이다.



참고. 페이스북 jong hee rhee님 글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마르티네스, 라틴계 미국인 교황


새 교황 레온 14세(León XIV), 본명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마르티네스(Robert Francis Prevost Martínez)는 현재 69세이며 미국 국적을 가진 라틴계 인물이다. 그는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계와 스페인계 부모를 두었고, 페루에서 40년을 보내며 주교로 봉직했다.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 덕분에 어느 진영에서도 반감을 사지 않았고, 매우 낮은 공개 활동을 유지했기 때문에(인터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주목을 덜 받았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3년에 갑작스럽게 전 세계 주교 인사를 담당하는 강력한 부서인 주교성(Dicasterio para los Obispos) 책임자로 임명했던 인물이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모든 대륙과 접촉해 왔다.


프레보스트는 사목 경험과 교회 행정 경험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자신이 소속된 아우구스티노회(Agustinos)의 총장직을 지낸 적도 있으며, 바티칸 관료 조직인 교황청(쿠리아)에도 익숙하다. 그는 '세계 최강국' 미국 출신의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불문율을 깼다. 그의 다양한 정체성과 조정자적 역할 때문일 수 있다. 그는 미국 주교들 사이에서, 이념적 분열과 양극화가 가장 심한 미국 교회 안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왔다. 그는 트럼프 시대 이후 미국으로부터 바티칸 재정에 대한 기부금을 되돌릴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새 교황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페루 국적도 가지고 있다! 그는 수십 년간 페루에서 하느님을 섬기며 라틴아메리카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전 세계 수백만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민이다. 그의 삶은 국경, 언어, 문화를 넘어선다. 오늘 그의 교황 선출은 고향을 떠난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하느님은 이주하는 이들과도 함께 걸어가신다.”


다음은 그가 왜 전 세계를 감동시키는지를 설명하는 10가지 이유이다:


1. 역사상 첫 페루 국적 교황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페루를 사랑하여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의 라틴아메리카와의 연결은 진실하고 깊다.


2. 인생의 대부분을 페루에서 보냈다.

그는 20년 이상을 선교지, 본당, 지역 공동체에서 봉사했으며 특히 가난한 지역에서 일했다. 그는 강요하러 간 것이 아니라 배우고 동행하기 위해 갔다.


3. 바티칸에 오기 전, 페루의 치끌라요(Chiclayo)에서 주교를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람들과 가까운 태도, 겸손함, 힘든 이들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4. 그는 아우구스티노회 소속이다.

아우구스티노회는 공동체, 내면의 진리 추구, 성찰을 중시하는 수도회다.


5. 자신의 수도회에서 전 세계적인 리더였다.

주교가 되기 전, 그는 아우구스티노회 전 세계 총장직을 맡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도 그를 알고 존경한다.


6.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언어의 사람이다.

그는 명령하기보다는 듣기를 선택해 왔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연민’이라고 말한다.


7. 잊혀진 민중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페루의 농촌, 원주민 공동체 등 정부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지역에서 일했다.


8. 보편적인 시야를 가졌지만, 라틴의 영혼을 품고 있다.

그는 로마에서 전 세계 주교를 평가했지만, 언제나 소박한 사람들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


9. 완벽한 스페인어 실력을 가졌고, 페루 억양으로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며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마음을 가깝게 한다.


10. 그는 ‘민중의 냄새’를 지닌 교황이다.

그는 권력이나 특권에서 온 것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먼지 나는 거리에서 온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선출은 글로벌 남반구(Sur Global)에 희망의 상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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