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불꽃, 빛, 따스함의 언어

[삼위일체 대축일] 묵상

by 박 스테파노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여정이다. 그 첫걸음은 낯선 전례 속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모두가 함께 읊조리는 기도문과 응답의 리듬 속에 자신을 맡기는 데서 시작된다. 처음엔 그 낯섦이 몸을 움츠리게 하지만, 점차 그 흐름에 녹아드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세례와 영세, 신자가 되기 위한 문턱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성인이 되어 입교하려면 적어도 반 년가량의 예비자 교리를 받아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쌓이는 기다림과 배움, 익숙해짐의 과정은 어떤 의미로 ‘신앙 입문의 훈련’이다. 아무리 절박한 마음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넘어야 할 벽이 있다. 무심코 유아 때 받은 세례와 첫 영성체의 순서를 밟지 않은 이들에게, 성인이 된 후 교리 과정을 밟는 일은 자신과의 긴 대화와 같다.


교리의 초입은 낯설지 않다. 성사론, 인간관, 사회교리 등은 일견 단순한 신앙 고백의 틀처럼 보인다. 교회 밖에서 흔히 오해받는 성모 공경조차, 그 본뜻을 깨닫고 나면 무지와 편견의 벽 너머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메시지는 분명한데, ‘삼위일체’라는 낯선 용어가 그 길을 막는다.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y Rublyov, 1360 -1430)의 대표작 <삼위일체>, 1411년. 에르미타쥬



'삼위일체', 그 난해한 신앙의 신비


삼위일체는 가톨릭 신앙의 심장이라 불린다. 동시에 가장 손에 잡히지 않는 신비다. 그 어렵다는 느낌은 정직한 반응이다. 삼위일체는 머리로 완전히 파악할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마주해야’ 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해하려고 잡으려 할수록 신비는 사라지고, 끝내 우리를 침묵과 사랑의 자리로 이끈다.


그 교리는 인간 이성으로는 ‘하나’와 ‘셋’이라는 불가능한 모순을 안고 있다. 고대 교부들과 중세 철학자들이 그 의미를 풀어내려 애썼지만, 결국 추상성은 그들을 넘어 문학과 예술, 철학으로까지 퍼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비유는 ‘불’이다.


불꽃은 ‘보이는 하느님’, 곧 성자를 상징한다. 불꽃은 역사라는 시간 속에 나타난 구체적 사건이며 인격이다. 그 모습은 가시적이지만, 불꽃 그 자체가 불 전체는 아니다.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현현일 뿐, 하느님의 전부를 담아내기엔 부족하다. 이 지점에서 미묘한 긴장이 생긴다. 불꽃 비유는 ‘현존하는 하느님’을 그려내지만, 동시에 그 본질적인 면모를 가릴 위험도 품고 있다. 이 긴장은 삼위일체가 지닌 ‘부분과 전체’의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불꽃에서 뻗어나가는 빛은 성령의 역할이다. 빛은 불꽃 그 자체는 아니지만, 불꽃을 드러낸다. 관계와 소통의 이미지다. 성령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이며, 빛은 불꽃과 어둠을 잇는다. 그러나 빛은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불꽃을 간접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매개일 뿐이다. 하느님의 신비는 직접 드러나지 않고, 인간의 해석 영역에 머문다. 이 빛은 하느님 존재의 ‘현상학적 한계’를 드러낸다.


따스함은 불의 본질, 즉 성부를 상징한다. 따스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측정도 불가능하며, 오로지 감각적 체험으로만 느껴진다. 성부가 삼위일체 내 가장 난해한 위격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월적 신비로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따스함은 하느님 존재론의 경계다.


불의 비유. 성령강림대축일 일주일 후가 삼위일체 대축일. Sora


‘불’이라는 비유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내포한 긴장과 모순, 신비를 드러내는 상징체계다. 불꽃, 빛, 따스함은 하나로 통합되지만 동시에 분리된 실체로 사고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불’은 교리의 본질적 불가해성을 폭로하며, 언어와 상징이 신비를 포획하려 할 때 벌어지는 필연적 한계를 드러낸다.


오늘날 다원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삼위일체는 ‘관계적 존재론’의 시초로 새롭게 빛난다. ‘하나가 셋으로 존재한다’는 역설은 사랑과 소통의 역동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동시에 불 비유는 스스로 ‘정체성 위기’를 내포한다. 불은 타오르면서도 꺼질 위험에 처한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현대 영성과 지성 안에서 ‘불꽃’을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함을 상징한다.



기쁨의 관계학,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핵심은 ‘관계’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고유한 위격이지만 본질은 하나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열려 있으며,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 실체는 고립된 자족이 아니라, 타자를 통해 완성되는 존재 방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사랑하는 자(성부) – 사랑받는 자(성자) – 사랑 자체(성령)’로 묘사했다. 사랑은 고정된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주고받으며 돌아오는 살아있는 운동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닫힌 자족의 신이 아니라, 넘치고 흘러넘치는 사랑의 관계다. 이런 신 개념은 인간 존재 또한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타자에게 자신을 열고 나누는 ‘선물’임을 가리킨다.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하는. Sora


삼위일체는 다양한 위격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 지점에서, 일치와 다양성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통합하는 모델이다. 이는 공동체, 사회, 정치 질서에서도 모방 가능한 원형적 상상력을 준다. 모든 차이를 지우는 통일은 폭력이 되고, 모든 차이를 방치하는 다원성은 분열을 낳는다. 삼위일체는 차이 인정과 일치 지향 두 원리를 관계 속에서 조화시켜, 존엄한 개인이 실현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끝내 말로 완전히 닿을 수 없는 신비다. 인식의 한계 앞에 멈춰야 하는 침묵의 자리다. 닿을 수 없기에 더 깊이 성찰하고, 다 말할 수 없기에 조심스레 묵상해야 할 주제다. 하느님에 대한 언어는 언제나 불충분하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결코 완전히 포획할 수 없는 존재 방식이며,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실한 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과 예배의 대상이다.


삼위일체는 단순한 하느님 설명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고립된 자아에서 관계로, 소유에서 선물로, 경쟁에서 공동체로, 배타에서 포용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면, 인간은 ‘함께 있음’ 속에서 그 모습을 닮아야 한다. 삼위일체는 사랑이 본질이 될 수 있다는 대담한 선언이며,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관계론적 존재론의 근거다.



'함께 있음'의 깨달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는 말씀이 존재론적 뿌리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자(성부), 사랑받는 자(성자), 사랑 그 자체(성령)로 존재한다. 이는 영원부터 내면에 사랑의 관계를 품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고독한 절대자가 아닌, 영원한 ‘함께 있음’의 존재다. 이 깨달음은 인간에게 거울을 비춘다. 우리도 타자와 사랑과 나눔 안에서만 진정한 ‘나’로 존재할 수 있음을.


삼위일체를 묵상하며 또 하나 떠오르는 깨달음은 개체적 자아가 스스로 충만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성부는 성자를 낳고, 성자는 성령을 통해 성부께 자신을 봉헌한다. 이 흐름은 ‘자기 비움’(케노시스)의 끊임없는 운동이며, 나눔으로 완성되는 존재의 리듬이다. 내가 나를 움켜쥐면 생명이 메말라가지만, 나를 타자에게 건네줄 때 충만함이 찾아온다. ‘선물로서의 존재’라는 통찰은 삼위일체를 통해 빛난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시라는 사실은 교회가 단순한 제도 조직이 아니라 관계의 공동체, 사랑의 친교여야 하는 이유다. 가톨릭 전례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는 이유다. 모든 신앙과 공동체 삶은 삼위일체 사랑 안에 있어야 한다. 이 사랑은 성별, 인종, 국가, 계급을 넘어서는 초월적 보편성을 품는다.


퀴어 축제 반대집회. 광장의 삼국기. 한겨레신문. 노컷뉴스


가톨릭의 가장 큰 특징은 보편성의 추종에 있다. 보편이라 함은 배타의 반대말이다. 다양함과 있음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넓은 광장이다. 최근 있었던 퀴어축제에 난입하는 개신교 청년들을 연례행사처럼 목도한다. 무엇이 그들의 마음에 '우리끼리'라는 신념을 심어 놓았을까. 한국의 개신교는 왜 이리 변질된 믿음의 증폭기가 되었을까.


예언과 잠언의 말씀을 공유하는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였다. 명분도 이유도 미약하다. 그저 나와 가장 다른 누군가를 지목한 집단의 혐오이자 폭력이다.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 다윗의 별이 나부끼는 서울의 광장이 염려되는 이유다. 무지는 극단의 치우침을 부르기 마련이다. 이쪽저쪽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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