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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을 짓다, 연재 마감 이후

글로 생을 완성하는 오래된 언어

by 박 스테파노

연재를 마쳤다. 열일곱 번째 브런치북을 엮었다. 그중 연재는 아홉 편이었고, 30화를 채우려 했으나 도중에 닫아 버린 연재 편도 있었다. 이번 연재가 조금 더 특별했던 까닭은 '출판'을 목표로 한 두 번째 시도였고, 인문학적 비평서로서는 처음으로 가시적 산출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회당 대략 1만 자, 총 30만 자의 원고를 끝맺었다.


직전 연재였던 『어느날 영화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8월 2일에 시작해 9월 4일에 마무리했다. 나흘 뒤 시작한 이번 연재, 『휴먼테스트: AI는 인간을 꿈꾸는가』는 9월 8일에 시작해 10월 11일에 종결했다. 총 70일 동안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연재를 이어갔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의미는 연재 기일을 비우지 않고 지켰다는 사실이다. 원고는 모두 2주가량 미리 작성해 예약해 두고, 직전일에 마지막 퇴고만 거쳤다. 초·중·고 12년의 개근상이 다시 살아난 듯해 반가웠고, 글쓰기 체력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50filmstar


물론 힘든 구석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현재의 상황과 형편이 불안정해 글쓰기에 전력을 쏟는 일은 여전히 버거웠다. 영화비평은 오래 좋아해 쌓아온 생각들이 단단한 밑바탕이 되어 작업의 밀도를 견디게 해 주었지만, AI 인문비평은 말 그대로 학습의 날들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관련 업계에 오래 몸담았고 학습에 자신이 있던 처음과 달리, 현업에서 멀어진 감각 위에 인문학적 사유를 얹는 일은 생각보다 산고가 길었다. 그럼에도 길이 막힐 때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아이디어와 글감이 튀어나왔고, 병원 대기실에서 펼친 잡지의 구석에서조차 답을 만났다. 모든 일이 뜻이 있었음을 느끼며 벅참이 차올랐다.


『휴먼테스트: AI는 인간을 꿈꾸는가』는 본래 매우 비판적인 동기로 시작했다. 시중에 수만 권씩 팔리는 AI 관련 저작들이 범하는 철지난 일반론의 재포장이 자주 눈에 띄었다. 특히 인문학 쪽 서술은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기술 서술에서는 인문적 사유의 빈약함을 자주 목격했다. 그들 책의 성급함을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움이 컸다. 빠른 효율의 집필이라도 다학제적 사고와 사유의 가능성만이라도 제시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깊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생각이 곧 실행으로 이어지는 재현 경험만으로도 만족한다. 혹시 누군가 읽어 준다면 더없이 좋겠다.


두 연재, 『휴먼테스트: AI는 인간을 꿈꾸는가』와 『어느날 영화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브런치북으로 엮어 13회 브런치북프로젝트에 응모했다. 심사의 판단은 심사관들에게 맡기고, 별도의 출판 제안이 오면 여러 출판사와 타진해볼 생각이다. 무엇보다 먼저 진정성으로 제안이 온다면 출판사의 크기나 이력과 상관없이 함께해 보고 싶다.


https://brunch.co.kr/brunchbook/aiiscoming


내년부터는 정식으로 비평 잡지에 기고를 시작한다. 그 활동을 바탕으로 들어오는 원고는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으려 한다. 이번 겨울에는 순수 문학 산출물로 신춘문예에 도전해볼 생각을 품고 있다. 아직은 비평을 중심에 두고 있으나, 깊숙이 묻어둔 소설과 시, 산문도 다시 들여다보며 냉정한 자기 검토를 시작하려 한다.


앞으로의 브런치에는 세 개의 연재를 주 1회씩 간격으로 계획해 둔 상태다. 기존의 문학비평과 영화비평에 더해, 회고조의 에세이를 올려 지난 기억과 추억 사이를 누벼볼 생각이다. 남은 날들은 내키는 대로 매거진에 발행해 보려 한다. 시를 올리거나, 세태 비판을 쓰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거나, 없다면 날씨 이야기라도.


"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 짓는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중


글쓰기와 글짓기라는 표현의 논쟁적 의미를 떠나 글을 쓰는 일은 결국 글로 생각을 지어 내는 일이라고 믿는다. 밥을 짓고 집을 짓듯, 좋은 재료를 구해 설계와 계획에 맞게 이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이름을 짓고 표정을 짓는 일 또한 선택의 행위로 찾아내는 일이다. 특히 표정을 지을 때는 같은 시간과 공간의 감정을 잘 읽어 내야 한다. 기쁠 때는 기쁨을, 슬플 때는 슬픔을 그러모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글쓰기의 시간에 매듭을 짓는 일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매듭을 짓는다’는 말에는 손끝의 기억이 배어 있다. 실을 모아 돌리고 끈을 감아 묶는 행위 속에서 인간은 오래전부터 끝맺음의 감각을 배워 왔다. '짓다'라는 말은 단순히 만드는 행위를 넘어 흩어진 것을 모아 모양을 이루게 하고, 흘러가던 것을 한 점에 모아 생을 완성하도록 돕는 일이다. 밥을 짓고, 집을 짓고, 이름을 짓는 일처럼 '짓다'에는 시작과 끝을 잇는 의지가 스며 있다. 그 상징적 기표가 바로 매듭이다.


작가의 매듭은 마감이 아닐까. AI Sora


매듭은 의지의 형상이다. 실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두 끝을 맞닿게 하며, 한 번 묶이면 쉽게 풀리지 않도록 한다. 눈으로 보면 단순한 마디 하나지만 그 안에는 '이제는 여기서 멈추겠다'는 결심이 스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이 끝날 때, 관계를 정리할 때, 마음을 다잡을 때 '매듭을 짓는다'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안도와 단호함이 함께 있다. 풀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되, 지나치게 조이지 않는 손의 온도. 매듭은 인간의 마무리 감각을 닮아 있다. 시작과 끝이 어지럽게 얽힌 세상에서 우리는 오늘도 조용히 한 줄의 생을 잡아당겨 작은 매듭 하나를 지어 본다. 그 매듭은 삶을 완성하는 오래된 언어 중 하나다.


이렇게 작고 단단한 매듭 하나를 짓는다. 누구라도 그 끝과 시작을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충분은 성공을 이룬다. 아주 작은 성공.


(연재를 마감하고 아주 잠시 쉽니다. 언제 쉬었냐 싶을 만큼 바로 돌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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