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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국화는 시월에 핀다더라

취소 발행글을 다시 들추어서 01

by 박 스테파노
"시월 국화는 시월에 핀다더라"

-탁영완 시집-


매년 시월이면 종로 조계사 경내는 국화의 향기로 물든다. ‘시월 국화 대전’이라 이름 붙은 이 행사는 불자이든 아니든 사람들의 발길을 묶어두곤 한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잠시 멈추어 선다. 그저 꽃을 보는 일이 아니라, 그때마다 삶의 어떤 ‘때’를 생각하게 된다. 시월 국화는 생의 모든 일에는 제각기 피어날 시절이 있다는 말을 대신한다. 여러 해를 살아내는 국화가 한철의 절정에 피고 스러지는 이유는, 짧은 한창의 순간조차 부처의 뜻이자 우주의 질서임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조계사의 가을 국화대전. 내 사진


몇 해 전 시월 마지막 주말,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처음 놓이기 시작한 국화는 이제 여러 번의 시월을 지나왔다. 그러나 그곳의 국화는 아직도 피어 있다. 권력자가 정치적 판단으로 정한 ‘애도 기간’이 끝났어도, 국화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해마다 조금씩 산을 이루듯 쌓여간다. ‘때’를 다하지 못한 젊은 영혼들에 대한 절절한 슬픔과 위로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제 지겹다 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가자며, 위패도 영정도 없는 추모를 억지로 닫으려 하지만, 그 미완의 애도는 여전히 이 땅 어딘가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 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문학동네, 2016)


시월의 국화는 철학자의 이 말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의 신호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누군가에게 남긴 상처의 그림자가 있음을 환기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내 눈을 버리고 타인의 눈을 얻는 일, 그것이 성찰이고 회심일 터다.


신형철 평론가는 “사랑은 두 번 죽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 또 한 번은 나 자신에 의해서. 그래서 사랑했던 사람을 두 번 죽여본 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상실과 과실의 감정이 바로 회한을 낳고, 한국 문학은 그 회한 위에 집을 짓고 꽃을 피워왔다. ‘죽임’과 ‘살림’의 비유를 조금 더 당겨 보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그 본질을 가장 선명히 드러낸다. 떠난 것은 너이지만,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나이니까.


그러니 이 글은 먼 옛날의 첫사랑 타령이 아니다. 죽음과 삶, 남음과 사라짐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사라진다 하지 않았던가. 위대함도, 명성도, 거리와 건물과 동네도, 신념과 진심마저도 결국엔 스러진다. 그중에서도 놓쳐서 아쉬운 것은 단 하나, 사랑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한 사건의 순간뿐 아니라, 대체로 슬프다. 그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이 공유하는 인간의 공통 언어이며, 문학은 그 언어의 깊은 곳에서 통달의 채찍이자 위로의 손수건이 되어야 한다.


이태원의 그 가을을 기억하는 일. 제공=기독신문


마지막으로 국화의 꽃말을 다시 들춰본다. 빨간 국화는 사랑, 분홍 국화는 애정, 노란 국화는 질투와 실망, 그리고 하얀 국화는 ‘진심’과 ‘감사’다.


이 계절의 하얀 국화는 말한다.

진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감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월의 국화는 오늘도,

우리 안의 상처와 슬픔을 조용히 밝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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