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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Mar 22. 2022

Listen & Repeat

“경청傾聽과 질문質問”

신학기가 다가 오니, 그 먼 옛날 중학교 입학 시절이 떠 오릅니다. 완전히 달라진 환경을 6년 만에 맞이 하는 중학입학은 설렘과 두려움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기 같았지요. 남녀 합반이 아닌 이상 시커먼 녀석들과의 3년이 암담하기도 했지만, 입학 선물의 전형 만년필, 볼펜 세트도 받고, 두툼한 국어ㆍ영어 사전도 책상에 꽂아 넣으면 왠지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다가 두려움이 다가 오지요. 바로 영국, 미국 사람 말,  "English"때문이지요.


오선지 비슷한 공책에 필기체도 그려 보다가, 선행 학습은커녕 예습, 복습도 버거운 '과외(사교육) 금지'의 시대에 미국 사람들 말은 참 어렵고 두려웠습니다. 서툰 흉내로 선생님의 선창에 후창 하듯 본문을 읽고 나면, 까만 카세트 라디오를 교탁에 올려, 당시 최신식의 시청각, 아니 청각 교보재 카세트테이프를 들려줍니다.

Listen and~ Repeat

본문을 미국 사람으로 추정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읽어 주면, 대망의 하이라이트가 나옵니다. 바로 "Listen & Repeat"부분이 배경음악과 함께 온 교실에 퍼집니다. 한두 달 지나고 나면, 녀석들은 이 대목을 알리는 "Listen & Repeat"부터 성대모사하듯 외치기 마련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이 "Listen & Repeat"가 삶에 중요한 깨우침이 되리라고는 알 턱이 없었지요.

https://n.news.naver.com/article/123/0002262072


사람의 이기적인 본능은 주요 신체 일부인 눈과 귀도 똑같습니다. 보고 듣는 대상을 차별하고 구별하기 일쑤입니다. 눈도 귀도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 호기심과 쾌락을 자극하는 것만을 보고 듣는 경향이 생깁니다. 관성이 생기고 결국 그런 것들만 지속적으로 접하려고 합니다.


영어의 단어는 보고 듣는 행위의 단어가 구분되어 사용합니다. 행동 양상과 정도를 각기 다른 단어로 표현합니다. 화자의 입장에서 "그냥 보는 것"은 ‘look'을 사용합니다.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서 아무런 생각ㆍ의도ㆍ판단 없이 보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와 달리, 대상에 끌려 화자나 관찰자의 시선을 대상에 두는 경우에는 전치사를 사용하지요. look at, look up, look into처럼 말이지요. 전치사로 시선을 잠시 대상에 잡아 둡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대상을 상당 시간 볼 경우, ‘watch'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watch TV, watch movie, night watch 등처럼 상당 시간 관찰하는 것을 나타 냅니다. (시계를 watch라고 하는 이유)


듣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로는 ‘hear'가 있습니다. 눈과 달리 귀는 닫거나 감을 수 없기에, 집중력으로 뇌 속에서 차단하기 전까지는 본의 아니게 소리는 존재와 동시에 귀에 들립니다. 이런 것을 'hear'로 표현합니다. 한 장소에서 상당 시간 무심코 듣는 경우 ‘overhear'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반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듣는 행위는 'listen'입니다. 'listen'은 자신이 들으려는 대상 앞으로 귀를 가져가는 '의도의 행위'를 하기 때문에 전치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listen' to를 항상 사용합니다. 우리 표현으로 한자어 "경청(傾聽)"이 됩니다.

"귀를 기울여"

보다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한 '어른의 행동'에는 두 가지의 위밍업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청(敬聽)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공경스런 청취 뒤의 공감과 정립의 질문(質問)입니다. 경청은 상대방의 말들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닙니다. '경(傾)'은 '기울이다'라는 뜻의 "상대에게 몸을 기울여 듣다"라는 의미를 주며, 이는 결국 상대를 존중ㆍ공경하는 마음의 '경(敬)', 즉 깊이 듣는 행위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경청(敬聽)하는 보통 사람은 사실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인, 군자의 반열에 든 몇몇만 기억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필부, 평범인들이 할 수 있는 '경청(傾聽)'부터 노력해야 하겠지요.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부터가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많은 문제들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발생의 이유야 무수하지만, 해소가 안 되는 것은 경청의 부재에서 옵니다. 경청은, 오랜 수련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가 아닐지도 오릅니다. 독서를 하고, 감상을 하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써내는 일이 그 일환일지도 모르지요.  산책은 대단한 자연의 소리를 침묵으로 경청하는 것이고, 집 나오면 고생이더라도 여행을 하는 이유는 타인들의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경청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경청은 내가 남이라면, 남이 나와 같다면이라는 "역지사지"의 유일한 출구일지도 모릅니다.

질문은 "도발"이 아니죠

경청할 때 비로소 다음 단계가 존재합니다. 저는 기업 강연, 경쟁 프레젠테이션, 대학 강의 등 다양한 경험이 있습니다. 더 나은 전달을 위해 효과적인 프레젠테이션 교육을 위해 3박 4일의 출장 세미나를 간 적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배워 아직도 유용하게 쓰는 방법은 "objection handling"입니다. 우리말로 "반론 다루기"정도가 됩니다. 그때 1번 규칙이 "repeat"입니다. 내 주장의 반복이 아니라, '상대 반론을 반복'하라는 것이지요. 대부분 반론은 질문, 질의가 됩니다(물론 가끔 반대의견을 "주장"으로 날리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 질의를 되뇌고, 다시 한번 반복해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 것은 '당신의 이야기를 내가 이렇게 들었다'라는 듣기의 확인이고, 상대 이야기의 속내에 대한 재차 확인이며, 일차적인 '공감의 표현'이 됩니다. 분위기도 좋아지고 반론자와 강연자의 유대관계가 형성됩니다.


경청은 귀 열고 자세를 구부려, 외부의 반응을 자신으로 온전히 향하게 하는 정렬의 노력입니다. 그래서, 경청을 하는 사람이 제대로 질문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질문은

일종의 쉼표입니다. 물음표가 달려 있지만, 관계의 다음 계단을 위한 준비이고 공감입니다. 습관적이고 관성적인 자의식의 "잘난 체"를 버리기 위해서는 문턱과 같은 질문은 유효합니다. 새롭고 참된 실체를 찾아가는 탐구의 과정에 늘 "자의식"이라는 강도가 길목을 지키기 마련입니다. 이 길을 지켜 주는 것이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미소한 자신이 매달렸던 한 줌 신념이나 얕은 식견을 버리고, 낯설고 친절하지 않은 본질(本質)을 찾기 위해 통과하는 문(問)이 바로 ‘질문’이라고 합니다. 질문은 그래서 유효하고, 경청으로 얻기도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마음의 눈과 귀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정답이 없는 자신 안의 외침을 우리는 늘 업신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지혜는 정교한 지식의 그래프 자랑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질문하고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는 그 자체가 지혜가 아닐까요? 질문하기 주저했다면, 반론이 버거웠다면, "Listen & Repeat"! 언제부터? 오늘, 바로 "지금"부터.


-곰탱이 남편의 어여쁜 아내와 나누는 아침 생각-

브런치에서 퍼옴(https://cocoastudio-psj.tistory.com/m/157)

사족)

얼룩소 운영진 여러분, "Q&A"나 "게시판" 운영 고려해 주십사 하고 긴 글로 예열했습니다.


최근 저의 과몰입으로 행동강령 등 위배라고 숨김 처리된 것 중에 쉬이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있답니다. 메일로 문의하면, 일과 마무리 무렵에 "행동강령 및..."이라는 수칙을 이미지 파일로만 보내 주고, 이유의 설명과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는 저의 상상에만 맡겨 주셨습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더라도, 보다 원활한 소통은 필요해 보입니다. 고의나 의도가 아닌데, 뉘앙스와 단어 사용의 문제는 "정보의 나눔"이 필요하잖아요?


'얼룩소'는 '스타트업'이라고 표방했습니다. 플랫폼 기업이지요. 최근 플랫폼 기업들이 저물어 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시장의 소리를 귀 기울이지 않음에 있습니다. 그 시장의 소리 1번은 "VoC(Voice of Customee)"입니다. 배달앱 기업들도 이것을 간과하고 다 외주나 로봇 챗을 두어 이제 시장의 비판을 받고 있잖아요?


얼룩소는 어디에서 '고객의 소리'를 듣나요? 글 쓰는 사용자는 보상을 받아 가니 고객이 아닐까요? 이따금 사육받는 얼룩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오리지널 콘텐츠는 분명 '공론의 형성'을 위해, 저렇게 구멍 숭숭한 퀄리티로 포스팅했을 텐데  원작자의 반응은 거의 없기 일쑤입니다. 인턴분들 제외하고 말이죠. 몇몇 지인들로 추정되는 이들과 만의 소통이 플랫폼의 목적은 아니었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게시판을 만들어 주세요.

미숙함과 어설픔은 서로가 쓰담 쓰담하면 나아지는 모습이 될테니까요. 부탁드려요.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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