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젊은 정치인'들의 허위적 퍼포먼스의 초상
그제(2025.5.18) 저녁에 조기 대선을 앞둔 후보자 토론회가 있었다. 선거 토론회에 대한 평가는 무위하다 싶을 정도의 무용론이 거세기는 하나, 후보들의 지금의 준비와 결심, 그리고 평소의 성정을 파악하는 좋은 기표가 된다.
토론에서 콘텐츠는 모두가 낙제점에 가까웠다. 특히 이재명 후보의 어젠다에 광장의 목소리가 없다는 안타까움이 재확인되었다. 모진 찬바람 부는 광장에서 키세스들이 눈을 맞으며 응원봉을 들어 올린 이유는 AI강국이나 산업부흥을 위함이 아니었다. 불공정과 불의의 타파, 격차와 차별의 해소, 그리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조망이었다. 민주당 선거 정책에 이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 일단 지지하며 차후 보정을 기대하기로 한다.
토론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준석의 빨간 볼과 헐떡이는 질문 답변의 급발이었다. 모두 발언에는 무대공포증으로 입스가 온 사회자처럼 경직되고 당황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 들었다. 국민학교 시절 웅변대회에 억지 나온 육성회장 엄마를 둔 부반장의 모습이랄까. 이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치고 파안대소하기보다 침울한 우울감이 스며들었다. 이런 부류가 한국 정치의 미래라니.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의 청년 주장 정치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단계'에 서있는 두 사람
이준석과 한동훈은 초록동색의 한 묶음이다. 이들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말과 몸짓은, 마치 오래된 연극 속 배우가 가면을 갈아쓰듯 상황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비공식 석상에서는 날카로운 조롱과 빈틈없는 자신감을 휘두르며 상대의 흠집을 낚아채던 이들이 정작 공식 토론 무대에 서면 표정은 상기되고 말은 더듬댄다. 여기엔 단순한 준비 부족이나 긴장 이상의 무언가가 숨어 있다. 이들의 언행 속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나르시시즘과, 그 이면에 자리한 깊은 불안이 뒤얽혀 있다.
우리는 그들의 과장된 이미지 뒤편에 놓인 불안의 실루엣을 읽어내야 한다.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에서,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인식한다. 이준석과 한동훈이 끊임없이 키높이 구두를 신고 머리 가르마를 바꾸며, 단어 하나하나에 카메라를 의식하며 몸을 곧추세우는 모습은, 바로 타자의 시선으로 구성된 자신의 이미지를 굳건히 붙들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자신이 보여주는 그 순간만큼은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존재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결국 그 가면은 잠시의 환영에 불과하다.
나르시시스트의 허언은 그들을 움직이는 또 다른 동력이다. 오토 폴크가 경고한 대로, 권력 지향적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한 과장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찬사와 관심을 갈망한다. 검증되지 않은 능력을 내세워 학력과 경력을 과장하는 것도, 사실은 이내 ‘그럴듯한 스펙’이라는 상징적 자본을 얻고자 하는 시도다. 그러나 그 자본의 토대가 허수라면, 언제든 환상은 공중분해될 수밖에 없다. 비공식 석상에서 날 선 비판을 퍼붓던 그들은, 정작 공식 토론에서는 논리와 숙의가 결여된 모습을 드러낸다. 이간의 차이는 단지 거리가 아니라, 무대 뒤에 감춘 불안이 공식 무대 위에서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 공식 무대의 순간은, 내면의 음영이 더욱 거세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칼 융이 말한 ‘페르소나’와 ‘음영’의 대립은 오늘날 정치인을 이해하는 데에도 유효하다. 무대 위에서 절제된 언어와 행동을 유지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언제 가면이 깨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발목을 잡는다. 반대로 비공식 자리에서 쏟아내는 조롱과 냉소는, 바로 그 음영이 날뛰는 순간이다. 두 얼굴을 넘나드는 행위는 마치 배우가 무도회장 가면을 교체하면서 상대의 반응을 시험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귀족들의 가면무도회가 ‘연극 속 진실을 알아차리는 지점’을 제공했다면, 이들의 가면극은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장치에 가깝다.
가장된 의지는 허무한 공허의 퍼포먼스
철학자의 언어를 빌리면, 이들이 펼치는 것은 니체가 말한 ‘의지’가 아닌 ‘가장된 의지’다. 니체는 힘을 향한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향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준석과 한동훈에게 보이는 의지는, 사실 권력 권위를 향한 허무한 투사에 가깝다. 말은 빠르고 날카롭지만 깊이는 없다. 겉으로 보이는 힘의 과시는 오히려 그 이면의 공허를 더 선명히 드러낸다. 실제로 그들이 내세우는 정책 비전이나 철학적 사유는 부실하고, 대신 이미지와 언어 퍼포먼스에 지나치게 매달린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는, 자신의 삶을 맥락 속에서 진지하게 사유할 때 비로소 참된 존재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에겐 세상이 ‘숙고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로 소비될 무대’다. 무대를 압도하는 말투와 비주얼 전략을 구사하는 순간, 토론자는 더 이상 청중과의 진실한 소통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가 얼마나 선명하게 각인될 것인가에만 집착하는 ‘쇼의 배경음악’ 일뿐이다.
역사 속으로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데마고그를 떠올릴 수 있다. 아테네 아고라를 휩쓸던 수사학의 명수들은, 대중을 선동해 자신에게 권력을 안겼지만, 그 실체는 허울뿐이었다는 기록이 잔존한다. 이준석과 한동훈의 언행 또한, 본질적으로는 데마고그적 수사와 다를 바 없다.
비공식 석상에서 던지는 조롱은 대중의 분노를 대리 표출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실제로 어떤 정책을 실현하고 공동체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한국 정치사가 보여준 수많은 이미지 정치의 계보 위에서, 이들의 과시형 전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가 만들어낸 몬스트로
20세기말 이후 한국 사회를 관통한 ‘스펙 지상주의’는, 정치인의 이미지와 스토리가 결국 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 울긋불긋 현수막으로 가득한 거리, 언론을 향해 던지는 한마디 발언—이 모든 것이 대선 캠프의 전략가들이 지닌 ‘이미지 수도’였던 때가 그리 멀지 않다.
이준석이 SNS를 장악하며 ‘젊은 리더십’ 이미지를 구축했던 것도, 한동훈이 검사 시절부터 ‘정의로운 검사’라는 프레임을 애써 단장해 온 것도, 결국은 같은 계보의 연장선이다. 이들의 키높이 구두는 단순한 패션 코드는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자기 존재의 불안’을 시각적으로 은유하는 도구다. 공중에 떠 있는 존재감을 유지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바로 불안의 표현이다.
세계무대를 살펴보면, 오늘날 리더들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로 메시지를 던지는 ‘퍼포머티브 리더십’을 강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엠마뉘엘 마크롱이 단상 위에서 보여준 극적인 제스처, 힐러리 클린턴이 토론에서 취한 카리스마적 표정은 모두 의도된 퍼포먼스였다.
이준석과 한동훈은 한국 정치라는 비좁은 무대 위에서, 이 같은 퍼포머티브 전략을 차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깊이 없는 즉흥극에 불과하다. 비공식 석상에서 과장된 언행을 반복하다 보면, 정작 공식 토론에서는 입술이 바짝 마르고 말줄임표만 연거푸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마지막을 압도하는 몬스트로 '엘리사베수'의 형상은 미숙한 욕망의 기형적 잉태와 탄생을 비유한다. 실력이란 학력에 달려있고 그 학력이란 온 집안의 능력과 운이 총집합된 요체라는 생각이 만연한 대중이 낳은 몬스트로가 이준석과 한동훈 같은 정치인들이 아닐까 싶다.
젊은이의 가면을 쓴 기득의 속셈
문학적 상상력을 덧입히면, 이들은 마치 신화 속 ‘트릭스터(trickster)’에 가깝다. 트릭스터는 경계를 넘나들며 기존 질서를 흔드는 존재다. 그들은 가볍고 유연한 언어로 권력의 균열을 만들어 내지만, 동시에 그 균열 속으로 스며들어 영향력을 키우기도 한다.
이준석과 한동훈이 비공식 석상에서는 강력한 '농담 폭탄'을 던진 뒤, 공식 토론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트릭스터가 보여주는 불가사의한 재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이 상상 속에서 그 균열을 폭로하고,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도록 독려했다면, 이들의 트릭스터적 언행은 오히려 기존 질서를 더욱 공고히 지키려는 속임수에 다름 아니다.
한국 근현대 문학은 일찍이 스펙 지상주의와 허영의 껍데기를 낱낱이 드러냈다. 염상섭의 <삼대> 속 인물처럼, 이준석과 한동훈은 외형적 성공의 껍질 안에 갇힌 채 끊임없이 자신을 단장해야만 살아남는다. 이태준의 <달밤>이 보여주듯, 밤길을 걷다 보면 길바닥에 부서진 신발 한 짝이 대낮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이들의 키높이 구두 역시 누군가 쌓아놓은 차가운 시선 위에서 빛나지만,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그늘에 가려진 배고픔과 고독을 숨길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이미지의 정치학’과 ‘허위적 퍼포먼스(hypocritical performance)’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탈진실 시대에, 객관적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한 힘을 지니지 못한다. 대신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이미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준석과 한동훈은 바로 탈진실, 포스트-트루스 정치의 산물이다. 그들의 말은 공허하지만, 그 공허가 던지는 파장은 의외로 넓고 깊다. 상대와 대중을 향해 던지는 조롱은 일종의 ‘기표(signifier)’로서 작동하며, 현실의 쟁점은 주목받지 못한 채 가려진다.
트릭스터 이론은 우리에게 이중의 교훈을 준다. 하나는, 표면 아래에 감춰진 구조를 읽어내는 힘이다. 이준석·한동훈의 언어 퍼포먼스가 연극인지 진짜인지 구별해 내는 일은, 그들이 흘리는 말속에 담긴 이면의 동기를 포착하는 일과 같다. 다른 하나는, 트릭스터적 전술 자체가 어떻게 권력을 강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통찰이다. 그들은 가벼운 언어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구축한 이미지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의 책임이 만든 허상의 그림자
마침내, 이들이 가면을 갈아 쓰며 무대 위를 활보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네가 내뱉는 말은 진정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 그들의 키높이 구두에 비친 반짝이는 조명은, 어쩌면 그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자아의 그림자가 아닐까. 공식 무대와 비공식 자리 사이를 교묘히 오가는 이들은, 이미 ‘허위적 퍼포먼스의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대를 넘어서야 한다. 말의 연극성 이면에 숨겨진 공허를 폭로하고, 진심으로 숙의하는 대화를 복원해야만 민주주의는 비로소 숨 쉴 수 있다.
선거의 승리가 세상의 변화를 직접 담보하지는 못한다. 이준석과 한동훈을 예로 들었지만 소위 진보 진영 속에 있는 허위적 퍼포먼서도 상당수다. 우세의 선거판에서 광장의 목소리는 '승리 우선'이라는 주판 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부자 감세와 규제의 타파가 광장 어젠다의 어디에 있었을까? 그제 토론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재명 후보의 반응은 '아직은 이르다'였다. 그 '아직'이 이재명 특유의 실용적 레토릭이길 바란다.
이준석과 한동훈이라는 허상들이 지나쳐 온 길 끝에서, 우리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은, 말의 향연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진정으로 고민하는가?” 그 물음 앞에 선 우리는, 어쩌면 이미 허위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기 시작한 셈이다. 그 눈길이 비추는 곳에서만 비로소 깨어 있는 정치가, 깨어 있는 시민이 함께 숨 쉬는 세상이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