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명, '낯선 사랑'의 선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속 '대심문관'의 묵시록적 성찰

by 박 스테파노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복음서 13,34-


오늘의 말씀(부활 5주일, 요한복음 13장 31~35절)은 예수가 자신이 영광을 받으러 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 구절은 단순한 윤리적 명령을 넘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체성과 삶의 토대를 드러낸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의 말씀처럼, 사랑은 예수가 걸어간 십자가 길을 따라가는 이들의 근본적 표지가 된다.


'반 그리스도'를 설파하는 니체마저도 사랑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큰 잠재력이라 고백했다. 이미지=Google Gemini


'사랑의 계명'에 대한 니체의 날카로운 메스는 기독교적 사랑의 가장 깊숙한 곳을 도려낸다. <반 그리스도>에서 그는 연민을 “쇠약한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의 징후”로 낙인찍는다. 강자의 능동적인 힘을 억압하고, 자기 긍정의 건강한 외침을 죄악시하는 기독교 도덕은, 질투와 원한에 사로잡힌 노예들의 교활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냉철한 철학자는 동시에 이렇게 속삭인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이다.”


자기 보존의 본능을 초극하여 타인의 존재를 긍정하고, 심지어 자기희생의 숭고한 경지까지 나아가는 사랑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역설적인 통찰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두 시선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요한복음 13장 34절, 예수의 ‘새로운 계명’이 던지는 심오한 질문의 핵심을 꿰뚫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간결한 선언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를 넘어, 사랑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조명하는 영원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자유의 딜레마


도스토옙스키의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심연에 자리한 액자 소설, ‘대심문관’은 바로 이 ‘새로운 계명’의 묵시록적인 풍경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16세기 스페인, 이단의 불꽃이 타오르고 종교재판소의 그림자가 드리운 암울한 시대, 늙고 냉철한 대심문관은 재림한 예수를 심문한다.


그의 논리는 섬뜩한 현실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은 나약하고 변덕스러워 스스로 자유의 짐을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선택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물질적인 풍요와 확고한 권위의 보호 아래 안온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단호히 거부했던 세 가지 유혹, 즉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 신의 신비로운 권능의 과시, 세속적인 왕국의 통치권을 대심문관은 인간 구원의 불가결한 조건으로 역설한다. 굶주린 군중에게 즉각적인 만족을, 불안에 떠는 영혼들에게 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를 잠재울 초자연적인 신비를 제공함으로써만 인간은 비로소 안녕을 누릴 수 있다는 섬뜩한 주장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신문관이 예수를 심문하고 있다. 사랑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구체화될 수 없다고 말이다. 이미지=Google Gemini


대심문관은 세 번의 유혹 논의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 속에서 방황한다. 그대가 말한 ‘사랑’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결국 인간 대다수는 빵과 의례, 권위를 택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감옥 문을 두드리며 예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귀한 분, 당신은 스스로 갇힌 감옥의 벽을 부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낯선 사랑(“ἐπ᾽ ἀγαθῷ”—for the good)만을 외치며 돌아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 죄를 저질렀다. 그러니 당신은 빨리 떠나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번뇌를 안겨주지 말라.”


결국 예수가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대심문관을 바라보자,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입을 맞춘 뒤(침묵 속의 모욕적 제스처) “그대는 떠나라”며 그를 풀어준다.


이 삽화된 액자 소설은 문학이 주는 환기의 작용을 한다. 대심문관은 종교권력과 인간 자유의 대립을 극적으로 제시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낯선 사랑-ἐπ᾽ ἀγαθῷ)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다. 대심문관의 논증은 인간을 지배하고 안정시켜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입장이지만, 예수가 묵묵히 보여준 입맞춤(침묵의 사랑)은 말이 필요 없는 무조건적, 희생적, 자유로운 사랑을 상징한다.


대심문관에게 예수의 ‘새로운 계명’, 곧 자유로운 사랑의 이상은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을 간과한 순진한 환상에 불과하다. 그가 보기에, 인간에게 던져진 무거운 자유는 필연적으로 고독과 불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불신앙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의 차갑고 논리적인 독백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날카롭게 해부하지만, 역설적으로 예수의 ‘새로운 계명’이 지닌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침묵 속에서 예수는 대심문관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기반한 사랑의 가능성을 묵묵히 긍정하는 것이다.



조건 없는 헌신의 윤리


불신론자 이반 카라마조프는 소설 전편에서 끊임없이 만약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가 알고도 방임하며 고통시킨다면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고뇌를 드러낸다. 그가 알료샤에게 전한 '대심문관 이야기'는, 사실상 “신의 재림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간은 진정 그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치다. 특히 이반의 반신론적 문제의식—즉, “신이 존재라도, 그 사랑이 인간의 고통보다 앞설 수 있는가?”—이 대심문관의 논변에서 극대화된다. 대심문관이 인간의 나약함을 구실 삼아 “사랑보다도 인간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삼으라”고 떠드는 대목은, 이반이 신 앞에서 느끼는 배신감을 대변한다.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아가페(ἀγάπη)’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 즉 자기 존재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정의된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과 연계하여 보면,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로 향하면서 인류에게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을 제시했다. 반면, 대심문관은 “인간은 약하기에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저버린다. 그러니 교회는 계약적 언약(신뢰를 바탕으로 한 ‘유효한 조건부 사랑’)으로 사람들을 묶어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대심문관은 교리와 의례, 권위를 통해 사랑을 조건화함으로써,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려 한다. 이는 진정한 아가페를 훼손하고, 사랑의 메시지를 왜곡하는 것이다.


아가페의 증명은 이미 그의 십자가로 충분하다. 이미지=Google Gemini


그렇다면 예수의 ‘새로운 계명’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낯선 사랑-엡 아가토(ἐπ᾽ ἀγαθῷ)’의 심오한 의미는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숙고할 때, 이는 낡은 율법의 틀을 넘어선 혁명적인 윤리적 선언이다. 구약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황금률은 이미 인간 관계의 중요한 토대를 제시했지만,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의 자기희생이라는 궁극적인 사랑의 행위를 통해 이 계명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기준은 단순한 인간적인 호의나 감정적인 공감을 넘어선다. 이는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십자가의 아가페(ἀγάπη)를 의미한다. ‘낯선 사랑’은 혈연, 국경, 종교, 사회적 계층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타인을 향하는 근원적인 헌신이다. 이는 대심문관이 ‘질서’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려 했던 바로 그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기반한다.


강요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으며, 자유로운 선택만이 아가페의 순수한 본질을 꽃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이 ‘낯선 사랑’을 신의 무조건적인 은총의 반영으로 해석한다. 죄인 된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신의 헤세드(ḥesed-자비, 은총)의 정신이, 인간 관계 속에서 ‘낯선 사랑’이라는 형태로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성의 심연을 응시하는 윤리


대심문관이 말하는 “자유는 무거운 짐”이라는 논리는 실존주의 사유와도 맞닿는다. 장 쥬네가 “죽음과 자유가 닮았다”고 한 것처럼,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일어나는 책임과 고통을 동반한다. 키에르케고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진정한 신앙은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가능하지만, 그만큼 단독자(독자)의 외로움과 공포를 불러온다”고 말한다. 대심문관은 그 고통을 무의미한 짐으로 치부하고 안전을 우선하라고 권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진정한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존재”라는 깊은 실존적 통찰을 전면에 드러낸다.


“교회가 참된 중재자라면, 왜 오랫동안 선교·박해·권력 남용의 역사에서 자유를 빼앗아왔는가?”라는 질문은, 근대 이후 종교권위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 이어진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 선언처럼, “권위가 해체된 이후 우리는 어디에서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찾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남긴다. 대심문관처럼 교회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주장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으며, 타자의 권위(또는 거울로서의 하나님) 없이는 공포에 사로잡힐 뿐이라는 극단적 허무주의를 내포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를 다시 반문하며, “그렇게까지 인간을 낮출 필요가 있는가? 우리에게 남은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대심문관은 사랑 자체를 이상한 감정으로 규정짓고, “인간은 사랑이 아닌, 고수익·편리·안정·권위를 원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예수가 무언의 입맞춤으로 응답하는 순간, 그 입맞춤은 세상 어떤 기적이나 권위보다도 큰 힘으로 드러난다. 이는 마치 니체의 말처럼 “약함 속에 진정한 힘이 있다”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준다. 결국 사랑은 권위를 넘어서는 가장 태풍 같은 힘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적 관점에서 ‘낯선 사랑’은 현대 윤리학의 핵심적인 화두인 타자 윤리와 깊숙이 연결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서 마주하는 윤리적 요청, 곧 “너는 나를 살해하지 말라”는 근원적인 명령을 통해 윤리의 기원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는다. ‘낯선 사랑’은 단순히 타자를 동정하거나 이해하는 피상적인 행위를 넘어선다. 이는 타자의 고유한 존재성을 존중하고, 그의 독특한 세계관과 가치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나의 익숙한 틀 안으로 타자를 억지로 편입시키려는 모든 폭력적인 시도를 거부하고, 타자 스스로의 의미를 발견하고 실현하도록 돕는 숭고한 윤리적 실천이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낯설수록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조건 없는 환대”를 베풀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미지=Google Gemini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개념을 통해 이 논의를 더욱 심화시킨다. 낯선 방문자를 나의 안전한 공간 안으로 초대하고, 그의 낯섦과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만남과 윤리적인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심문관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명목 아래 낯선 존재를 배제하고 통제하려 했던 시도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낯선 사랑’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불편할 수 있는 타자의 존재를 기꺼이 감수하며,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또한 새롭게 정의해 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등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존재-타자(Being-for-Others)’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타자의 고통과 실존을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의무적·윤리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고 보았다. '낯선 사랑'은 이 지점에서 타자를 나와 같은 주체로 인정하고, 그 타자가 겪는 고통 속에 나를 개입시키는 윤리적 행위를 말한다. 바로 이 순간,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타자의 자유와 공존’으로 확대하며,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초월하게 된다.



문학적 성찰과 실천적 과제


문학은 이 ‘낯선 사랑’의 다채로운 얼굴과 그 심오한 의미를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또 다른 역작 <백치>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미시킨 공작’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냉혹함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낯선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의 연약하고 순수한 마음은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타인을 향한 연민과 이해를 갈구한다.


타인을 향한 끊임없는 연민과 이해가 '낯선 사랑'의 요체. 이미지=Google Gemini


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이 인간의 나약함을 핑계 삼아 억압하려 했던 인간 본성의 또 다른 가능성, 곧 순수한 사랑의 힘을 웅변한다. 한국 문학 또한 억압과 고난의 역사 속에서 ‘낯선 사랑’의 다양한 변주를 탐색해 왔다. 박완서의 소설 속에서 전쟁의 상처를 공유한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 연대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낯선 사랑’의 숭고한 힘을 보여준다. 이는 혈연과 지연을 넘어선 인간적인 공감과 연대가 어떻게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결국 ‘새로운 계명’과 ‘낯선 사랑’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감상적인 외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요구하는 윤리적 명령이다. 이는 교회가 제도적인 권위에 안주하며 인간의 나약함을 핑계 삼아 자유로운 사랑의 실천을 주저하는 대심문관의 논리에 맞서는 근본적인 힘이다.


니체가 역설적으로 통찰했듯, 진정한 사랑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잠재력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껍질을 깨고 나와 낯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 조건 없이 베푸는 작은 호의와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새로운 계명’을 살아있는 실천으로 만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문학 작품 속에서 ‘낯선 사랑’의 다양한 얼굴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낯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길러준다.


작은 친절과 연대. 이것이 욕망의 시스템을 무너뜨릴 리좀이다. 이미지=Google Gemini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조차 품어 안을 수 있는 용기와 태도를 끊임없이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며, 비그리스도인조차도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정한 인간다움을 위해 반드시 접촉해야 할 윤리적·영성적 과제가 바로 이 '낯선 사랑'이다. 이제 남은 것은, 교회 예배당을 넘어 내가 매일 생활하는 그 거리와 사무실, 카페와 버스정류장, 그리고 나와 다른 삶의 궤적 속에 있는 낯선 이들 모두에게 작은 선을 베풀 것인가를 스스로 묻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낯선 사랑-ἐπ᾽ ἀγαθῷ”라는 말씀이 각자의 삶 속에서 작지만 확실한 기적처럼 번져가기를 기도한다.


교회의 문턱을 넘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낯선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작은 실천들이 모일 때, 비로소 예수의 ‘새로운 계명’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영원한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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