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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28호

지난 어느 날의 비망록

by 박 스테파노

쇠를 씹고 마늘을 삼키던 시절이 있었다

그랬던 위장이 어느 날 조용히 멈추었다

통뼈와 두꺼운 목덜미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니었고 소주 두 짝에도 끄떡없던 밤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는 몰랐다 에너지도 수명을 가진다는 것을

나는 고장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에너지가 고갈된다는 말조차 믿지 않았다

사람은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이고 체력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깎이고 닳아 없어지는 것


어느 날 하얀 응급실 천장이 눈꺼풀 위에 얹히고 어이없음이라는 이름의 침묵이 내 입을 가로막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의 무게를 실감했다

어이없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하얀 불빛을 천장 너머로 밀어냈다

그날 이후 나는 몇 번이고 멈췄고 몇 번이고 다시 돌아왔으며 몇 번이고 도망쳤고 몇 번이고 다시 부름에 응했다

견딤에는 양이 있고 그것은 언제나 조금씩 새어 나간다


나를 필요로 하는 얼굴들 나만을 향해 무너지던 사건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천천히 익고 있다

끓는 냄비 속 개구리가 온도를 감지하지 못하듯 고통은 늘 너무 늦게야 신호를 보낸다

급체 식중독 쇠도 씹던 내 위장은 마늘 한 점에도 등을 돌리고 나는 더 이상 무엇도 삼키지 못한 채 방구석에 눕는다

좁고 낡은 집이 나를 맞는다

나를 눕히고 방구석의 먼지들이 나를 반긴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는 정적이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진다

무너진 것도 병든 것도 아니다 다만 오래된 나사를 조이는 법을 몰랐을 뿐

기계는 정비되지 않으면 삐걱이고 연료는 줄곧 타오르다 스스로를 태운다


철인28호라 불리던 내 이름이 기계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다

기계는 정비되지 않으면 멈추는 법이며 멈춘다고 해서 반드시 고장이 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침묵도 고장일 수 있고 고요도 저항일 수 있다는 것을

몸이 먼저 말해준다 삶은 줄곧 어디가 부러졌는지 모른 채 버티는 마라톤이었고 그 마라톤에서 나는 끝내 포기하지 못한 채 달리기만 했다

라면을 끓이고 울음을 안고 해장을 하던 날들에서 나는 누구의 근육이었고 누구의 연료였던가

남은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묻는 일은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그 물음이 내게 돌아온 지금 나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을 바라본다

철은 녹슬면 물러지지만 한 번 데운 쇠는 다시 무뎌지지 않는다


철인28호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접힌 것이다

스위치를 내리고 관절을 굽히고 어깨를 다독이며 새로운 이름을 기다린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연료가 되지 않아도 좋다

가끔은 방 안의 정적조차 나를 지켜주는 듯하니 그렇게 나의 내장은 조금씩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아직 쓸만하다고


철인28호는 폐기된 이름이 아니다

스스로 스위치를 내린 고요한 존재에 불과하다

나는 이제 이 남은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를 묻는다 다시 끓일 것인가 다시 건널 것인가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금 더 살아남을 것인가

문장이든 온기든 누군가의 숨결이든 다시 한 번 불을 붙이는 일이 가능할까 정해진 답은 없다

다만 위장은 아직 내 편인 듯 천천히 입술 아래로 온기를 보내고 있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중에도 나를 듣고 있다는 그 느린 낡은 대답처럼


승모근이 발달한 이유. S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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