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묵상] 잠언에 대한 여러 생각들
‘꼰대의 언어’로 오해된 책
며칠 전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 옆자리 청년 둘이 나누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잠언은 잘 안 읽게 돼. 너무 꼰대 같잖아. 꼰대 냄새 나서 안 읽어.”
성경 앱을 넘기며 말을 꺼낸 친구에게, 다른 이도 웃으며 동의했다. 그 짧은 말은 툭 던진 농담처럼 지나갔지만, 나에게는 작지 않은 질문을 남겼다. 잠언, 정말 ‘꼰대의 언어’일까. 아니, 그것은 혹시 시대의 피로와 교훈에 대한 냉소가 겹쳐 만든 오독은 아닐까. 우리 시대가 ‘훈계’에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실천되지 않는 도덕과 위선적인 말들이 삶을 감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잠언은 그런 피상적 조언과는 거리가 있다. 이 책은 오히려 반복되고 모호해진 일상 속에서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한 매우 명확하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럼에도 짧은 문장 속에 담긴 교훈들이 마치 비좁은 골목의 간판처럼 다닥다닥 몰려와, 자칫하면 숨 막히게 느껴질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심히 지나쳐버리기엔, 이 책이 품고 있는 힘은 의외로 강하고 깊다. 잠언은 단지 ‘훈계’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꿰뚫는 바늘이며, 우리가 잊고 지내는 삶의 주름을 바르게 펴주는 지혜의 손길이다.
‘미슐레’라는 말의 깊이: 비유로 꿰매는 말들
‘잠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미슐레(משלי)'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마샬(mashal)'이라는 말로 영어에 남아 있는데, 잠언의 영어 표기 Proverbs라는 말보다 깊다. 이는 단순한 격언이나 경구를 뜻하지 않는다. 잠언은 ‘비유’, 혹은 ‘비틀어 비추는 말’이다. 한 방향으로만 보는 눈을 부드럽게 틀어 주고, 익숙한 일상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각성제다. 비유, 유추, 비교를 통해 본질을 꿰뚫는 짧고 응축된 언어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단문이지만 그 안에는 삶의 구조를 해석하는 렌즈가 들어 있는 문장들이다.
한자어 ‘잠언(箴言)’이 ‘바늘 잠(箴)’을 쓰는 것도 흥미롭다. 찌르는 듯한 말,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말이다. 이 책은 삶을 무기력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긋난 태도와 방향을 다시 꿰매려는 바늘 같은 지혜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삶을 무디게 살아가던 자들에게 바늘처럼 따끔한 충격을 주는 문장들, 바로 그것이 잠언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를 듣는다.” (잠언 12,15)
이 문장은 도덕 교과서의 말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욕망, 관계의 균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고대의 깊은 통찰이다. 이 책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자주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지, 어떻게 무의식 중에 타인을 해치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지를 고발한다. 그러니 잠언을 ‘꼰대의 언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책은 인간의 숨겨진 교만과 나태, 무지의 민낯을 바늘처럼 꿰뚫고, 우리가 진정 붙들어야 할 지혜가 무엇인지 다시금 되묻는 시적 진실의 언어다.
케투빔 속의 지혜, 일상의 윤리로 스며들다
잠언은 유대 경전 가운데 ‘케투빔(Ketuvim, 성문서)’에 속한다. 이는 모세오경(토라)과 예언서(네비임) 다음의 셋째 권역이다. 케투빔은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시적인 책들이 모여 있다. 시편, 욥기, 전도서, 아가, 다니엘, 에스라... 그리고 잠언. 흔히 지혜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묶이지만, 이 책들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기록이자 내면의 전장(戰場)이다. 잠언은 그 한복판에서 말한다.
모세오경과 예언서가 공동체의 집단 기억과 계시의 역사라면, 케투빔은 개인의 일상 속 신앙과 실천을 담아낸 삶의 문학이다. 이 영역에는 다양한 문체와 주제를 가진 책들이 포함되는데, 잠언은 그 중심에서 삶의 선택과 결과, 말과 침묵, 태도와 책임에 대해 직설적으로 묻는다. 잠언은 어떤 ‘세계관’이나 사변적 이론을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부모가 자식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말하듯 직접적인 어투로 삶의 본질을 조곤조곤 짚는다. 가르침의 목표는 단순히 도덕적 이상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일상의 기준을 세운다.
잠언은 선택의 책이다. 의인과 악인의 길, 게으름과 부지런함, 진실과 거짓, 교만과 겸손. 각각의 길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결과는 결국 삶의 열매로 드러난다. 이 고전적인 이분법은 단순한 흑백논리를 넘어서, 우리가 끊임없이 묻고 또 망설이는 선택의 현실을 반영한다. “의인의 입술은 많은 사람을 먹이지만, 미련한 자는 마음이 모자라 죽는다.” 여기엔 단순한 훈계가 아니라, 삶의 패턴과 방향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담겨 있다. 잠언은 윤리적 길항과 그 결과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며, 독자가 자기 삶의 윤곽을 다시 그리도록 요구한다.
잠언은 추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무도 구체적이다. 부지런함의 가치, 불의한 재물의 덧없음, 가정의 질서와 부모 공경, 자녀 교육, 배우자 선택… 이 모든 것이 잠언의 주제다. 그러나 이 실천적 조언들이 단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만 유효했던가? 아니다. 그것들은 오늘날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쉰다. 플랫폼 노동과 초연결 사회 속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무기력과 방향 상실 앞에서, 잠언의 한 문장은 고요한 나침반처럼 다가온다.
잠언은 누구에게 말하는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업신여긴다.” (잠언 1,7)
경외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인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다. 이것이 지혜의 출발점이다. 이 말은 겸손을 전제한다. 어떤 자만도 이 문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지혜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외'는 두려움 이상의 감정이다. 그것은 자신이 알 수 없는 것, 제어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자신을 작게 만드는 자세이다. 겸허하고 조용하게,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그것이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시작이다.
잠언은 특정 종교인이나 신앙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책의 청중은 누구든 “삶을 똑바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청년에게는 방향을, 어른에게는 검토를, 공동체에는 기준을 준다. 그래서 잠언은 ‘경건한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이다.
예컨대 말의 무게에 대한 성찰은 반복해서 등장한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신뢰를 무너뜨리고, 성실한 한마디가 공동체를 회복시킬 수 있음을 거듭 상기시킨다. 이는 도덕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윤리의 핵심이다. 말이 곧 태도이고, 태도가 곧 사람이다. 잠언은 이를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자 규범으로 다룬다.
찌름과 꿰맴: 잠언이 지닌 교정의 에토스
잠언은 한없이 현실적이다. 게으름은 가난으로 이어지고, 탐욕은 패망을 부른다. 불의한 이익은 바람처럼 사라지며, 자녀 교육은 한 세대를 결정짓는다. 부모에 대한 태도, 배우자 선택, 재물의 사용, 이웃에 대한 태도—이 모두가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 모든 구절은 삶의 구체적인 단면에 스며 있다. 단지 종교적 도그마가 아니라, 마치 생활인의 문장처럼 다가온다.
잠언의 말들이 때로는 따갑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따가움은 모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질책이 아니라 꿰맴이며, 징벌이 아니라 방향 제시다. 바늘은 살을 찌를 수 있지만, 동시에 상처를 꿰매는 도구이기도 하다. 잠언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수없이 놓치는 분별력, 절제, 관계, 정의감 같은 내적 감각을 다시 세우기 위한 도구다.
이 책은 실천 없는 신앙을 단호히 경계하고, 교만과 자기기만, 무관심에 대해 조용하지만 확실한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 이의 제기는 설교나 명령이 아니라, 아주 짧고 단정한 문장 하나로 완성된다. 마치, “너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는 한 마디처럼. 잠언은 오래된 언어지만, 낡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되묻고,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며, 공동체와 관계를 다시 연결하자고 권한다.
잠언을 읽는 일은, 내 삶이 지금 어떤 윤곽을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말들 중 하나가 어느 날 불쑥 나를 찌른다면, 그것은 찌르기 위한 바늘이 아니라 꿰매기 위한 바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