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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pr 20. 2022

딸라 빚 (長文주의보)

달러의 추억

어린 시절 기억중 유난히 시그니쳐처럼 떠 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을지로 어느 골목 허름한 천막 식당에서의 순두부찌개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인생 첫 순두부로 기억이 되는데, 그 보글보글 넘칠 듯 뚝배기에서 열기를 쏟아 내던 찌개의 자태와 함께 다 쓰러져 갈듯 아슬아슬 버티고 있던 식당 천막의 지지대가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장소는 어렴풋이 을지로 인쇄골목 어딘가로 기억이 되는데, 그곳에는 한 달에 한 번 모친과의 설레는 외출의 추억이 함께 있습니다. 일전에 이야기했듯, 부친은 중동 파견 건설사의 직원이었는데, 월급은 한국의 가족들이 수령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당시 중동 파견 근로자는 위험수당 격의 월급여 분의 상여를 받았고, 분양되는 아파트도 청약 0순위를 받을 만큼 괜찮은 돈벌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순두부의 기억


부친의 월급을 수령하러 '한국 자동차보험(현 DB화재)'로 가서 봉투를 받습니다. 당시 부친의 건설사가 동부건설의 전신이라 관계사에서 입출납을 담당한 듯합니다. 그야말로 월급봉투를 받고, 옆에 있던 주택은행에 들려 예금 입금을 합니다. 그러고서는 다시 월급 수령했던 건물로 가서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새까맣게 그을린 아저씨가 반갑게 맞아 주며 '사과 같은 내 얼굴' 볼을 잡아당기곤 합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꾸러미를 전해 주고, 순두부 천막 식당으로 향했던 것이지요.


집으로 돌아와 꾸러미를 풀어 보면, 대체로 장난감 자동차가 있습니다. RC카는 아니지만, 건전지 모터로 주행하고 충돌과 장애물을 만나면 방향을 트는 그런 어른 신발 두어 개 포갠 크기의 장난감 자동차. 모친은 이내 드라이버를 들고 자동차를 분해합니다. 분해라고 할 것 없이 뚜껑을 열면 그 안에 생소한 종이 뭉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딸러", 미국의 화폐이자 기축통화인 달러화가 들어 있었지요.



재테크의 수단 '암'달러


https://news.v.daum.net/v/20220325042701733?x_trkm=t


국세청 직원들이 체납자의 거주 사실을 확인하고 집 수색에 들어갑니다. 베란다에 숨겨 놓은 항아리 안 검은 비닐봉지에서 외화 다발이 쏟아집니다. 100달러짜리 뭉칫돈으로 총 7만 달러입니다. 잠복과 탐문을 통해 찾은 또 다른 체납자 주택. 수색이 시작되자 옷장과 화장대 속에 감춰 둔 현금 다발이 발견됩니다. 고가의 수입차 트렁크에서도 현금이 다발로 나옵니다. 추적팀이 압류한 현금만 8억 원에 달합니다. -기사 본문 중-


모친은 재테크에 수완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현지 수당을 아끼고 아껴 부친은 달러를 인편으로 보내고, 모친은 명동 "준이 엄마"에게 달러 환전이나 달러 일수를 의뢰한 모양입니다. 시효가 한참 지난 불법이고, 편법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름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살짝 경험했었습니다.


"암"자가 접두사로 붙는 거래는 공정 가격보다 비싼 게 상례이지요. 그래서 그 높은 이익을 쉬이 지나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1972년 대규모 금괴 밀수사건이 적발된 후 암달러시장이 철퇴를 맞아 시세가 폭락, 공정환율을 하회한 적이 있었으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고 말았으니 말이지요.


길거리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달러를 직접 사고파는 암달러상의 대부분은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었습니다. 당시 명동시장과 회현동 시장도 별개의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인 모두가 베일에 싸인 인물들이었재고 합니다. 이들은 '준이엄마', '틀집할머니', '안경할머니'등의 별명을 기지고 단골고객과 거래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암달라상

한 때 외환 시장이 암시장이 주류가 된 적도 있어서, 외환 시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암달러 시세를 금융당국이 고시하기도 했지요. 70년대 암울한 역사 '기생관광'과 그 후 중동 건설 경기로 출렁대기도 하였고, 베트남 전쟁이나 정치 변혁기에도 암달러 시세는 천정부지로 솟았다 하더군요.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정치와 경제가 안정기를 찾고, 김영삼 정부의 '금융 실명제'가 제도화되고, 관제의 금융이 시장의 순기능에 편입되면서 암시장의 달러화가 시장으로 나옵니다. 특히 해외여행과 유학이 자유로워지면서, 외환은 재테크의 목적에서 실질적 화폐 교환 기능을 찾게 된 것이지요.


https://news.v.daum.net/v/20220324111055000?x_trkm=t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 등 비우호 국가에 천연가스를 팔 때 대금을 유로나 달러가 아닌 자국 루블화로만 받겠다고 밝히자 루블화 가치가 8% 이상 반등했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도 공급 차질 우려에 18% 이상 치솟았다. 푸틴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이같이 발표하면서 러시아 중앙은행에 일주일 안에 천연가스 대금 루블화 결제 시스템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기사 본문 중-


외신 보도들이 전해 주는 단신으로 '달러화'의 위기를 쉽게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경제의 부정적 요인을 감내하고 있는 두 가지 축, '달러라는 기축통화'와 '플랫폼 기업들의 독과점 성장'을 포기할 수 없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시장과 국가 재정 모두가 적자인 상황이 지속되는데 국가 부도가 절대 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상 밖의 결과

그러나,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주목받지 못한 사실은, 미국이 더 이상 '경제 패권 국가'로서의 '절대 위용'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군사적 전략과 작전이 뻔한 예측 가능한 것으로 낡아 있어서 상대적 열세인 우크라이나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듯이, 경제의 측면에서는 미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었던 경제 제재가 더 이상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지점입니다. 특히, 결제 통화의 기본인 기축통화 자산의 동결이 예전만큼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북한마저 스멀 스멀 레드라인을 넘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심하게 과장하면 '돈을 찍어낼 권리'가 있으니, 자국의 경제 위기를 전 세계에 전가하는 효과로 버티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딜레마"에 빠지지요. 특히 트럼프의 무모한 "America First"가 불을 지핍니다. "무역 흑자"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언뜻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무역 흑자라는 것은 전 세계에 퍼져 있던 달러의 미국 유입을 말합니다. "월스트리트"부터 난리가 나지요. "기축통화"의 위용이 사라지면, 미국 경제와 산업의 민낯이 나오고, 만성 재정 적자와 몇몇 플랫폼 공룡 기업들로 겨우 버티던 산업은 균열이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면, 기축통화 지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유로와 중국에게 "패권국가"의 왕관을 넘겨 줄지도 모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3258765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15일(현지시간) “사우디 정부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부 원유에 대해 위안화 결제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최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해 큰 충격을 받았고,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자신들과 앙숙인 이란과 핵합의까지 복원하려고 해 갈등이 커진 상황에서 이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고 매체는 설명했다. -기사 본문 중-


보통 미국의 금리가 우리보다 낮으면 달러는 시장에 내어 놓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러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금고에 달러를 '긴급 사용 비상금'으로 넣어 놓고 있습니다. 이유는 한반도의 영속되는 군사적 긴장상태, 정치 미숙도로 인한 불안감, 그리고 수출 중심 국가로서의 환율 방어 기제로 원화가 더 가치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 맞고 틀리고의 판단은 이릅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와 경기가 삐끗거리거나 팬데믹 같은 예측 불허의 상황이 단시간 내에 또 온다면, 가계를 유지하려던 '달러'는 그대로 '빚'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러를 위협하는 위안


외환이 그저 통화의 기능이 아닌, 투자와 투기의 대상이 되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지혜롭게 보유, 사용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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