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묵상
6월이 오면 나는 언제나
계절의 분기점 위에 선 기분이 든다.
사라진 계절의 그림자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계절의 기척이 자리—나는 그 투명한 틈에 잠시 머무른다. 아직 오지 않은 것과 이미 지나간 것 사이, 그 좁은 틈을 걷는다.
봄이라 하기엔 잎새가 무성하고, 여름이라 하기엔 볕이 아직 달궈지지 않았다. 이달은 “아직”과 “이미”가 뒤섞이는 중간시간이다. 완연한 신록은 결코 멈춰 있는 자태가 아니다. 오히려 봄의 잔상이 옅어질 무렵, 새로운 계절이 결정돼 가는 순간에 다다른 상태다. 나뭇잎의 푸르름은 빛을 응시하는 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오며, 5월의 미련은 7월의 내음을 기대하는 틈새에 서서히 흩어진다.
이 결정되는 시간의 자리 6월의 첫날,
나는 2023년 12월 백혈병 선고를 떠올린다.
눈발이 흩날리던 그 겨울의 어느 날, 차가운 진단서가 손바닥에 닿았다. 그때부터 시간은 얼어붙었고,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낯설었다. 혈액검사 결과가 곧 미래를 가르는 운명처럼 느껴지던 날들. 수치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나는 생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계절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겨울은 무심히 지나갔고, 봄은 나를 땅속에 묻은 채 피어났다. 그렇게 나는 몸 안의 겨울을 품고 또 하나의 6월에 도달했다. 말하자면 '건너 건너온' 6월이다.
이 버티고 건너온 6월이기에
더욱 또렷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6월은 단지 계절이 아니다. 1950년 6월, 세상사 어두운 민족은 강자들에 의해 둘로 갈라져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었다. 그 상잔의 폐허 위에 기적이라는 숱한 희생의 거름이 되었다. 1987년 6월, 그 시절의 함성은 아직도 가슴을 떨리게 하는 흔적이다. 그 함성은 권위주의의 벽을 향해 던져진 비수였다. 사라지는 점자 같던 청춘들이 만들어낸 그 촘촘한 외침은, 곧 “우리는 살아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 뜨거운 순간이야말로 '이미 지나간 봄'이자 '아직 오지 않은 여름'의 경계였고, 무너진 시간 위에 새로운 역사가 자라난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 6월을 문학은 기록과 기억으로 노래했을까.
6월은 북반구에서 생명이 가장 절정인 계절이지만, 동시에 쇠락을 예감하게 하는 시간이다. 꽃망울은 생의 화려함을 확언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꽃잎이 떨어질 불안을 숨기고 있다.
〈6월의 장미〉 – 박목월
장미는 피어도
소리 없이 핀다
진다 해도
소리 없이 진다
6월이 되어
햇살이 기울면
그늘에서
빛나는 꽃잎
산란한 빛 속에
가슴 태운다
박목월은 '6월의 장미' 속에 사라질 운명을 예감하듯 노래했고, 한강은 작은 일상 속에 녹아든 상실을 곱씹으며 시간의 흐름이 우리를 어떻게 삼켜버리는지 써 내려갔다. 6월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면서 자신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 안에서 우리는 “지금”이 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미 지나온”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모두 안고 있다.
철학적으로 살펴보면 6월은
시간의 변증법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헤겔의 말처럼, 정과 반 사이에서 새로운 종합이 태동하는 계절이다. 이미 봄이 완결되었으나, 여름의 불꽃은 아직 점화되지 않은 채 공기 중에 잠시 머문다. 이즈음의 의식은 가장 또렷하다. 카뮈가 “태양 아래의 정오, 삶이 가장 명징하게 보이는 시간”이라고 했듯, 6월은 우리가 생의 유한함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시점이기도 하다. 생명이 충만할 때, 죽음의 여운이 가장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유 위에 이제
예수 승천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오늘은 '예수 승천 대축일'이다. 루카 복음 24장은 복음의 마지막장, 사도행전 1장은 예수 이후 사도 기록의 첫 장이다. 복음사가 루카가 썼다는 복음서와 행전은 모두 예수의 승천을 다루지만, 이 승천은 단순한 “하늘로 올라감”이 아니다. 승천은 부활의 완성이자, 교회의 시간으로의 전환이다. 복음은 거기서 마침표를 찍고, 사도행전은 그 마침표 뒤에 이어질 기록을 준비한다.
성서학적으로 사도행전은 복음과 서간서 사이의 중간 시간을 기록한 역사서로 분류된다. 이 중간의 시간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결정되는 시간이다. 승천은 이 '중간 시간'을 여는 행위다. 믿음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 증언의 시간이 시작된다. 예수의 승천은 단절이 아니라 전이의 사건이다. 구원의 완성과 교회의 시작, 시간의 끝과 기다림의 시작, 예수의 부재와 성령의 임재를 잇는 이 사건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이냐?"
루카 복음은 승천을 통해 하늘로 향하지만, 사도행전은 그 자리에서 다시 땅을 바라보게 한다. 승천은 위를 바라보다 다시 세상으로 내려서는 신앙의 방향 전환이며, 교회의 소명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묻는 성서적 질문이다.
승천의 순간, 제자들은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사는 그들에게 묻는다. “어찌하여 하늘만 바라보느냐.” 그 말은 결국 이미 이루어진 신비보다, 이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시간에 주목하라는 부르심으로 들린다. 예수는 하늘의 자리에 편히 앉았지만, 그 부재를 통해 새로운 임재—성령의 강림과 사도들의 행적—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기적과 권능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걸음을 내디딘 이들의 기록 위에 세워졌다.
나의 6월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직” 병의 불확실과 “이미” 생사를 넘본 시간 사이에서, 내 안에는 겨울과 봄이 공존한다. 그 가운데서 나는 나만의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고 있다. 더는 의사가 내린 수치에 삶을 맡기지 않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를 증언하는 자리가 되었다. 생명이 계절처럼 다시 피고 지는 것을 매일 목도하면서, 나는 신앙이 기적의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 뒤의 긴 여정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6월이다.
1987년의 함성, 병상에서의 시간, 복음에서 교회로 이어지는 맥락, 그리고 나 자신의 생애가 “아직과 이미”의 시간 위에 교차한다. 이 6월에는 더 이상 아직 머무를 곳도, 이미 끝난 곳도 없다. 다만 포착해야 할 지금과 기록해야 할 그 이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걷는다.
아직 오지 않은 것과 이미 지나간 것 사이, 그 좁은 틈을 걷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쓰라린 기억을 간직한 채, 결코 멈추지 않는 6월을 내 안에 새긴다. 6월은 내게 신록의 찬란함과 동시에 상실의 쓸쓸함을 일깨운다. 그러나 바로 그 양극성 속에서, 나는 나만의 사도행전을 써 내려갈 힘을 얻는다.
지금 이 자리, 6월.
그것은 단지 달력이 아니라, 행적의 시작을 알리는 부르심의 달이다. 나는 오늘도 그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아직”과 “이미”를 안은 몸으로, 내 사도행전의 다음 문장을 살아낸다. 아직 오지 않은 것과 이미 지나간 것 사이, 그 좁은 틈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