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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이 불어, 섬을 걸었다

지난 주간 단상

by 박 스테파노

1.

원고를 정리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무작정 투고를 시작했다. 대형 출판사의 온라인 투고 시스템과 메일을 통해 기획서, 개요서, 완성 원고를 차례로 보냈다. 지인을 통하거나 친분 있는 출판인을 찾기보다, 규모 있는 기획자들의 시선을 먼저 듣고 싶었다.


‘투고(投稿)’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던질 투(投), 볏짚 고(稿). 볏짚을 원고에 비유한 유래는 여럿 있으나,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의 산물이라는 뜻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인고의 시간을 거친 글을 ‘던진다’고 표현하는 까닭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글은 결국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던져지는 존재, 그 행위 속에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추수 후 볏짚 말리기. 중앙신문 제공


2.

‘투서(投書)’라는 말을 떠올리면 투고의 의미는 다시 새로워진다. 투서 또한 글을 던진다는 뜻이지만,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숨겨진 사실이나 남의 허물을 적어 상부 기관에 몰래 보내는 일, 혹은 그 글 자체를 뜻한다. 조선 중기 이후 봉건 사회의 균열이 깊어지며 민중들은 이를 정치적·사회적 주장의 수단으로 삼았다. 동시에 반대파를 모함하거나, 권력자에게 저항의 뜻을 전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이렇듯 ‘글을 던진다’는 행위에는 언제나 불편한 수신자가 전제되어 있다. 기꺼이 받아주지 않을 자에게, 혹은 외면할 자에게 글을 던지는 일. 그 행위는 애초부터 실패를 예감한 시도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던진다. 확률 낮은 가능성에 마음을 걸고, 어쩌면 도착하지 않을 메시지를 끝내 띄운다. 나 역시 오늘, 그 불확실 속으로 글을 던진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미소를 짓고 풍선을 부는 일. 글쓰기. 내 사진


3.

‘던진다’는 행위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야구가 떠올랐다. 나의 2025년 야구는 지난주에 끝이 났다. 응원하는 팀은 한때 8위에 머물렀으나 정규 시즌을 4위로 마치며 가을 야구에 올랐다.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까지 11경기를 치르며 끝내 3위로 마감했다. 그야말로 투혼이었다.


하지만 이 투혼은 애초 불필요했을 전력이었다. 판단의 실착으로 스스로를 어렵게 만든 감독과 고참진의 교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가을의 중심에서 2003년생 신예 듀오가 빛나는 모습을 보며, 한 시대의 교체를 목도했다. 그 순간, 나의 시대가 저 멀리 흘러간 듯한 묘한 서늘함이 스쳤다. 추억이 바람처럼 스탠드를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선수들이 24일 대전에서 열린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한화 이글스와의 5차전을 패배로 마감한 뒤 그라운드로 나와 원정 응원 온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4.

누군가 나를 소개해 달라 하면, 나는 “소속은 우리 집이고, 하는 일은 회복과 재기다”라고 말하곤 한다. 지난 주말, 내년 필진으로 합류할 매체의 위촉식에 참석했다. 매달 평론을 쓰고, 해마다 한 번씩 비평집 공저로 출판하며, 지면지에 이름을 올리기로 서로 약속했다.


참석자들은 영화 평론가, 기자, 은퇴한 교수님까지 세대의 폭이 넓었다. 만 서른의 기자부터 예순이 넘은 원로까지,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언어로 영화와 문화를 이야기했다. 세대의 벽을 세우기보다 사유의 결을 나누려는 그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공유된 사유’라는 말이 떠오르며, 마음이 환해졌다. 다가올 공부의 시간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다시 붉을 켤 시간. 내 사진


5.

문화평론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마음 속에 오래 자리한 영화 글쓰기의 스승 덕분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 스승의 칼럼이 세상—특히 젊은 세대의 조롱거리로 떠올랐다. 세심하게 맥락을 확인하지 못한 스승의 불찰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그를 향한 반응의 언어는 너무나 참혹했다. 울분과 신경질, 비판이라기보다 공격에 가까운 말들이 쏟아졌다. 논거도 증명도 없이, 그저 감정의 폭발이었다.


이유를 묻고자 하면 “냅두라”는 식의 반발이 돌아왔다. 모두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시대, 그러나 읽지 않는 작가들의 시대. 도구의 숙련에 몰두한 채, 독서 없는 쓰기가 난무하는 시대. 그 풍경 속에서 스승의 문장은 한순간 낯선 표적이 되었다. 나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글의 운명은 언제나 시대의 언어에 던져져 부딪히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다시 배운다.


다 이 녀석 때문이다. 소니 픽쳐스


6.

위촉식을 마친 뒤, ‘문화탐방’이라는 다소 멋스러운 이름의 일정에 함께하며 합정역에서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로 향했다. 선유도(仙遊島)는 본래 ‘선유봉’이라 불린 작은 섬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홍수와 범람을 막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며 봉우리가 깎여 나갔고, 1978년부터 2000년까지는 서울 서남부 지역의 정수장으로 쓰였다. 이후 폐쇄된 공간은 2002년, 164억 원의 예산을 들여 선유도공원으로 재탄생했다.


햇살이 유난히 좋던 날이었다. 물빛 사이로 스민 가을 바람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섬의 이름처럼, 신선이 노니는 듯한 고요였다. ‘선유도’라는 말이 새삼 실감되었다. 아무 근심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그것이 신선의 놀이일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그런 마음으로 걸었다.


선유도 좋았던 산책. 내 사진


7.

잠시 중단했던 밀리의 서재 구독을 다시 시작했다. 장애 연금 수령자로서 국민연금의 일부를 선수령하게 되었다. 생활의 균형이 조금은 잡히자, 다시 책을 가까이 두고 싶었다.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 라슬로 크라스너호르카이의 작품이 새로 입고되어 있었다. 오래 읽고 싶었던 책들과 주변에서 추천받은 작품들을 서재에 담았다. 그리고 브런치의 고마운 글벗이 멋지게 포장된 문학 기행기를 선물로 보내 주셨다. 이 또한 꼬박 꼬박 읽어 볼 참이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진부한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익어가는 이 계절이 유독 고맙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길 위에서 문득 생각했다. 글을 던지는 일,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여전히 배우고 있다는 마음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에 감사를 꾹꾹 눌러 심는다.


감사히 읽겠습니다. 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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