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이라는 타자화- 그저 길을 멈추고 손을 내밀다

연중 묵상 : 사마리아인의 비유

by 박 스테파노

한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을 보고도, 사제와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간다. 그들에겐 율법이 있었고, 직분이 있었고, 공동체의 규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가엾은 마음이 없었다. 복음은 단호하게 말한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날 이방인, 배척받은 자, 율법의 밖에 있던 이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되었고, 종교의 중심에 있었던 자들은 방관자가 되었다.


복음의 이 짧은 서사에는 단순한 선행 이야기를 넘어서는 전복적 윤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수동적 질문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라는 능동적 물음이며, 경계의 바깥에서 출발하는 윤리, 제도적 정의가 아닌 감각의 윤리를 요청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윤리는,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오늘의 현실, 가자지구의 잿더미 위, 보도사진 속 흙먼지를 뒤집어쓴 아이들의 얼굴, 혹은 지하철역 계단에 앉은 노인의 눈빛 앞에서 다시 되묻는다.


“너는 누구의 이웃인가?”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1890),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한 사람이 멈추었고, 길은 달라졌다


누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예수의 물음은 단순한 도덕적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경계를 묻고, 사회적 위계의 균열을 들추며, 공동체를 이루는 상상의 윤리적 기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정치적 질문이다.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 상처 입은 자의 곁을 지켰을 때, 복음은 이미 하나의 도식이나 미덕의 서사를 넘어선다.


그가 사마리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먼저 강조되는 것은 그의 감각이다. 그는 그를 보았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모든 제도적 윤리를 무화시키는 감각의 윤리가 응축돼 있다. 공감 이전의 감각, 동일시 이전의 응시, 이데올로기 이전의 생명적 직관이 먼저 움직인다. 자비는 도덕이 아니라 감각이다. 그것은 제도를 뚫고 나온다. 경계 너머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듣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그를 '착한 사마리아인'이라 부를까. 착하다는 수식은 무심코 던지는 찬사의 말이지만, 사실 그 안엔 이중의 구조가 숨어 있다. 곧, 사마리아인은 원래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무의식적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가 '착한 무슬림', '성실한 흑인', '겸손한 동성애자'라고 말할 때, 그 수식어는 타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깔고 그 위에 예외를 붙이는 방식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명명은 결국 사마리아인을 타자화하고, 그 타자의 내부에서 다시 '우리와 같은' 예외를 찾아내는 구조를 지닌다. 예수의 이야기가 하려는 바는, 타자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자에게 이웃이 되는 전복의 윤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언어는 그 윤리를 다시 제도화하고, 통제 가능한 모범으로 환원한다. 착하다는 말은 결국 길들이는 말이다.


현재 사마리아인은 현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나블루스(Nablus) 근처에 750명 정도 남았다. 모세5경 토라만 믿고, 그리짐산을 성소로 섬긴다. 나무위키


복음은 말한다. 자비를 베푼 이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주체가 바뀐다.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은,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소극적 정의를 넘어서,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라는 능동적 실천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웃은 만남의 결과이지 선험적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다. 같은 민족, 같은 종교, 같은 정치적 진영에 속한다고 해서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율법 밖에 있는 타자가 이웃이 되는 사건을 통해 공동체의 윤리적 기초가 해체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사마리아인이 이웃이 된다는 것은, 이웃이란 범주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어떻게'는 감각과 실천의 윤리에서 발생한다.



착한이라는 말이 감춘 것들- 타자화의 윤리


이 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응시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학살, 학교와 병원이 연달아 파괴되고, 아이들이 잿더미 속에 쓰러지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이웃이 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폭력은 더 이상 안보와 생존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설계된 학살이며, 국제법과 인권을 무력화시키는 냉혹한 지배의 서사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앞에서 침묵하거나, 양비론을 말하며, 사태를 하나의 대칭적인 충돌로 환원하려 한다.


이때 복음은 우리를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피해자에게, 혹은 침묵으로 가해자를 돕는 구조에 동조하며,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타자의 고통을 보는 감각, 그 감각을 따라 행동하는 용기, 그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이웃됨의 윤리이다. 우리는 지금,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서기를 주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타자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너는 나와 다르다’,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선언이다. 그 말은 흔히 말보다 먼저 시선으로, 손짓으로, 거리감으로 주어진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불결한 혼혈이라 여겼고, 율법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이단자로 여겼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리짐 산에서 예배드리는 배교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한 존재로 타자화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쓰러진 자를 보고 지나쳐 간다. 타자화는 곧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는 구조와 맞닿아 있다. 그들은 보았으되, 느끼지 않았고, 느끼지 않았기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황폐해진 가자지구의 모습. 출처: MBC뉴스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가자지구의 민간인 학살, 분리장벽과 점령, 물과 전기를 끊는 행위, 아이들을 덮친 공습과 병원마저도 폭격당하는 현실. 이 광경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와 레위인이 되어 스크린을 피하여 지나가고 있는가? 타자화는 곧 침묵의 이름이며, 침묵은 다시, 지나침의 윤리를 낳는다.


오늘날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그는 국경을 넘는 난민일 수도 있고,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일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가 편견 속에 살아가는 이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제도 밖에 존재하고, 통계 속에서 지워지며, 담론의 대상이 되지만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사마리아인을 경계한다. 그들을 '위험한 존재', '다른 문화', '낯선 종교'로 간주하며, 타자화한다. 그 속에서 복음은, 우리의 언어를 낯설게 하고, 우리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질문을 던진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명명은 결국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드러낸다. 타자는 예외적으로만 수용되고, 그 예외는 곧 '우리화'된 타자일 때만 받아들여진다. 이는 다문화주의의 언어에도 스며든 허위다. 타자의 정체성은 존중받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동일성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조정된다.



이웃의 얼굴은 타자의 목소리로 온다


오늘 우리는 '이웃'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빠르게 잊는다. 정치와 종교, 문화와 담론은 이웃을 분류하고, 이웃됨을 조건화한다. 그러나 복음은 조건을 파괴한다. 누가 이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대답은 신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감정의 정치학이 어떻게 윤리를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타자의 고통을 감각하는 능력, 그 감각을 따라 경계를 넘는 용기,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급진적인 종교적 행위이다.


예수의 이야기가 급진적인 것은, 바로 이 동일성의 기준을 붕괴시키는 데 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틀린 존재'였고, 심지어는 이단이었으며, 민족적 정체성의 적대자였다. 그러나 그가 행한 자비는, 경계와 배제를 무화시켰다. 그 감정과 실천은 모든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윤리였다. 예수는 그를 칭송하거나 '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오직 그가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것, 그것이야말로 복음이 드러내는 역설적 진실이다.


착하다는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 말은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복음이 열어젖힌 존재의 낯섦과 마주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그는 나의 이웃인가. 나는 그의 이웃인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일 뿐인 그를, 우리는 어떤 언어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순간, 나 역시 누구의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복음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흔들며, 그 물음을 남긴다. 누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Sora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끝내 우리에게 한 문장을 남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것은 단지 선행을 권하는 말이 아니다. 이 문장은 우리 안에 내장된 타자화의 구조를 무너뜨리라는 요청이며, 인식과 언어, 시선과 거리의 모든 경계를 넘어 이웃됨의 실천을 감각하라는 소환이다. 복음은 오늘도, 뉴스 속에서, 고요한 기도 속에서, 도심의 벤치에서, 국경선 너머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의 이웃인가?”

“너는 누구를 지나쳤는가?”

“그리고 너는 어떤 언어로, 누구를 불러왔는가?”


이 물음 앞에서, 침묵도 지나침도 다시 선택이 될 수 없다. 복음은 말한다.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그것이 시작이었다고.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말은 하나뿐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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