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자들의 뼛속 깊은 잘난 체
'변죽을 울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쓰임새는 원래 다양했지만, 요즘에는 '핵심을 비껴가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는 듯합니다. '변죽만 울린 수사'라는 뜻은 핵심 대상은 건너뛰거나 애써 외면하고 주변 수사를 하는 검경의 정치 수사를 비유하는 단골 표현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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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 박사는 "문과 출신을 위한 '시적 허용'으로 이해해주자는 의견도, 시속인지 초속인지 과학적 '열린 결말'이라는 의견도 주셨지만, 전 접수가 안 된다"면서 이과적 시선에서 본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의 오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기사 본문 중-
최근 시작한 드라마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가 그 변죽울림의 요체로 떠 오르고 있습니다. "변죽"이 암시하듯, 논란이 되는 건 드라마의 내용이나 인물이 아닌 제목에 들어간 "속도 493km"에 기인합니다. 이 표현을 언뜻 들으면 493이라는 숫자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만 작동하지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가방 끈이 무지하게 긴 이학, 공학 박사님들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제목의 "속도 493km"라는 표현은 상식과 과학적 명제에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논쟁의 댓글을 보면, 속도는 방향이 포함되므로 속력이 맞다는 '이과적 상식'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물론 틀렸다며 상식을 엎어 버리는 포스트 모던적 반론을 주장할 생각은 아닙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속도'는 벡터(Vector: 방향성을 갖는 물리량)가 맞습니다. 개념의 정의는 약속이고 합의의 결과로 우린 크기와 방향이 함께 있을 때를 속도라고 정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학(물리)을 벗어나도 그 합의와 약속은 불변의 진리이고 궁극적 도그마가 되는 것일까요? 저는 공대와 문과대를 두루 경험한 입장에서, 언어적 표현의 범주라면, 예전부터 속력이 아닌 속도로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속도는 방향이 포함된 벡터라는 것으로 언어적, 심미적, 인문학적 심오한 고찰이 담겨 있지 않은 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1. 물체가 나아가거나 일이 진행되는 빠르기
이 설명에서 '방향'의 근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문학적 이해력, 문해력이 조금 더디더라도 시점을 조금 더 앞으로 끌고 나오면 다른 시각이 펼쳐집니다. 493km 앞의 "너에게 가는 속도" 여기까지 시야를 좁혀 봅니다. 만약 "너에게 가는 속력"이라고 쓰면 어떤가요. 왠지 모르게 구려 보입니다. "속도"가 제격이라는 말입니다. 이 표현 대신에 '속력'이나 '시속'이나 '체감 최고 속도'같은 단어를 썼다면 빨간펜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상의 언어는 유통되는 빈도와 수용성에 따라 '관용'을 넘어 '대안'이 되기도 하니까요. 단어 자체가 결함이 있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속도를 한자로 쓰면 速度(빠를 속, 법도 도)가 됩니다. 빠른 정도에 대한 표현입니다. 다만 물리학적 혼동을 위해 학문, 학습의 영역에서의 구분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영어로 쓰면 속력은 speed, 속도는 velocity가 됩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에게서 조차 velocity라는 말을 일상에서 쉽게 들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일상의 말에서 '빠르기'에 대한 표현에 방향은 늘 육지에 두고 온 토끼의 간이 되고 맙니다. 일상은 교과서나 전문서적, 논문의 글자들로 다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속도라는 단어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방향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리학을 엄청 사랑하거나 그런 과학적 탐구의 환경에 오래 머문 사람들이지요. 그들의 머리에 각인된 것에 대한 지적 반작용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넌 틀렸어"라든지, "상식이 없는 작가"라는 우월적 자의식으로 타인을 폄하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위험합니다. 배운자들의 '잘난 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니까요.
드라마도 일종의 '문학의 연장'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인 생각은, "너에게 가는" 다음에 올 단어는 "속력"이 아니고 "속도"가 더 어울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에게 가는'이라는 "방향"이 문학적 댓구로 있다고 한다면 더 그러하다고 해석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 문제는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인에서 거리가 아닌 속도니까 493km/hr로 쓰는 게 맞는 지적에 부딪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너에게 가는 속도 493 킬로미터 퍼 아우어"? 무리한 지적이 아닐 수 없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일상용어로 치환은 문학, 영화, 연극, 뮤지컬, 그리고 드라마의 작화와 제목에 늘 고민거리가 됩니다. 물론 창의적 점수에서 <초속 5센티미터>라는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제목을 참고했을 것 같아 감점 요인이긴 합니다.(작중에서 벚꽃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cm이라고) 벚꽃의 낙화는 직선도 아니고 퍼지의 비정형 나선 구조일 텐데, 벡터는 어찌 구할까의 고민보다는 '낭만적이야'하는 감탄이 앞서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이런 정도의 아쉬움은 있을 수 있습니다. '표기만 493km/h 정도로 써주었으면' 딴지스러운 태클이 적었을 텐데 말이지요. 표기가 어떻게 쓰여졌어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493킬로'라고 읽을 테니까 말이지요. 하기야 km든 kg이든 미터법에서 길이, 속도, 무게 등의 인지만 되면 모두 '키로'라고 읽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연유에서 엄한 제작진에 대한 근거 미약한 짧은 지식 비판이나 문과생들이라는 무턱 댄 비판은 억울할지도 모릅니다.
일상은 일상의 나름이 있듯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면 언뜻 알 수 없는 단위들의 지표들이 몸상태를 말해 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들과 상담할 때마다 그 숫자의 단위를 꼬박꼬박 풀 네이밍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혈압만 생각해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80에 120입니다"라고 하지 혈압 단위인 mmHg을 '밀리미터 오브 머큐리'라고 읽는 의사나 간호사는 비정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혈압 단위의 명칭을 처음 알았다는)
과학은 정확한 약속과 규칙을 중시합니다. 이과적 사고라는 것은 그 원칙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학이라는 것이 철학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요? 물질에 대한 근원적 탐구에서 시작하여 결국 서로의 규격과 법칙을 약속, 합의하는 것이지요. 1미터가 어떤 이유에서 기준 도량이 되었으며, 야드와 피트, 파운드는 왜 배척을 받는지, 그리고 한국의 치와 자, 평의 개념은 대륙세력의 미터가 아닌 해양 세력의 야드 법에 가까운 것은 어떤 과학인지 아무리 실험실에서 머리를 짜 내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정치와 사회의 변화가 역사라는 시간을 타면서 정해진 상호 간의 약속이기 때문이지요.
이 처럼 '관용적' 표현은 잘못된 습관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의 합의가 시간이라는 방향성을 가지면서 서로가 인지하는 약속이 되는 것이니까요. 때 아닌 문이과 논쟁에서 정작 불편한 것은 과학적 규정에 무지한 제작진이나 문과생들의 옹호도, 그것에 대한 이과생들의 반론과 비판도 아닙니다. 자신의 가벼운 생각을 굽힐 생각 없이 '나는 공부를 길게 한 전문가'라는 "식자의 자의식"이 정말 불편합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배경만으로 떠는 '잘난 체'는 여전히 재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는 틀렸어"를 주장하려면 명확한 다방면의 검증이 과학자의 기본 태도일 텐데. 다양성이 중시되는 실제 사회에 자신만의 자신만의 잣대로 폄하하고 비아냥하는 태도는 늘 불쾌합니다.
세상은 그러지 않아도 팍팍한데 이란 일들에 딴지 태클이 들어오면, 더 삭막해지지 않을까요. 덕분에 드라마는 관심을 끌었으니, 제작진은 좋아할까요, 속상해할까요.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일단 "돈"이 제일 먼저니까요. 우스개 소리로 마무리해 봅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퍼 옴-
이과생이 과속을 하다가 경찰 단속에 걸렸다.
"속도위반하셨습니다."
"속도위반이 아니고 속력 위반일 테지요. 속력이 얼마나 됐습니까?"
"180km 나오셨습니다."
"180 킬로미터 퍼 아우어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문과라."
"문과면서 사물에 존칭을 사용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