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으로 다시 걷다 –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 (교황 주일)

by 박 스테파노

이름, 그 첫 번째 전환과 충돌,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선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시몬 바르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은—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그 이름은 단단한 돌을 뜻하지만, 돌처럼 흔들림 없는 이가 아닌, 바람 앞에 금세 휘청이는 시몬에게 건네진 이름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물 위를 걷다가도 바람 앞에 빠져버리고, 눈물을 쏟으며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불꽃같은 순간에 세 번씩 부인하고 마는 사람. 누구보다 쉽게 흔들리고, 누구보다 쉽게 울먹이는 사람.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반석’이라 부르신다.


반석은 무결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충실함, 흔들리면서도 끝내 꺾이지 않는 사랑, 실패 속에서도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회심, 그것이야말로 주님이 교회의 기초로 삼으신 진짜 반석의 얼굴이었다. 무오류가 아니라, 용서받은 자의 굳셈이었다. 하느님은 완벽한 사람을 기초 삼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장 크게 무너진 사람을 통해 새 기초를 놓으셨다.


베드로를 부르심. Domenico Ghirlandaio, Calling of the Apostles,1481 , Cappella Sistina, Vatican


사울도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지키며 담대했던 사람. 스스로의 의로움에 확신에 차, 길 위에서 사람들을 결박하고 끌어가던 사람.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빛 앞에 쓰러지고, 눈이 멀고, 눈을 다시 뜬다. 그의 삶을 갈라놓는 그 목소리.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는 단지 회개의 시작이 아니라, 방향의 전복이었다. 그는 바오로가 된다. 작아짐의 이름.


작다는 뜻의 바오로라는 이름 안에서, 그는 더 이상 중심에 서지 않고, 복음이라는 더 크고 깊은 음성에 자신의 울림을 포기한다. 복음은 이방으로 흐른다. 전통의 성역은 무너지며, 율법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 경계에서 바오로는 들으며 말하고, 묶지 않고 흐르게 한다. 유다인의 혈통과 전통 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제 누구에게도 복음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증언하는 이가 된다.


성 바오로의 개종 (1601),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카라바조


하나는 제도 위에 있었고, 하나는 선교 위에 있었으며, 하나는 중심을 지키고, 다른 하나는 경계를 넘는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하나의 길 위에 찍힌 다른 두 발자국이었다. 사도는 둘이지만, 교회는 하나. 그들은 서로를 피해 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부딪히며 만났다.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에서. 갈라티아서에 기록된 안티오키아 사건은 간단치 않다.


“나는 그의 면전에서 맞서 따졌다. 그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했다.”


바오로는 베드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베드로가, 유다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물러섰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은 복음의 진실을 흐리게 했다. 바오로는 단호하다. 교회 안의 권위는 복음의 진리 앞에서 시험받는다. 무오류란 이름으로 묵인하지 않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침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비판은 단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일치는 무균질한 조화에서 오지 않는다. 충돌 속에서 피어나는 이해, 대립 안에서 얻어지는 일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내 베드로는 입을 연다.


“그들도 우리처럼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이는 바오로의 신학이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이 된다. 복음은 같은 입으로 다른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차이는 거룩한 풍요이고, 교회는 동일성이 아니라, 회심한 자들의 느슨한 동행으로 피어나는 유기체다.


오늘날 가톨릭이 베드로를, 개신교가 바오로를 중심에 두려는 경향은 어쩌면 그 충돌이 남긴 흔적의 굴곡일지 모른다. 하나는 제도와 전승의 중심을 지키고자 하며, 다른 하나는 말씀과 양심의 자유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것도 배척할 수 없다. 베드로 없는 바오로는 뿌리를 잃고, 바오로 없는 베드로는 날개를 잃는다. 뿌리와 날개는 함께 있어야 한다. 충돌은 배반이 아니라 성장이고, 서로 다른 이름은 진리를 위한 깊이와 너비다. 교회는 베드로의 손끝에서 출발하지만, 바오로의 발걸음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간다. 복음의 깊이란, 이 둘 사이의 긴장과 화해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그 두 이름을 다시 부른다. 흔들렸던 반석과 무너졌던 박해자의 이름을. 주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하셨고, 마침내 로마에서 함께 순교하게 하셨다. 피 흘림은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위한 증언이었다. 둘의 죽음 위에 세워진 교회는 오늘도 여전히 그 이름 안에 있다.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 무너지되 버림받지 않은 사람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복음을 품은 이들이 함께 엮이는 느슨하고 단단한 공동체. 교회란, 그런 이름을 매일 새로이 부르는 곳이다.


Saints Peter and Paul | Giovan Battista Crespi | 1628



로마, 그 둘의 끝이자 시작


전승에 따르면, 그 둘은 로마에서 각기 다른 죽음을 맞았다. 바오로는 시민권자였기에 참수형을 받았고,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택했으나, 주님처럼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리기를 청했다. 한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의 마지막 겸손. 그 피가 바티칸 언덕 아래 스며들었고, 그 위에 성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졌다. 바오로는 오스티아 가도 끝자락, 세 샘이 솟았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고, 그 위에 성 바오로 대성전이 세워졌다. 두 성전 사이의 거리는 단지 로마의 지리적 간극일 뿐, 복음은 그 틈을 넘어 그들의 여정을 하나로 엮는다. 순례자들은 두 대성전을 잇는 길을 걷는다. 물리적 거리를 순례하며, 신앙의 내적 긴장을 되새긴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교회는 그들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순교는 말을 잃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온전한 발언이었고, 피 흘림은 가장 심오한 언어였다. 칼과 십자가는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더욱 강한 증언이 되었고, 말보다 깊은 설득이 되었다. 교회는 바로 그 설득 위에, 죽은 자들이 남긴 삶의 무게 위에 세워졌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벤투라 살림베니, 1604년


사람들은 물었다. 왜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는가. 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는가. 왜 로마의 제도와 법에 맞서야만 했는가.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되묻는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 위에 서야 하는가. 권위와 전통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순명의 자유와 사랑의 고통 위에 서 있는가. 때로 교회는 권력과 손을 잡았고, 때로는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처음 교회는, 권력을 거스른 자들의 피 위에서 자라났다. 박해의 질서 아래에서, 약함의 신앙으로 태어났다.


로마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제국의 심장이었던 이 도시는, 법과 무력, 질서와 명분이 정당화되는 공간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복음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 약함은 질서에 균열을 냈고, 권력의 위선을 드러냈으며, 결국 그 중심을 뒤흔들었다. 교회는 그렇게 태어났다. 무너뜨림으로 세워졌고, 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죽음은 시작이었고, 약함은 힘이 되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로마에서 죽었으나, 그들은 그곳에서 살아 있다. 순교는 끝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다. 교회는 여전히 그 피 위에 세워지고, 그들의 침묵 속 고백을 기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교회는 권위가 아니라 순교, 제도가 아니라 사랑, 교리가 아니라 생명을 내어준 사람들의 삶 위에 그 존재의 무게를 얹는다.


6월 29일, 교회는 그 둘의 이름을 함께 부른다. 베드로와 바오로. 교회는 둘의 이름에서 하나가 된다. 교회는 단일하지 않다. 오히려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이 두 사람의 긴장과 충돌, 순명의 양태와 자유의 결들이 교회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베드로의 제도성과 바오로의 선포성, 체제의 지속성과 복음의 급진성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교회의 숨결을 이루는 두 날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묻는다. 지금 우리가 세우고 있는 교회는, 과연 누구의 이름 위에 서 있는가. 누구의 피를 기억하며, 누구의 침묵을 경청하고 있는가.


사도 바오로의 참수 순교. 마티아 프레티. 1661. 미국 휴스턴



순교 이후의 교회, 그 울림 – 다시 세워야 할 교회


베드로는 끝내 흔들렸다. 바오로는 끝내 작아졌다. 그 끝에서 복음은 비로소 교회를 품었다. 그들은 무너지며 교회를 세웠고, 낮아지며 복음을 높였다. 이름은 불린다.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오로로. 그 이름이 사명이 될 때, 교회는 다시 태어난다. 이름이 부름이 되고, 부름이 다시 길이 될 때, 그 길 위에서 교회는 자란다.


오늘도 교회는 순교당해야 한다. 특권의 이름이 아니라, 복음 때문이어야 한다. 권위의 울타리가 아니라, 사랑의 밀물이어야 한다. 제도라는 명분으로 자신을 지키는 교회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내어주는 교회. 우리는 어떤 베드로로 살고 있는가. 어떤 바오로로 길을 걷고 있는가.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디에 서 있는가. 혹여, 제도의 단단함 안에 복음의 떨림을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말로만 계승을 말하며 그 삶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제대와 천개. '너는 베드로다'라고 쓰여진 돔 내부. 나무위키


교회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교리의 무게인가, 직무의 계보인가. 아니면, 눈물과 피, 순명의 자취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한 증언들인가. 복음을 말하는 것과, 복음으로 사는 것 사이의 깊은 간극. 우리는 지금,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서 있는가.


그들의 무덤 위에 세워진 두 성전.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며, 교회의 사도적 기원을 회상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억은 그 건물의 돔 아래가 아니라, 그 지하 깊숙이 스며든 피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 피는 기억이 아니라 생명의 증거였다. 지금의 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과연 그 피인가. 아니면 우리는 이미 기억을 풍경으로 만들고, 사도를 전설로 바꾼 채, 화려한 전시만을 반복하고 있는가.


교회는 매일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시몬에서 베드로로, 사울에서 바오로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사람만이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너무 익숙해져서 더는 떨림이 없는 이름, 너무 안전해서 질문조차 사라진 이름은, 이미 부르심의 자리에서 멀어진 이름이다. 오늘 우리가 받은 이름은 무엇인가. 고정된 신분인가, 아니면 날마다 부서지는 은총인가.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대성당 앞에 세워진 성 바오로의 성상은 지물인 책과 칼을 들었다. 나무위키


이름은 다시 불릴 때 살아난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교회의 이름으로 다시 불리는 이 날, 우리도 다시 불릴 수 있기를. 우리의 믿음이 흔들렸던 밤들을 베드로는 기억한다. 사랑보다 자리를 택했던 순간들을 그는 안다. 복음보다 논리를 따랐던 우리를 바오로는 이미 지나왔다. 말보다 칼을 믿었던 날들, 회심이 더뎠던 시간들, 믿음이 말로만 존재하던 날들을 그는 이미 견뎠다.


그러니 그들처럼 우리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죽음을 넘어, 실패를 지나, 용서와 부르심이 만나는 지점에서. 교회는 아직 피 위에 살아 있고, 그 이름으로 다시 걷고 있으며, 그 복음으로 여전히 살아난다.


그 이름으로, 다시 걷는다. 그 피 위에, 다시 세운다. 그 복음으로, 다시 살아난다. 교회는, 그 둘의 이름을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매번, 그 이름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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