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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pr 13. 2022

[서울 Soul 說] (1) 내 고향은 "서울"입니다

서울은 고향이 될 수 없을까 (長文주의보)

서울은 왜 한자(漢字)표기가 없을까요?

신영복 선생님, 조순 시장님

어릴 적부터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꼬장꼬장'으로 기억이 됩니다. 성격도 정스럽기보다는 거리감이 있으셨고, 오랜 기간 공무와 사업을 하시면서 몸에 밴 것들의 전반이 그러하셨지요. 92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아랫배 하나 나온 적 없는 마른 몸매에 머리는 늘 올백으로 포마드 넘김이었고 검은빛 도는 반뿔테 안경과 번쩍이는 구두는 트레이드 마크 같이 기억됩니다. 앞장 서시는 것과 남들 앞에서 익숙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기 좋아라 하셔서, 중동 파견 근로자인 부친 대신에 '아버지 수업'에 단골이셨지요.


그런 조부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다 보니, 남들보다 일찍 "한자"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한글의 터득과 동시이니, 취학 전부터 조부의 곁에서 펜글씨와 한자 쓰기를 따라 하곤 했습니다. 덕분에 국민학교(초등) 저학년에 1,800자 한 권을 떼었고, 중학 진학 전에 신문의 한자는 다 음독이 가능해졌습니다. 나름 서예도 제법 오래 한 터라 한문 시간이면 판서를 도맡아 했고, 중학교 졸업장에 적힌 아이들 한자를 당시 국어 교사였던 담임보다 많이 알아 제가 졸업장을 호명해 나누어 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어릴 적 한자 공부는 '1,800자'라는 서예 교본을 주로 사용했지만, 이따금 생활 속의 궁금한 한자를 물어 배우곤 했지요. 하루에 하나 씩 뜯어 내는 얇은 달력을 모아 연습장으로 구멍 꿰어 만들고 그 위에 따라 쓰기를 했습니다. 조부모, 부모, 친지, 형제의 이름과 대한민국의 국호, 그리고 주소 등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서울'이라는 지명 때문이었지요. 다른 주소는 다 한자로 알려 주시는데, 유독 서울만 한글로 명기해 주시니 이해가 도통되지 않고, 한동안 할아버지도 모르는데 한자가 없다고 둘러대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 갑자도 넘게 차이나는 조손 간의 팽팽한 대치의 단어 '서울'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 되었나 봅니다.

서울은 한자표기가 없습니다.


서울은 "고향"이 될 수 없을까?


서울은 제가 태어나고 지금 살고 있는 곳입니다. 잠시 일과 기타 사유로 수도권 신도시와 대전에 지내기도 하였지만, 군 시절까지 포함한 기간을 제외하면 45년 넘게 이 서울에 살았고, 살고 있습니다. 초ㆍ중ㆍ고를 모두 서울에서 마쳤고, 대학도 서울이었고, 직장도 주로 서울이 소재지였습니다. 아내도 서울 토박이라 할 수 있고, 중학교 동창이니 이곳 서울은 제게 의미 깊은 장소가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고향'이라는 질문과 분류에는 늘 어색함을 느끼게 됩니다. 고향이 서울인데, 이상하도록 이질감이 옵니다. 저만 그런가요?


서울은 본래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한국어의 순우리말로서 '한 나라의 수도(首都)', 곧 '국도(國都)'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고유명사로서의 쓰임과 별개로 사용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미국의 서울은 워싱턴 D.C.', '영국의 서울은 런던이다'등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1946년 지명이 '경성부'에서 '서울시', 다시 '서울특별자유시', '서울특별시'로 바뀌면서, '서울'의 일반명사 사용은 점점 어색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상에서 '서울'이라고 하면 한국의 지명인 '서울특별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실상 고유명사가 된 일반명사의 사례가 됩니다.

서울의 외국어 표기

앞서 말한 일화와 같이 시군구 이상 행정구역 중에서 거의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이기도 합니다. 중국어에서는 서울이 순한국말이기에 해방 이후에도 漢城, 汉城(Hànchéng, 한청)이라 지칭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서울대학교로 보내는 우편물이 한성대학교로 잘못 갔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중국이 개방이 되고 실제 도시명에 대한 혼선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이에 2005년 1월 발음이 서울과 유사하며 으뜸 되는 곳(수도)이라는 뜻을 지닌 首尔(首爾, 수이, Shǒu’ěr, 서우얼)이라는 한자로 공식 중국어 표기를 정합니다. 누가? 중국이 아닌 서울시가 스스로 규정했습니다. 당시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의 공식 중국어 표기를 발표하는 행사도 했습니다.. 처음 일각에서는 한국이 협의도 없이 首尔로 바꿨다고 불만이 있었던 듯 하지만, 신화통신 등 각종 중국어 매체들이 首尔 표기를 채택하면서 현재는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일본어는 일제강점기 시절 京城(けいじょう, 경성)라고 부르다가 1948년 서울특별시로 지정되면서부터 '서울'의 음을 딴 ソウル 로 표기를 바꾸게 됩니다. 재밌게도 이 연재의 제목이 Seoul의 영어식 발음에서 Soul을 떠올렸는데, 일본어에서도 영혼을 뜻하는 Soul이 서울과 똑같은 ソウル 를 쓴다고 합니다.



서울이 순 우리말이 된 유래


'서울'이라는 어휘의 유래에는 여러 학설이 있다. 국어학계에서는 대개 서울이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徐羅伐)'에서 변용된 것이라 합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라벌(徐羅伐)은 역시 고대 한국어의 순우리말을 음역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 한자의 음가가 정확하게 '서라벌'인지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습니다. 신라 시대에 서라벌을 서벌(徐伐)로 표기된 기록도 다수 발견됩니다.


이 밖에 고려의 전신인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의 고유어 지명 '쇠벌'이었는데. 이것이 서울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의 별칭이 '소부리(所夫里)'인데 이것이 '소벌(소홀)'의 음차가 서울이 되었다는 가능성도 전해집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에 어떤 나라의 국도나 수도 지역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일반명사 '서울'이 되었고, 이것이 한반도의 수도 '서울특별시'를 지정하면서 고유명사가 되었다는 점은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이 밖에 고구려의 '졸본', 발해의 '솔빈', 고려의 수도 개성의 옛 이름인 '송악'의 이명 '송도(솔벌)' 역시 서울의 유래 어원 후보들로 거론이 됩니다.

출처: https://brunch.co.kr/@seoulhada/3


북방 승계 주의자들은 고구려를 이야기합니다. 고구려 때 지명에도 현대 한국어 '서울'에 대응되는 단어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예맥계 국가가 존재했던 강원도 북부에서 창고를 '수을(首乙; sul, suri)'이라고 했는데, 이 단어의 한역(漢譯)을 '서울 경(京)'으로 하고, 고상식 창고(고상 건축)는 '부경(桴京)'이라 하고 작은 창고는 '경(京)'이라 한다는 대목이 중국 문헌에 나온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 훈독을 보면 이 단어들은 전부 훈독으로 읽은 것으로 보이고 소, 술, 수리라고 발음된 것으로 보이며 곧 현대 한국어 '서울'에 대응된다는 주장입니다.


조선시대의 기록 중에는 서울을 지금처럼 음차 하여 '徐蔚(서울)'이라고 표기한 것도 발견됩니다. 이를 근거로 이미 예전부터 서울을 '한 나라의 수도가 되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해좌전도'의 경우 '경(京)' 이란 낱말로 서울을 지칭했는데 한국어에서 단일 한자(한 글자)로 된 '지명'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이를 서울이라고 음차 해서 읽었다고 보기도 한다.


서울 토박이 원로들 이야기를 빌리자면,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북악산에 올라갔는데 당시가 3월이라 주변 산에 모두 눈이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산에서 내려다본 한양 땅이 마치 눈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설울'이라고 했다가 서울이 되었다고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원로 배우 오현경 씨도 서울 출신으로 적어도 당시까지 그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음을 이야기합니다.

https://youtu.be/fb9D5yoxTM4


그래서 그런지 연식이 되신 분들이 익숙한 서울시의 초대 휘장은 그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이 휘장은 1947년 당시 서울특별자유시를 둘러싸고 있던 8개의 산인 남산, 와우산,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무학봉, 응봉을 상징하는 8각의 외각 안에 도성을 나타내는 원을 넣은 모습입니다. 참고로 도봉산, 관악산 등이 없는 이유는 이들 지역은 이 당시에는 아직 서울시 행정구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996년에 새로운 휘장이 도입되면서,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오래된 맨홀 등에 아직까지 꽤 남아 있기도 합니다.

서울시 휘장


내 고향 '서울 이야기'


성공과 부의 획득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가 멈추어 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몸을 추스르고 서울을 걸었습니다. 사직에서 종묘까지, 종묘에서 다시 동대문을 거쳐 낙산을 타고 성균관으로 돌았습니다. 그다음 주에는 삼청동에서 재동으로 가회동으로 성북동으로, 그리고 며칠 뒤에는 서촌의 동네 동네를 거쳐 세검정으로 부암동으로 걸었습니다. 그때 처음 서울의 길이 동에서 서로 가면 종로, 퇴계로, 을지로처럼 "로"가 되고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면 1가, 2가처럼 "가"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세종로가 생뚱맞은 이유가 됩니다)


종로, 을지로, 퇴계로를 순서대로 걸어 보고, 남산을 두어 번 넘어 보았습니다. 국립극장에서 타워로 올라 회현동으로, 리라 초등학교를 넘어 해방촌으로 가로 질라도 보았습니다. 연대 앞에서 합정까지는 우습게 느껴졌고, 왕십리와 화양리의 대학가와 어린이 대공원, 어린이 회관을 둘러보았습니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되었고, 강남의 테헤란로를 끝에서 끝으로 걸어 보고 송파대로를 가락시장까지 따라가 보았습니다. 목동과 오목교를 지나고, 봉천동의 고갯길과 사당에서 인덕원의 그 길도 걸어 과천에 있지만 이름이 "서울대공원"인 곳에 이르러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연히 무료급식 논란으로 뜨거워진 지방선거에 시민후보와 동행해 사진과 글을 남기는 자원봉사가 몇 년 뒤에 짧은 공적 경험을 하게 해 주며, 서울의 25개 구의 면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동네들을 살펴보고, 재래시장들을 둘러보고, 걷고 싶은 거리를 그려 보고, 넓은 하늘을 위해 고도의 제한도 도모해 보았습니다. 이제 지난 시간 속에 섣부른 욕심도 있었고, 이해시키지 못한 진심도 있었으며, 뒤집혀 버린 성심이 남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서울'을 생각하면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고향"이 되고, "동네"가 되는 서울 말입니다. 서울이, 마을이 되고 동네가 되는 꿈이 있습니다. 명절이면 고된 차막 힘에도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한 편 부럽기도 했습니다. 나에겐 없고 그들에게 있는 것이 "고향"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고향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서울!

서울은 국제적인 메가 시티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트렌드가 거리에 넘치고, 가장 치열한 도시의 삶이 있으며, 매우 치열한 대치와 갈등의 위태로움을 스스로 눌러 앉히는 매력 있는 도시이자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이런 서울에는 많이 줄었다 해도 900만 이상이 주소를 두고 있고, 경제활동은 천만 이상이 늘 상주합니다. 그 사람들의 소중한 일상이 있고, 지난 시간들의 추억과 기억이 있는 서울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장기 프로젝트처럼 긴 호흡으로 이모저모, 다양하고 두서없는 "내 고향 서울 이야기"  [서울 Soul 說]를 시작합니다. 지난번 "서촌 이야기"가 뜻하지 않은 프롤로그가 되었습니다. 서울 곳곳의 숨겨진 이야기ㆍ역사ㆍ경제, 행정의 특징과 음악ㆍ영화ㆍ예술에 비추어진 모습들을 풀어 볼까 합니다.

https://alook.so/posts/70tqVx


사족)

특히 서울은 광장이 열려 있어 좋습니다.

시대의 역변으로 광장이 닫힐까 가장 걱정입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가슴에 여미는 "서울 노래" 정태춘,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띄워 봅니다.


https://youtu.be/AJfvq8fVR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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