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함과 고요 사이, 그리고 그 너머― 마르타와 마리아

연중 묵상: 이항대립 이후의 이야기

by 박 스테파노

1. 어느 방문, 두 자매의 태도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사는 마을에 이르신다. 언니 마르타는 예수님을 기쁘게 집으로 모셔들이고, 분주히 손님맞이 준비에 나선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조용히 머문다. 일손을 거들지 않는 마리아가 못마땅했던 마르타는 예수께 하소연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못 본 체하십니까?” 예수께서는 다정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 그 몫은 그녀에게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38–42)


이 짧지만 자주 인용되는 복음 장면은 오랫동안 교회 전통 안에서 행동과 관상, 외적 봉사와 내적 기도, 세속과 성스러움이라는 대조적인 두 범주―이른바 이항 대립의 구조 속에서 읽혀왔다.


‘이항 대립(binary opposition)’은 문학이론과 구조주의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한 쌍의 대조되는 요소를 통해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주로 ‘빛과 어둠’, ‘남성과 여성’, ‘주체와 객체’, ‘말과 침묵’처럼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중심에 놓이거나 우위를 점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이는 의미를 명확히 구분짓는 데 유용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단순화하고 고정된 틀로 이해하게 만드는 한계를 지닌다.


마르타와 마리아도 그러하다. 전통적인 해석 속에서 마르타는 손과 발로 움직이는 ‘행동’의 인물이며, 마리아는 하느님 앞에 앉아 있는 ‘관상'의 상징으로 나뉘어 읽혀왔다. 교부들에서 중세 영성가들, 현대의 설교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마리아의 태도를 배우고 따르라는 권면을 받아왔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말씀의 침묵 속에 귀를 기울이라는 삶의 방식.


1618년 작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예수’. 벨라스케스. 가톨릭신문


하지만 이런 해석도 시대와 함께 다시 물어야 한다. 변화와 해체의 감각이 일상이 된 오늘, 이 장면은 여전히 유효한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정형화된 구도보다는, 겹치고 흐릿해지는 경계들, 대립보다는 얽힘의 구조를 요구한다. 행동과 관상은 정말 나눌 수 있는가. 마르타는 사랑 없이 움직였는가. 마리아는 고요 속에서만 머물렀는가.


전통은 언제나 되풀이 속에서 살아남고, 반복 속에서 재해석된다. 그러므로 이 복음 장면 역시 더 이상 고정된 ‘정전’으로 남을 수 없다. 그 안에서 우리는 오늘을 사는 또 다른 질문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에 서 있는가. 그리고 그 자리는 고정되어 있는가, 흔들리고 있는가.



2. 해체되는 경계, 흔들리는 중심


“마르타/마리아”라는 구도는 너무도 선명하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스럽다. 하나의 대립항들이 이처럼 깔끔하게 분리되어 의미를 구성한다는 생각 자체가,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 자크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그 안에 감춰진 내적 불일치를 억누른 채 작동하는 권력의 구조일 수 있다. 이항 대립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언제나 한 쪽은 중심이 되고, 다른 쪽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중심은 주변을 규정하고 선별하며, 의미의 흐름을 통제한다. 그렇게 중심은 스스로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타자를 구성하고, 동시에 배제한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구도도 이 원리를 따른다. 마리아는 ‘더 나은 몫’을 택한 이로, 마르타는 ‘여전히 해야 할 일에 갇힌’ 존재로 남는다. 그러나 정말로 중심은 누구인가? 예수의 말에서 중심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 선호는 고정되지 않은 듯 보인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이 선언은 마치 판결처럼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기준의 유동성이 숨어 있다. 오늘은 마리아의 자리가 빛나지만, 내일은 마르타의 손이 더 절실할 수 있다. 예수의 언어는 이항 대립을 빌려오되, 그 경계를 고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심의 미끄러짐, 기준의 임시성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자크 데리다는 이를 ‘차연(différance)’이라 불렀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으며, 언제나 미뤄지고, 다른 것과의 차이 속에서만 존재를 드러낸다. 마르타가 붙잡고 있는 당위―환대와 봉사의 책임―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녀가 내면화한 질서가 부여한 동일성이다. 그녀의 불편한 감정은 예수가 그 기준을 인정하지 않을 때 드러난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이 감정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예감에서 비롯된 내면의 동요, 불안의 언어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나무위키


마르타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그 자리는, 예수의 한마디 말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그녀의 동일성은 완결된 정체성이 아니다. 예수의 시선은 그녀의 자리와 그 경계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흔든다. 그 흔들림은 마르타에게 상처이자 구원이다. 정체성의 균열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시 자신에게 귀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3. 분주한 사랑과 침묵의 사랑 사이


이 복음 장면은 익숙한 일상 속 삶의 경계를 비춘다. 손을 놀려야 하는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누군가는 밥을 짓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실제 삶은 그렇게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마르타처럼 바쁘게 움직이며 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마리아처럼 머물고 싶어한다. 혹은 마리아처럼 고요히 있고 싶지만, 세상의 구조는 다시 우리를 마르타의 분주함 속으로 끌어당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자매 사이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존재의 양식이 우리 한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존재 안에서 ‘마르타적인 태도’와 ‘마리아적인 태도’는 서로를 견디고, 때로는 충돌하며, 또 때로는 마주 앉아 조용히 숨을 나눈다. 마르타는 마리아가 될 수 있고, 마리아도 다시 마르타로 돌아올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동일성의 불안정한 안정, 혹은 질 들뢰즈가 말한 ‘차이의 리좀적 분화’다. 리좀은 중심이 없이 사방으로 퍼지며 자라는 뿌리다. 주체는 하나의 고정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흩어지고 연결되며 변형된다. ‘선택’이란 단호한 결단이 아니라, 그러한 움직임의 흔적이며 그때그때 응답하는 방식이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더 이상 서로를 규정하는 타자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이루는 관계, 우리 내면에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드러나는 서로 다른 존재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어느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 수 없고, 한 번의 결단으로 정주할 수도 없다.


<마르타와 마리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 1632~1675


예수의 “좋은 몫”이라는 말은 그래서 ‘누가 옳은가’를 판가름하는 평가가 아니다. 그것은 그 순간 깨어 있는 사람, 말씀 앞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이 선 자리에 진실하게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르타든 마리아든,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자각, 그리고 그 자각을 통해 피어나는 사랑의 방식이다.



4. 관상과 실천, 고정되지 않는 유기적 관계


영성의 역사 속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오랫동안 ‘활동과 관상’의 이중성으로 이해되어 왔다. 고대의 교부들에서 중세의 영성가들, 성녀 데레사와 성 베네딕도에 이르기까지, 두 자매는 단순히 대비되는 인물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린 길, 두 날개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는 영적 긴장의 구조로 제시되어 왔다. 이 직관은 구조주의의 대립 구도는 물론, 해체 이후의 유동적 사유 구조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고정된 역할이나 도식화된 이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마르타적인 삶’과 ‘마리아적인 삶’은 분리된 정체성이 아니라, 한 존재 안에서 서로를 향해 흐르고 미끄러지는 역동적 움직임이어야 한다. 관상은 실천 없이 공허해지고, 실천은 관상 없이 방향을 잃는다. 영혼과 몸은 서로를 통과하며 살아가며, 행위는 언제나 내면의 심지를 태우고, 고요는 결국 어떤 손짓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오늘의 마르타가 어제는 마리아였을 수 있고, 내일은 또 그 자리가 뒤바뀔 수도 있다. 이 유기적 이동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응답하는 존재로서 형성된다. 실천 없는 관상은 삶에서 떠 있고, 관상 없는 실천은 자신을 잃는다. 마르타는 외부의 요구에 자신을 다 내어주지만, 내면의 숨결이 점점 옅어질 수 있다. 마리아는 영혼을 맑히지만, 결국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그 맑음은 세상과 만날 길을 잃는다.


실천없는 기도에는 응답이 있을 수 없다. Sora


신앙은 언제나 그 두 리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일, 곧 긴장 속을 걸어가는 춤이다. 분명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움직임,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응답성, 그리고 내면 깊숙이 울리는 말씀의 진동에 자기를 여는 감수성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할이 아니라 ‘태도’다. 마르타의 문제가 된 것은 봉사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이 자신을 정당화하고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순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비교와 기대의 이름으로 바뀐다. 예수의 말은 마르타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분주함 뒤에 숨은 내면의 불안을 부드럽게 건드린다.


하느님 앞에서의 선택은 ‘더 좋은 몫’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에서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가, 말씀 앞에 얼마나 솔직하게 열려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좋은 몫’은 타인을 이기기 위한 선점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깨어 있는 사랑의 방식이다. 마르타도, 마리아도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와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주침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흔들림 속에서 머무는 태도임을 배운다.



5. 차이는 축복이 될 수 있는가


들뢰즈는 ‘차이’를 동일성의 결핍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차이를 하나의 능동적 힘, 곧 생성의 조건으로 이해했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흔들리며 그려지는 유동적 선이며, 반복 속에서 어긋남을 낳는 미세한 진동이다. 동일성은 존재를 규정하는 기준이라기보다, 존재가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도록 마련된 일시적 안정, 곧 준안정 상태에 불과하다. 신앙과 삶, 실천과 관상, 마르타와 마리아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구조 속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고정된 역할의 분할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이동하고 교차하는 관계적 운동이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자주 이항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나는 활동을 상징하고, 다른 하나는 관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너무 평면적이다. 존재는 언제나 더 복잡하고, 신앙은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서로를 배제하는 두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한 존재의 내면에서 교차하며 생겨나는 신비이자 긴장이다. 실천은 관상 없이는 방향을 잃고, 관상은 실천 없이는 현실로부터 유리된다. 오늘의 마르타가 내일의 마리아가 될 수 있고, 또다시 그 반대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 변화는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구조이며, 그 차이야말로 하느님과의 만남이 펼쳐지는 살아 있는 지평이다.


신학적으로도 이 관점은 깊은 울림을 가진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동일성을 요구하시기보다, 차이를 통해 부르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음성은 언제나 고유하게 다가오며, 결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마르타의 몸을 빌려 오고, 또 어떤 이에게는 마리아의 침묵 속에서 속삭인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내 안에서도 두 목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동일성의 틀은 이 다양함을 견디지 못하지만, 차이의 신학은 그 다양함을 품는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지 않다.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차이 속에서 다르게 임하고, 그 다름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그 차이는 분열이 아니라, 은총이다.


기도와 실천은 함께.Sora


우리가 마르타를 비난하거나 마리아를 찬양하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주 하나의 동일성 기준을 내세워 타자를 재단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배제하지 않는다. 마르타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리아는 옳았지만, 그녀의 고요도 언젠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상을 향해야 한다.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의 올바른 역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더 깨어 있는 ‘태도’에 관한 물음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응답적인 자리를 찾아야 한다.


신앙이란 하나의 고정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상과 실천 사이, 침묵과 활동 사이, 기다림과 몸짓 사이를 왕래하며 생겨나는 존재의 춤이다. 우리는 그 긴장 속에서 자라나고, 그 사이에서 자주 흔들린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의 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지금 너에게 필요한 ‘하나’는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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