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묵상― ‘방랑’에 대한 묵상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성좌(星座)와 같다. 우리가 사는 장소, 우리가 지닌 이름은 잊혀도 무방한, 아무 의미 없는 귀속의 수단일 뿐이다.”
- <방랑자들> -
2018년 노벨 문학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 문장을 곱씹을수록, 나는 내 발밑이 땅이 아니라 떠도는 별빛처럼 느껴진다. 정박하지 못하는 의식, 정주하지 않는 존재.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이름에서 떠나는 일, 주소를 지우는 일, 내가 누구인지 명명해 온 좌표들에서 이탈하는 일이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귀속의 이름에서 비켜서는 고독한 윤리다.
나는 지난 짧은 해 동안 이리 저리 옮겨 실었던 날들을 정리해 보며, 내 삶의 또 하나의 장면을 접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공간, 그러나 나에게는 수십 개의 밤과 체온이 녹아 있었던 자리. 무겁고 누추한 짐들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 짐보다 무거운 건, 다시 한 번 나를 낯선 곳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방랑은 언제나 나를 실존의 질문 앞에 세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물리적 거처의 이동은 결국 정신적 거주의 해체를 동반한다. 익숙함의 언어가 지워질 때,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낯설어진다.
‘방랑(放浪)’이라는 한자를 들여다본다. 놓을 ‘放’, 물결 ‘浪’. ‘물결을 놓는다’는 말은 물리학적으로도 흥미롭다. 물결은 항상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흐른다. 중력에 저항하지 못한 결과라기보다는, 에너지가 최소 상태로 수렴하고자 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는 종종 이것을 ‘내리막’이라 표현하지만, 실은 모든 흐름이 그 안에 고유의 자유를 품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처럼, 인간은 ‘전략적 게으름뱅이’일지도 모른다. 가능한 한 저항하지 않고, 가장 적은 에너지로 움직이는 길을 택한다. 하지만 방랑자는 다르다. 그는 거시적으로는 자연의 흐름을 따르지만, 미시적으로는 언제나 비예측적인 경로를 택한다.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미묘하게 각도 틀어진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바로 그 어긋남이 방랑의 본질이다.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선, 면, 구체들,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토카르추크의 말은 방랑자의 시선을 정확히 꿰뚫는다. 그는 전체를 보지 않는다. 볼 수도 없다. 항상 길 위에 있는 자는 풍경의 조각, 표정의 단면, 사건의 절단면만을 목격한다. 그의 삶은 직선이 아니라 조각난 도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방랑자는 ‘지속’보다는 ‘순간’에 산다. 연속성이 지워진 자리에 일시적인 배열만이 남는다. 철학자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 지속(durée pure)’이 사라진 자리에서, 삶은 일회적인 감각들의 연속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파편적 시선만이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전체란 언제나 권력의 산물이다. 중심이 설정되어야 주변이 생기고, 기원이 정해져야 역사가 만들어진다. 방랑자는 그 권력을 거부한다. 그는 서사의 중심에서 이탈한 자, 기억의 주변부에서 침묵하는 자다.
서양 철학은 오래도록 ‘앎’의 철학이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방랑자는 말한다.
“나는 흐른다, 고로 존재한다.”
고정된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매 순간 재구성되는 의식의 흐름. 장자(莊子)의 사유에서 ‘나비의 꿈’처럼,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바뀌는 상태의 총합이다. 방랑자는 자신이 흘러간 자리에 남긴 감각들, 흔적들, 관계들 속에서만 존재를 증명한다. 방랑이란 결국 존재의 양태를 바꾸는 일이다. 고정된 중심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가장자리를 받아들이는 일.
방랑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고독의 대가를 요구한다. 매번 짐을 싸고, 낯선 문을 열고, 익숙해지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방랑도 선택이지 않느냐”고. 그러나 방랑은 때때로 선택이 아닌 감당이다. 제 자리에 설 수 없는 몸, 머무를 수 없는 처지, 혹은 스스로를 밀어내야만 살아지는 영혼.
내 방랑에는 아직 다다름이 없다. 하지만 그 다다르지 못함 속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당장의 안식을 주지 못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이 흐름을 바라보며 함께 물결을 읽어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방랑자는 언제나 자기를 버리고 떠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을 찾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작은 짐 하나를 꾸리며, 내 안의 파편들을 어루만진다. 그 파편들이 언젠가 하나의 성좌로 다시 연결되기를, 아무도 보지 못한 이름으로 빛나기를, 조용히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