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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pr 05. 2022

만우절(萬愚節)에는, 난 나이를 먹는다

고립(孤立)과 격리(隔離) 사이 그 어디쯤

인생은 '장르만 로맨스'


매년 4월 1일에만 거짓말같이 나타나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리투아니아라는 나라 속에 있는 '우주피스(Užupis) 공화국'입니다. 이곳은 원래 유대인이 많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시에 이 지역 유대 인구 대부분이 나치의 대학살 때 사망합니다. 곧이어 소련의 강제 점령으로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버려진 빈집들에 예술가와 보헤미안이 찾아들면서 파리의 몽마르트르, 우리나라의 헤이리 예술인마을처럼 예술가들이 거주촌으로 유명해진 마을이 되었습니다.

우주피스 공화국

공식 인가는 없지만, 1997년 4월 1일 독립 공화국을 선언한 이후 매년 4월 1일 24시간 동안만 이 동네는 마치 하나의 작은 나라처럼  변신합니다. 형식상으로 여권으로 출입이 가능하고, 그들만의 대통령, 국기, 10여 명의 상비군, 헌법, 화폐도 있는 국가체계를 갖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500명 이상의 대사를 파견하기도 한 나라입니다. 아마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기 때문인 듯 하지만, 흥미롭게도 벽면에 한글로 쓰여 있는 41개의 헌법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은 겨울철 온수와 난방과 기와지붕을 가질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실수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게으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이기려고 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헌법 조문 하나하나 멋지고 낭만적인 헌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게 늘 이처럼 로맨스였으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현실은 늘 버티기 힘든 날들이지만요. 그래서 그런지 작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 <장르만 로맨스>에서도 이 '우주피스 공화국'의 모습으로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시기를.


<장르만 로맨스>


누구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주변을 살펴보고, 실수했더라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세상, 참 로맨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이 재충전될 수 있도록 충분히 쉴 수 있고, 우리 모두가 같이 행복하기를 목표하며, 남을 짓밟으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분위기는 용납되지 않는 나라, 거짓말 같은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인생은 해피엔딩이라도 늘 장르만, 무늬만 '로맨틱'한 것일 테니까요. 딱 하루 그 거짓말 같은 나라가 세워지는 날, 4월 1일 '만우절'입니다.

만우절 교실풍경


크리스마스 같이 매년 또 돌아왔네, 만우절


방황을 넘어 선, 온갖 악한 인간 모습에 하느님의 노여움은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망가진 세상을 큰 홍수로 깨끗이 쓸어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노라 결심한 하느님은 노아에게 큰 방주를 만들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온갖 짐승의 암수 한 쌍씩과 나무와 꽃과 풀의 어린싹과 씨앗을 배에 싣도록 하시고는, 40일 동안 어마 어마한 큰 비를 쏟아부으십니다. 이세 상은 그렇게 큰 물에 잠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2012년에 개봉한 ‘2012’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묘사된 쓰나미를 떠 올리자면, 하늘의 노여움은 그렇게 커다랗고 좀처럼 누르기 힘든 것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40일 동안 퍼부은 큰 비로 인해, 이 세상은 한 발 내 디딜 한 뼘의 땅조차 없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은 빠지게 되고, 어디엔가 뭍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면서 노아는 드러난 땅을 찾으려 합니다. 처음에 까마귀를 창 밖으로 날려 보냈으나, 까마귀는 뭍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물 위를 날아다니며 다시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비둘기는 하루 이틀 지나고 떠나던 그 모습으로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게 됩니다.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그때 다시 돌아온 비둘기는 감로 나뭇잎을 물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디엔가 땅이 드러나고, 그 땅 위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하십니다. 인간의 천성이란 악한 마음을 품게 끔 되어 있는 것,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동물과 풀과 나무와 꽃들, 그리고 그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주는 흙과 물이 함께 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땅과 이 자연 덕택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노아의 방주

초등학생 아이들도 잘 아는 성경 속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온 비둘기가 저에게는 조금 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노아가 땅을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 이후에 비둘기를 처음 날려 보낸 날이 바로 4월 1일이라는 기원설 때문입니다. 헛수고가 될 것임에도 분명한 것에 심부름을 보내는 일, 그리고 그 심부름을 묵묵히 해내는 비둘기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하여, 결국 4월 1일은 만우절(萬愚節: April pool’s Day)이 되었다는 수많은 만우절의 기원 중 하나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날, 만우절이고, 이 날이 바로 제 귀 빠진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고립(孤立)과 격리(隔離) 사이 그 어디쯤


요즘 '코로나19', 전쟁 위협, 무능한 정권에 대해 세상이 두려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우쭐함에 따끔하게 집어 든 하늘의 채찍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염병이 감염되어 통증과 죽음의 공포에서 견디어 가는 것도 힘들겠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하늘의 뜻도 헤아리지 못한 체 인간의 알량한 셈으로 쏟아 내는 저마다의 '공갈'이 '공포'로 번져 가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세상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며 스스로의 고립(孤立)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를 일컬어 '자발적 격리(隔離)'라 부르고 있습니다.


말장난 같을 수도 있지만, '자발적 격리'라는 말은 상당한 자기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격리(隔離)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떼어 놓음'을 의미합니다. 언어적으로 '수동'의 작동으로 처한 매우 수동적인 상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격리'시킨다는 것은 언어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굳이 맞는 표현을 고르자면 '자발적 고립(孤立)'이 더 맞는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격리'와 '고립'은 가깝지만 먼 뜻의 단어이기에 보다 그럴싸한 단어를 고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72386


구약의 노아 이야기에서 만우절 유래를 찾기도 한다. 홍수 때 방주를 타고 있던 노아는 물이 빠졌는지 보기 위해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방주로 돌아왔다. 이렇게 비둘기를 헛수고시킨 날이 4월 1일이라고 해서 만우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기사 본문 중-


어찌 되었든 현재의 인류는 스스로를 '격리'시켜서 '고립'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앞선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떠오르는 지점입니다. 하늘의 분노로 세상은 온통 물에 잠기게 됩니다. 상상만 해도 무척이나 무서운 일입니다. 애써 큰 방주를 만들어 스스로 물보라로부터 '격리'시킨 노아와 가족, 그리고 각 종의 동물 한쌍들은 생명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더 두려운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바로 '고립'된 상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립된 상황에 대한 공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방주 안을 가득 메웠을 것입니다. 오로지 그 두려움을 이겨낸 것은 믿음, 약속에 대한 믿음뿐이었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상징이 된 만우절의 비둘기가 희망의 징표로 돌아오는 날 믿음은 공포를 밀어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었을 테니까요.



오늘은 귀가 빠진 지 오십 하고... 인 날


올봄, 이 날로 이 세상에 살아온 지 꽉 채워 50을 넘어 쉰 하고도 몇 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생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미국나이로 말이죠. 어릴 적 제 생일은 제 이름 다음으로 트라우마 가득한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꼬리표처럼 작용하곤 했습니다. 이름은 초등 저학년 이름표 오바로크 치던 시절, 유명 살인 암매장 사건의 범인과 동명이었습니다. 그다음의 우여곡절과 놀림은 개명까지 고민하게 되었지요. 결국 하진 않았지만 말이지요.


생일은 만우절에 집으로 초대한 친구들이 오지 않아 5학년 때까지 친한 성당 친구들 두어 명만 축하를 해 주곤 했습니다.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상태이고, 저학년 때에는 만우절 거짓말로 오지 않았고, 나중에는 스스로 포기했었지요. 그러다가 6학년 4월 1일에 칠판 가득 생일을 공표하고 집주소를 적었습니다. 결과는, 40명 넘게 집에 들이닥쳐 모친의 따가운 눈총과 등짝 스메싱을 맞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참 좋았습니다.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제 생일은 대부분 교회력으로 '사순절'에 있었습니다. 금육과 단식, 독실한 가톨릭 가정, 뭐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선배님께서 마흔이라는 나이를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 보여 힘겨운'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스무 살의 낭만’을 건너뛰었고, 현실감에 쫓기어 ‘서른 즈음에’ 느낄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없었기에 제게는 마흔이란 나이가 더 아릿한 모습으로 다가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에 쫓긴 나날들이 쌓여 이제 흔한 표현으로 '내일모레'면 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쉰 살에는 하늘의 뜻을 알아가는 (知天命) 나이가 될는지 아직 확신하기 어렵기만 합니다.

지천명에서 이순으로

노아가 보낸 비둘기는 어쩌면 진짜 바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물에 잠긴 세상이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확신도 없이, 노아의 바람을 담아 깊은 물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지친 모습으로 다시 날아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 다시 확신할 수 없는 비행을 주저 없이 나서게 됩니다. 비둘기의 모습을 복잡하고 미묘한 사람의 인생사에 비교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비둘기는 적어도 노아의 부름에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응답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어떠한 주변의 환경에도 혹하지 않는 ‘불혹(不惑)’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지천명(知天命)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말씀드린 대로 불혹(不惑)마흔 살을 훌쩍 넘어 지천명(知天命) 쉰 살도 넘어 선, 제법 살아온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삶'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인생'이라 감히 줄 그어 그래프 그려보고, 그것도 모자라 부여잡지도 못할 시간과 생각들을 조각조각 쪼개어 '생활'이라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볼 욕심을 가득 쥔 채 내려놓지 못하고 이리저리 선회하며 방황하는 까마귀와 같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스스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발적'인 고립이라 자위해 보지만, 어쩌면 주변으로부터의 '격리'였을지도 모를 수많은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원망과 답답함에 믿음과 희망을 저버릴까,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치밀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선 안 되겠구나 싶고, 맘이 그렇고, 몸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작은 반항감으로 시작된 나의 새로운 발걸음이, 어떠한 욕심에도 흔들리지 않는 뚜벅이의 모습으로 잘 지켜 나갔으면 합니다. 저도 다시는 몇몇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을 저주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에게 솔직하고 시간에게 공손하고 오늘에게 감사해하는 , 귀가 순해져 듣는 대로 이해하는 듬성듬성 편한, 그런 쉰 에서 예순 중간, 지천명과 이순(耳順) 그 사이 어디쯤이고 싶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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