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대정전'을 바라보는 경직된 시선
스페인의 대정전(2025년 4월 28일)이 우리에게 남긴 불청객 같은 울림은, 마치 오래된 고성과 첨탑 사이로 스며든 바람소리처럼 은밀하지만 무시무시하다. 바람이 멈추고 해가 구름 뒤에 가려진 찰나, 전력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경망이 치명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그 순간, 태양과 바람이 선사하는 ‘순수한 빛과 자유’의 낭만이 무너지고, 수십만 가구의 전등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사건을 두고 우리 한국의 보수진영은, 마치 구절양장의 시계를 재빨리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듯,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이 부른 재앙”이라며 익숙한 해법—원전과 화석연료의 든든한 울타리—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 설명은 너무 단순하다. 그 속에는, 음울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시대의 복잡한 서사 전체가 가려져 있다.
이는 단순히 유럽 한구석의 사고가 아니다.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도, 바람이 자유롭게 불어도, 전력망이라는 그 보이지 않는 신경망이 한순간 요동하면 일상은 무너진다. 우리 한국에서도 어제의 맑은 전기 한 조각이 내일의 암흑으로 바뀔 수 있다는 균열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문제는 이 균열을 경고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익숙한 방식에만 매몰된 정치·정책 결정자들의 ‘경직성’이다. 특히 보수진영에서 발견되는 에너지 전환에 대한 강고한 태도는, 스페인의 사례를 통해 불거진 근본적 불안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과속 방지턱’을 제거하는 데 오히려 발목을 잡는 모양새다.
익숙함의 덫, 원전과 화석연료로의 고집
전력 공급 안정성 논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페인 대정전이 보여준 것은 단지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서 발생한 사고’라는 단일한 결론이 아니다. 핵심은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전력망 인프라를 제대로 확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보수진영은 이 지점을 비껴간 채, “태양광·풍력 비율이 높으면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명제만 되풀이하며 원자력과 석탄 발전을 향한 낡은 강변을 계속해 왔다. 마치 오래된 갈대밭에 불이 붙어도, 그 불씨를 끄기보다는 “갈대가 너무 많아 불이 났다”는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다.
한국 보수진영의 에너지 정책 기저에는 ‘원전 신화’가 서려 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핵발전소 건설은 어느덧 ‘국가 자존심’처럼 자리 잡았고, 에너지 안보를 논할 때마다 이 원전 카드가 맨 앞줄에 놓인다. 그러나 핵연료가 비싸고, 노후 원전 사고가 터질 때마다 남겨진 방사성 폐기물은 도외시된 채다. 여기에 21세기적 문제의식—기후변화, 분산형 발전, 에너지 민주주의—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런 원전 중심주의는, 스페인 사례처럼 전력망 전체를 관통하는 복잡한 역학 관계를 애써 외면한 채 “재생에너지 = 불안정”이라는 단순 공식을 고수하게 만든다.
“간헐성을 대비하라”는 경고와 그 외면
보수진영이 이르는 ‘간헐성 문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태양광이 구름에 가려 발전량이 급감하면, 전력망 주파수는 출렁인다. 풍력이 멈추면 또 흔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로 해결 가능한 ‘예측 가능한 약점’이다. 문제는 그러한 약점을 보완할 ESS(에너지 저장 시스템), 스마트 그리드, 지역 간 송전 네트워크 확충 등 필수적 설비 투자를 뒤로 미룬 채, “재생에너지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태도다. 이는 마치 배가 좌초되었을 때, 배 자체를 비난하며 강물을 원망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실제로 스페인 대정전 때는 화석발전기 세 기가 이탈하며 전력망 전체에 연쇄적 충격을 주었다. 다시 말해, 태양광·풍력의 간헐성이 직접적 원인이라기보다, 전력망 운용 체계가 신재생 중심 구조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한국 보수진영은 “태양광·풍력 확대를 중단하고 원전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해법만 되풀이한다. 이러한 해법은 근시안적이다. 단지 전력을 많이 만들어 공급하는 데만 집중할 뿐, 수요·공급 불일치를 실시간으로 조절하고, 지역 간 전력 흐름을 최적화하는 기술적·제도적 보완책은 애써 외면한다.
에너지 전환보다 더 중요한 ‘전환 그 자체’의 경직성
에너지 전환의 본질은 단순히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바람개비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송전·소비 체계 전체를 재설계하고, 나아가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이때 관건은 ‘전환 그 자체를 어떻게 유연하게 수용하느냐’에 있다. 하지만 보수진영은 새로운 체계로의 이행에 필요한 갈등 조정, 이해관계자 간 협력, 기술 표준화 등에 대한 논의를 등한시하는 대신, ‘일부 반짝이는 태양광 모듈이 우리의 시스템을 붕괴시킨다’는 흑백논리만 반복한다.
예컨대,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두고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면 경치가 훼손된다”거나 “농지를 뺏긴다”는 일차적 불만만 부각하는 식이다. 물론 풍력발전기가 산등성이를 가로지르면 풍경이 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풍경의 변화 = 문명 퇴보’라는 등식에 쉽게 동의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때 석탄 공장이 멀리서 칙칙거리며 검은 연기를 내뿜던 풍경”과 비교할 때, 풍력 타워 하나 세우는 일이 과연 더 큰 위협인가? 보수진영은 이 지점에서 묘하게 침묵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직성은 결국 가장 큰 저항세력이 되어, 전환 자체를 멈추게 한다.
스페인에서도 보수적인 정치 세력은 원전 폐쇄와 재생에너지 확대를 둘러싼 논쟁에서 “안정성이 우선”이라는 깃발 아래, 풍력·태양광에 제동을 걸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그제야 “전력망 확충 없이 재생에너지만 늘린 것은 자해 행위”라는 교훈을 얻고, 대규모 고속송전망과 ESS 등 인프라 투자로 대응을 모색 중이다. 반면, 한국의 보수진영은 스페인의 실패 사례를 곧바로 수용하기보다는, “우리와 상황이 다르다”는 논리에 기대어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려 한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전력망의 진동이 곧 재난으로 직결된다는 경고는 지구 전역에 경종을 울린다.
“능동적 기다림”을 넘어서는 민첩성의 필요
우리에게는 ‘능동적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란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다. 기술 발전을 예의주시하며, 정책의 한계를 수용해가며 단단히 대응책을 마련하는 ‘능동적 중지’의 태도다. 보수진영과 보수 언론들은, 제발 더 이상 ‘원전과 석탄이니까 안전하다’는 구태한 논리만 반복하지 말기를 바란다. 스페인처럼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후위기와 전력망 불안정은 우리 한국 바다와 산천을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다.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은 늘 불편함을 동반한다. 바람개비 하나를 세우고, 태양광 패널을 펼치는 순간, 기존 전력 시스템의 균열이 드러난다. 그때 필요한 것은 ‘거친 우려’가 아니라 ‘구조적 대응’이다. 보수진영과 언론들도 이제 그만 낡은 성을 떠나 에너지 전환이라는 밖의 세계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래야만 어제의 암흑이 오늘의 깨달음이 되어, 내일의 희망적 빛을 비출 수 있다.
어느 칼럼에 리좀의 의미 설명을 하며 “문명이 균열을 일으킬 때, 그 틈새로 들어온 작은 빛줄기가 미래를 열어준다”라고 쓴 바 있다. 바로 이 틈새—전력망의 균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그것은 ‘보수진영의 경직성’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도, 새롭게 피어나는 작은 생명들이다. ESS와 인공 관성 장치, 스마트 그리드와 지역 간 송전 연계망은 말하자면 ‘작은 빛줄기’와 같다. 이 장치들을 적절히 연결하면, 조각난 전력망은 다시 살아난다. 즉, 전력망 확충이란 물리적 설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를 엮어내는 작업이다. 한국 보수진영이 계속해서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서사의 전환’이다.
보수진영, 보수 언론의 에너지 논리는 마치 오래된 희곡의 대사를 되풀이하는 배우 같아서, 관객(국민)들은 그 단조로운 울림에 지쳐간다. 우리는 이제 다른 무대를 요구해야 한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곧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희곡을 써 내려가는 일이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야 비로소 무대 위에 찬란한 빛이 드리워진다. 이 빛이야말로, 스페인이 보여준 경고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