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길고 긴 겨울의 끝에서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죽는다."
봄이 꽃을 피우려 힘을 모으는 바로 그 순간, 겨울은 마지막 칼날을 세운다. 자연의 전환이란 이토록 아이러니하다. 끝과 시작이 한 지점에서 맞닿아 있고, 따뜻함은 반드시 한 차례 더 차가움을 통과해야만 완성된다.
어제는 춘분이었다.
춘분(春分). 봄을 나누는 날. 그 이름 안에는 이미 분리와 균형의 철학이 담겨 있다. 서양은 이 날을 equinox라 불렀다. 라틴어로 동등한(equi) 밤(nox). 빛과 어둠이 저울의 양 끝에 나란히 앉아 잠시 균형을 이루는 날. 그러나 이 균형은 결코 정지가 아니다. 균형이란 언제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이다. 춘분을 기점으로 빛은 어둠을 조금씩 잠식해간다. 낮이 밤을 이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보리를 갈고 춘경을 시작하는 시기. 절기란 본래 먹고 사는 문제, 생존의 달력이었다. 조상들은 나이만큼 떡을 나누어 먹으며 겨울을 살아낸 몸을 위로하고, 농사를 앞둔 일꾼들에게 머슴 떡을 돌렸다. 새해란 정월이 아니라 바로 이 흙이 풀리는 날, 씨앗을 품을 수 있는 날부터였을지 모른다. 달력의 숫자보다 대지의 온도가 더 정직한 시간표였을 것이다.
춘분을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 조상들만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에게 이 절기는 빠스카의 시작이었다. 이집트의 어둠 속에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지나갈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발랐던 집들은 그 죽음을 건너(過越)갔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표식 하나로 살아남는 이야기. 누룩 없는 빵을 씹으며 선조들은 그 고단한 탈출의 기억을 몸으로 다시 살았다. 기억을 먹는 것, 그것이 제의다.
예수는 바로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 위에 또 하나의 수난이 포개졌다. 죽음으로 죽음을 건너는 구조. 부활절이 춘분 후 보름이 지난 첫 번째 일요일로 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달이 차오르고, 빛이 완전히 어둠을 압도하는 그 시점에 부활을 놓은 것은 자연의 리듬과 신학적 의미가 한 호흡으로 맞닿은 선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유대, 반기독교의 기치를 높이 드는 이란 역시 이 날을 경건히 맞이한다. 페르시아력으로 노루즈, 새해의 첫날. 신학도, 이념도, 국경도 모두 달리하지만, 인간은 결국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태양을 보며 같은 지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어 왔다. 춘분은 그 모든 차이를 품고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서 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태양을 향해 손을 모으는 두 민족이 총구를 겨눈다. 춘분 앞에서는 유대인도, 페르시아인도 다르지 않았다. 수천 년 전 그들의 조상은 같은 별을 보며 새해를 열었고, 같은 계절의 전환 앞에서 신께 감사를 올렸다. 노루즈의 불꽃과 빠스카의 촛불은 그 온도가 다르지 않다. 둘 다 어둠 속에서 빛을 피워 올리는 인간의 오래된 몸짓이다.
그런데 지금, 그 빛으로 서로를 겨냥한다.
신학이 칼이 되고, 역사가 증오의 연료가 될 때, 인간은 얼마나 쉽게 공통의 뿌리를 잊는가. 봄은 편을 가르지 않는다. 춘분의 햇살은 이스라엘의 땅에도, 이란의 땅에도 같은 각도로 내려앉는다. 씨앗은 이념을 묻지 않고 싹을 틔운다. 대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다만 받아들일 뿐이다.
부디 봄이 설득하기를. 같은 절기 앞에 고개를 숙였던 그 오래된 감각이, 총성보다 먼저 돌아오기를. 전쟁이 빼앗는 봄날들을 더 이상 세지 않아도 되는 날이, 이 춘분 이후의 어느 봄에는 오기를.
빛이 어둠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
이 단순한 천문학적 사실 안에 왜 이토록 많은 문명이 희망을 걸었을까. 인간은 아마도 어둠 속에서만 빛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통과한 몸만이 봄 햇살의 온도를 피부로 안다. 고통은 감각을 예리하게 만든다. 살아남은 자의 봄은 그냥 봄이 아니다.
그러나 춘분에는 그림자가 있다. 겨우내 모든 기력을 끌어모아 버텨온 몸들이 봄바람에 긴장을 내려놓는 순간, 그 이완이 오히려 무너짐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 관문을 눈앞에 두고 쓰러지는 것. 봄을 맞이하려다 봄 문턱에서 발이 꺾이는 것. 가장 가혹한 이별은 종종 가장 따뜻한 계절의 초입에서 찾아온다. 이것이 춘분이 기쁨만의 절기가 아닌 이유다. 임계점이라는 말은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경계이고, 위험이고, 동시에 가능성이다.
신약이 들어 몸 안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암의 어둠이 물러서는 자리를 오래된 자가면역의 불꽃이 채운다. 몸은 전쟁 중이다. 치료가 또 다른 고통의 문을 여는 이 아이러니 앞에서, 봄을 그린다는 것은 낭만이 아니라 의지다.
꽃샘추위는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다. 그 바람이 매섭다는 것은, 막으려는 봄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겨울이 힘을 다해 붙드는 것들은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다. 버티는 것과 피어나는 것 사이, 우리는 지금 그 좁은 길목에 서 있다.
지난 길고 긴 겨울을 붙잡고 버텨온 만큼.
꽃샘 추위에 놀라지 말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를.
너와 나의, 또 다른 봄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