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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옴니버스, 부활의 평화를 싣고

부활 묵상 07

by 박 스테파노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게 하여라.”
-요한복음 14,27-


이 간결한 선언은 2천 년의 세월을 건너와, 2025년 서울의 낡은 마을버스 덜컹거리는 소리 속에서 역설적으로 더욱 또렷하게 울려 퍼진다. 쇠바퀴가 아스팔트 위를 굴러가는 둔탁한 리듬은 단순한 이동의 진동이 아니다. 그것은 위태로운 시대를 건너는 공동체의 숨결이자, 부활을 향한 간절한 염원과 닮은 고동이다.


부활 6주일 복음은 평화의 선포다. 이미지=Google Sora



세상의 평화, 십자가 너머의 평화


예수의 평화는 종종 안온한 위로의 언어로 축소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 멈춰 설 위기에 놓인 마을버스들의 절박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그 평화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강대국의 군사력 균형이나 핵 억지력 같은 냉혹한 논리가 만들어내는 ‘세상의 평화’는 언제나 불안한 전제 위에 세워진 허상에 가깝다. 그것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며,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간신히 유지되는 위태로운 정적일 뿐이다.


반면 예수가 약속한 평화는, 죽음을 딛고 일어선 부활의 기운처럼, 억압받는 이들의 낮은 신음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이다. 그것은 냉랭한 분노와 깊은 절망을 녹이는 따스한 손길이며,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는 연대의 몸짓에서 비롯된다. 그 평화의 실천은 굳이 먼 나라의 뉴스를 쫓지 않아도 된다.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의 멈춤이라는 일시적 현상의 판단이 아니라 완전한 복구를 의미한다. 바로 존엄의 완전한 복구 말이다.


서울의 뉴스는 연일 마을버스 업계의 위기를 보도한다. 적자 누적, 고령 운전기사의 이탈, 코로나19 이후의 승객 감소, 그리고 열악한 근로 여건으로 인한 젊은 세대의 외면. ‘모든 사람을 위한(Omnibus)’ 버스가 멈춰 선다는 것은 단순한 교통 시스템의 정지 이상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연대라는 낡은 심장이 멎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던진다.


모두를 위한 버스, 옴니버스. 이미지=Google Sora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은 고립되고, 그 고립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심화시킨다. 희망버스, 난방버스, 헌혈버스, 냉방버스처럼 나눔과 헌신의 상징이었던 버스들의 소멸은,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를 잇는 섬세한 연대의 그물이 찢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던졌던 그물은, 바로 이렇듯 소외된 이웃들의 텅 빈자리를 채우려는 부활의 손길이었을 것이다. 부활한 예수가 건넨 사랑의 복음이 낯선 사랑이라면 평화의 선포는 멈춤이 아닌 복구의 의지다.



옴니버스, ‘모두를 위한’ 평화의 기원


‘버스(Bus)’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옴니버스(Omnibus)’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사람을 위한’이라는 이 숭고한 이름처럼, 버스는 태생적으로 계층과 경계를 허물고 모두를 포용하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버스 노선은 축소되고, 배차 간격은 길어지며, 그 ‘모두’라는 약속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특히 복잡한 환승 체계 속에서 발생하는 적자 구조는, 버스가 시민의 발이 되어야 한다는 본질적 가치를 뒤흔든다. 한 시민이 지하철에서 마을버스로 환승할 경우, 마을버스 회사에 돌아오는 정산 금액은 고작 100원 수준이라는 보도는, 효율이라는 냉정한 논리 앞에서 ‘모두를 위한’ 가치가 얼마나 쉽게 희생되는지를 드러낸다. 그 결과, 운전기사의 고단한 노동은 보상받지 못하고, 재정 지원은 줄어들며, 미래 세대는 외면한 채 60대 이상의 노년층만이 낡은 운전석을 지키고 있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은평공영차고지 마을버스, 마을버스로 환승할 경우 실제 정산금은 평균 646원에 불과하다. 연합뉴스


이러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한 ‘리좀(Rhizome)’ 개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위계질서가 아닌 수평적 연결망을 의미하는 리좀처럼, 도시는 수많은 버스 노선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에만 건강한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다. 만약 이 연결망의 한 부분이라도 끊어진다면, 그 리좀은 활력을 잃고, 단절된 틈새를 통해 차가운 고립의 바람이 스며들어 공동체의 결속력을 위협한다. 버스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수평적 연대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살아있는 리좀인 것이다.



부활의 몸짓, 작은 연대에서 피어나는 평화


예수의 부활은 단 한 번의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었다.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의심하고 갈등했으며,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불의로 가득했다.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멈추지 않는 포성과 참상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평화가 얼마나 끈질기게 좌절되고 다시 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먼 나라 이야기에 동조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실천을 담보하거나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늘 발밑이 어두운 눈을 가진 존재가 인간 아니던가. 우리는 그 어둠의 터널을 통과한 구세주의 흔적을 따라, 당장 눈앞의 환승 적자라는 현실 앞에서조차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 작은 연대의 손길부터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젊은 정치인이라 주장하는 어느 대통령 선거 후보는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을 그저 일상의 걸림돌로 보고 있다. 그들의 투쟁 이유는 관심 없고 우크라이나 국기를 프로필에 다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행보다.


평화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다. 습관처럼 주고받는 인사말의 나열도 아니다. ‘앗살라무 알라이쿰’, ‘샬롬’, ‘에이레네 휘민’과 같은 평화의 언어들은 모두 신과 인간 사이의 깊은 신뢰와 화해를 전제로 피어난 믿음의 꽃봉오리들이다. 특히 예수가 우리에게 준 평화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분열의 벼랑 끝으로 더 밀어붙이는 듯 보이기도 한다. 평화는 서로를 뜯어말리는 중재가 아닌, 더 곤궁한 이들의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조정이다.


바로 그 벼랑 끝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을 때, 비로소 그 평화는 간절한 믿음의 결실로 싹튼다. 멈춰 선 마을버스 노선은 저절로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고립된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 때, 부활의 평화는 작고 미약한 몸짓으로 우리 곁에 깨어날 수 있다.


평화는 단지 분쟁의 멈춤이 아니다. 평화는 완전한 복구의 다른 말이다. 이미지=Google Sora


우리는 부활의 희미한 메아리를 붙잡고, 멈춰 선 버스 노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단순히 예산을 투입하고 적자를 보전하는 피상적 대책을 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민의 이동권을 보장하겠다는 굳건한 공동체의 의지를 세워야 한다.


“네 발목에 목줄을 채워 잡아당기고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아라.”
-요한복음 13,26-


우리는 약자의 발목을 붙잡아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지친 발걸음을 격려하고,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길을 내어주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부활의 정신을 실천하는 진정한 평화의 모습일 것이다.


오늘도 낡은 마을버스 한 대가 덜컹거리며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그 안에는 어린 자녀의 손을 잡은 어머니, 병원을 향하는 지친 노인, 희망을 품고 일터로 나서는 젊은이들의 다양한 얼굴들이 실려 있다. 버스는 언뜻 차가운 쇳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 공동체의 살아있는 심장이 고동치고 있으며, 부활의 약속이 희미하게나마 깃들어 있다. 만약 이 낡은 옴니버스가 멈춘다면, 우리는 부활의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어둠을 뚫고 부활한 예수의 그 첫걸음이, 이미 멈춰버린 낡은 바퀴를 다시 굴릴 수 있는 무한한 힘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 희미한 궤적을 따라, 우리는 다시금 리좀처럼 끈끈하게 연결될 수 있다.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사이의 메마른 간극, 외딴 시골길 위에 드리워진 고독, 그 모든 틈새를 부활의 따뜻한 숨결로 채우며 말이다.


멈추어 선 버스를 다시 달리게 해야 한다. 이미지=Google Sora


낡은 버스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부활의 희망을 실어 나르는 살아있는 메아리다. 낡은 쇠바퀴가 거친 땅을 딛고 나아가는 그 덜컹거리는 떨림은,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첫걸음처럼, 연약하지만 분명하게 새로운 길을 열어젖힌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고, 멈춰버린 이웃의 심장에 다시 박동을 불어넣으며, 절망의 춤을 멈추고 함께 살아 숨 쉬는 평화의 춤을 춘다.


낡은 옴니버스가 멈추지 않고 달려갈 때, 비로소 부활의 평화는 우리 삶 속에서 완성될 것이다. 낡은 바퀴의 굳건한 연대는, 멈춰서는 절망이 아니라, 언제나 부활을 향한 끈질긴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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