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生의 대선)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 정호승 시 <슬픔이 기쁨에게> -
늘 가장 큰 슬픔이 건네던 위로
1997년 겨울이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운 좋게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졸업을 앞둔 그 겨울이었습니다. 문학을 연구하는 비평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덮은 그 겨울이었습니다. 재학 중 지원한 모 신문사는 세상의 사정으로 수습 취소를 알려 왔고, 국비지원 유학도 없던 일이 된 그 겨울이었습니다. 청년 시인에게 이름을 알린 그 겨울이, 나에게서는 모든 희망을 빼앗아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나에겐 늘 슬픔만 얼굴을 보여 주던 '절망'의 그 겨울이었습니다.
그 겨울에 뜬금없이 3년 전, 1994년 어느 늦은 여름, 이른 가을의 어떤 날을 떠 올렸습니다. 경기 북부 일산 신도시 위의 탄현인지 풍동인지 이제 까무룩 해진 그 낯선 동네의 어떤 날이 생각났습니다. 손목에 만 원짜리 까만 전자시계만 없었다면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어느 상가 건물 신축 공사장의 어떤 날이었습니다. 복학을 앞두고 인력 사무소의 소개를 받아 간, 어제 굵은 비에 무릎 언저리까지 차오른 미완의 지하실에서의 어떤 날 말이지요. 환기구는 물론 양생이 되다만 콘크리트 벽에 삐죽이 솓아 난 철근에 이마를 주욱 찢긴 그 어떤 날. 옛날 노래 가사에나 나오는 백열전구가 그네를 타듯 휘청거리던 그 어떤 날. 이마에 뚝뚝 떨어지는 핏기를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던 그 무덥고 아찔했던 어떤 늦은 여름날이 기억에서 소환되었습니다.
그깟 유학, 진학이 좌절되면 어떻고, 수십 통 적어 낸 이력서에 대답이 없어도 어떠냐는 굳은 용기가 쏟아 났습니다. 절망이라 생각했던 날들에 희망으로 다시 설 수 있었던 까닭은 내 기억 속에 가장 깊은 슬픔이 말을 걸어 주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슬픔은 늘 절망과 희망의 공평한 얼굴을 드러 내어 기쁨이라는 선물을 주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쉽게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착하고 살아왔습니다. 선언 가득한 586 선배들에게 회색분자라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고, 어디를 가나 "최고의 경쟁률"을 대표하는 쪽수만 많은 '무더기'들이었습니다. 수업 빼먹기 다반사였던 선배들은 졸업과 동시에 기업과 기관에서 모셔 가기 바빴고, 당연히 내 차례가 될 줄 알았던 그 '희망'이라는 풍선은 빠져 버린 헬륨가스처럼 IMF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개미지옥을 던져 주었습니다.
답답할 때 열어 보는 몇 안 되는 글은 김누리 교수의 칼럼입니다. 한 자 한 자 눈에 담습니다. 그리고 또 깨우침을 얻습니다. 이 번 대선이 끝나고 오열할 만큼의 치 떨림은 없지만 "절망적"인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정치 지지 진영의 승패가 아니라, 선거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회고하기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일상을 더듬어 잡았습니다. 우리 세대는 "절망적 희망"을 늘 끼고 살아 내었으니까요. 사기꾼이라 손가락질받고, 개자식이라 욕을 먹어도 우리는 그렇게 버티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83758
부모가 모두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대계 독일 시인, 볼프 비어만은 말했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 비어만의 ‘절망적 희망’의 심정으로 지난 대선을 돌아본다. 20대 대선은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무엇을 남겼는가. -칼럼 본문 중-
낀 세대, 최대 인구 세대, 늘 미지의 X세대
유신정권 말기에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전두환, 노태우 쿠데타 정권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87년 민주화 항쟁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태동의 시기에 대학생활과 성년을 맞이했습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청소년기에 지켜보았고, ‘서른 즈음에’라는 노랫말을 곱씹어 생각하기에도 버거운 2002년 월드컵 때에 서른을 맞이하였습니다. 군 복무 시기에 김일성 사망을 겪고, 졸업시기에 IMF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월 10만 원 교통비와 50만 원 정부 보조금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복을 한 번도 못 입어 보았고 (물론 사립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나, 사립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예외지만), 살짝 한 펌은 허용이 되는 두발 자율화의 세대였으며, 보습학원이나 대학생 과외 등이 전면 금지된 사교육 금지 세대였습니다.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의 전성기에 전교조 선생님들을 만나 한번 버티기 단체행동으로 학교 처벌을 받기도 하였던 세대였습니다. 엄청난 대학입시 경쟁률을 자랑하던 세대였으며 (재수학원 경쟁률도 매우 높았던), 재수 삼수의 시기가 애매한 경우 일본식 학력고사와 미국식 수학능력시험을 치러 내야 했고, 선 시험 후 지원과 선지원 후시험을 모두 치러 볼 기회도 있었던 세대였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363
91학년도의 경우를 보아도 전·후기 합쳐 4년제 대학 정원이 20만 4천9백95명인데 대학 진학 희망자수가 92만 8천9백80명(전기 66만 2천4백69명, 후기 26만 6천5백11명)이어서 전문대 입학자와 재수 응시자를 감안하더라도 해마다 30만 명가량의 재수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기사 본문 중-
문화의 현상에서는 개방과 물질, 기술의 발달로 급격하게 팽창되는 모습을 목도하던 주요 소비계층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전 성인 중심의 가요와 청년세대 중심의 포크, 록 문화에서 발달하여, 소위 말하는 ‘대중가요의 시대’를 만든 세대이기도 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성행하였고, LP판의 유통을 주도하였고 그로 인하여 가격 폭등으로 인한 곤혹도 겪은 세대였습니다.
팝송과 가요가 공존하던 세대에서 가요로의 무게 중심이 이동시킨 세대였으며, 장르에서도 발라드와 댄스의 양대 산맥을 형성시킨 소비자들이었습니다. ‘유재하’, ‘어떤날’을 가슴에 묻고 서태지를 받아들인 세대였습니다. 본격적인 프로 스포츠의 태동기에 어린이 팬으로 함께 시작한 세대였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가장 순수한 입장으로 받아들인 세대이기도 합니다. 비디오 시장의 주요 고객에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하였고, 공연이라는 문화상품이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세대이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워크맨의 최대 사용자였으며, 성년이 되면서 삐삐, 모바일폰의 얼리 어댑터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세대입니다. 손으로 쓰던 리포트에서 워드프로세서로 프린트하던 변화하던 중간에 서 있던 세대였으며, 인터넷 통신부터 인터넷 태동기까지 정보통신 기술의 본격적인 시작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 한국 IT산업 종사자 중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세대이면서, 그 IT 시장의 영욕을 함께 하였던 세대이기도 합니다. 해외여행 자율화 시대를 맞이하여 어학연수, 배낭여행의 선봉에 서 있었고, 주 5일 근무시대에서 소위 레저 여가의 주요 소비자로 등극하였습니다.
정말 변화의 물살 한가운데 놓여 있었던 세대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세상의 급격한 변화는 나의 세대에게 탁월한 적응력을 우성인자로 새기어 놓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무한경쟁으로 인한 강한 개인주의적 세계관으로의 전향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불평등과 양극화에 둔감하다는 오명
나의 세대는 실질적인 경제, 사회 영역에서 ‘엔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통상 기업에서 관리자로 실무와 매니지먼트의 교량 역할을 하며, 가장 효율성 높은 리소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은퇴자나 창업자들은 두터운 자영업자들이 되어 팬데믹 위기에도 시장을 버티어 주었습니다. 또한 정부시책이나 사회의 요구사항에 비교적 순응하는 세대, 혹은 민감한 이슈에 큰 소리 내지 않는 소극적 이행자로 인식되어 ‘무난한’ 부류의 세대로 여기어지고 있습니다.
늘어난 수명에 비해 일찍 퇴직한 부모를 부양해야 하면서, 엄청난 사교육 지옥에서 꺼내 주지 못할 자녀들의 양육을 위해 ‘부양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세대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앞선 강한 세대 ‘386’ 세대의 그림자와 그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소극적인 태도가 전형이 되었고, 한숨 돌려 참여할 시점에는 이미 세상에서는 효용가치를 다음 세대인 N세대, MZ세대에게 찾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 사회에서 들보처럼 버티고 있는 세대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전히 이 사회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리소스로서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세대입니다. 조세 부담이 소득 대비 가장 많은 세대이며, 아이러니하게 조세저항이 가장 적은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합니다.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이 또 변할 것인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오롯한 ‘나’의 가치는 묻혀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이 세상도 나의 세대에게 기회와 배려의 손길을 잊어버렸습니다. ‘87년 체제’의 주역으로 불리는 선배들은 그저 나의 세대를 효율성 좋은 리소스로 활용하려 하고, 후배 세대들은 딱히 두드러지게 설명하기 힘든 나의 세대를 건너뛰어 윗 세대와 소통하려 합니다. 나의 세대는 스스로의 소극적인 모습과 함께, 위아래 세대에게서 철저히 무시되는 그런 세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대선도 "포위당한" 세대가 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사회 인식에 "무딘" 세대라는 오명까지 쓰고 있습니다.
https://alook.so/posts/rDtvmPz
경제가 성장하고, 어떤 조직이든 점진적으로 커져 가던 시절에 청소년 및 청년기를 보낸 50대 이상 사람들은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감각이 무딘 편이다. -본문 중-
"절망"을 감내한 세대가 "희망"을 이어주고자
지난 5년 나의 세대는 촛불 혁명과 새로운 정치 기반 조성 기여하였습니다. 적극적인 지지자로 활동하였고, 영향력 있는 일반인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참여와 지지의 숫자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세대가 아닌 위 세대에 대한 재조명과 아래 세대에 대한 배려의 손짓뿐이었습니다. 386세대의 정치주역으로서의 세대교체가 두드러지고 있고, 각 정치권들은 앞다투어 ‘청년세대’에 대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의 세대를 대표할 세대 인물은 정치계에도 문화계에도 경제계에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습니다(유재석 정도?). 나의 세대를 위한 정책도 없고, 나의 세대를 위한 정치적 배려도 없으며, 나의 세대를 위한 사회의 따뜻한 격려도 없습니다.
최근 진보나 보수할 것 없이 정당은 35세 미만의 ‘청년’들에게 비례대표 전략공천을 공표하였습니다. 침몰하던 보수 진영도 30대 청년을 당대표로 추대하였습니다. 각 지방자치는 청년 단체들을 일자리 창출을 위한 카운터 파트로 삼겠다고 공표하였습니다. 87년 체제를 넘어 촛불 정국 체제의 중심이 되자고 하면서, 386세대 선배들은 저마다 ‘젊은~’을 달고 유세 중이었습니다. 당신들을 받쳐 주던 우리 세대를 포위하거나 소외하거나 둘 중 하나였지요.
그렇게 우리는 젊어 씩씩대기도 늙어 능글맞지도 못한 애매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대접은 그렇게 받지만, 나의 세대에게 요구하는 세상의 주문은 너무나도 막중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각 기업에서 실질적인 소득을 가져오는 실무 엔진이 어느 세대인지, 각 정치권에서 실제 입안을 하고 전략을 실행하는 행동 주체가 어느 세대인지, 이 국가라는 사회를 돌아 가게 하는 주요 세원이 어느 세대인지, 꼼꼼하고 깨알 같이 살펴 주기 원합니다.
그리고, 나의 세대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숨어들고, 그만 외면하자고요. 이제는 목소리 내고 주장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도 대신하고 대변해 주지 못합니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윗세대와 아래 세대에 채무감에서는 자유롭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대표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모습이 필요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https://m.mk.co.kr/news/culture/view-amp/2017/02/96348/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기사 본문 중-
우리의 세대는 "무딘" 세대가 아니라, "견딘" 세대입니다. 세대에 DNA가 있다면 인내와 기다림이 X세대의 것이 될 것입니다. '절망'을 더 큰 '절망의 기억'으로 그 내성으로 견디어 온 세대입니다. 불평등과 양극화에 둔감한 것이 아니라, 애써 견디어 내서 마침내 광장으로 가져간 세대입니다. 하지만, 그 정답을 구하지 못한 채 여전한 '미지수'로 후세대에게 늘 미안한 세대입니다.
미지수를 최대한 "절망"으로 치환하여 지워내고, "희망"이라는 상수를 아들과 딸들에게 건네주고픈 마음이 진심입니다. 그래서, 포위를 당해도 소외를 당해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미지수 ‘X’는 종잡을 수 없는 문제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미지수 ‘X’의 참된 값을 알아낸다면, 훗날 역사라는 채점자는 지금의 세상에, 지금의 시대정신에 동그라미 치며 ‘참 잘했어요’라고 도장 찍어 줄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