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가 아닌 흉내의 위험성; 모방을 빙자한 모조의 욕심
심리학에서 모방의 고전적인 정의는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해당 행동을 하는 것을 배우는 것(Thorndike, 1898; Byrne, 2002에서 재인용)’이라고 정의합니다. 가장 쉬운 예가 부모를 따라 하는 아이의 행동이 그것이지요. 타인의 행동을 따라 함으로써 무언가를 터득하는 것은 학습의 주요한 방법이 됩니다. 인류가 만든 커다란 조직 유기체인 사회의 작동 원리 중 '학습'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 학습의 가장 유용한 방법 중 하나가 '모방'이라는 것은 증명된 지 오래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 삼촌 뻘 되는 현인들은 '예술'을 궁극의 이데아를 흉내 낸 모방이라 칭하며 진짜를 빙자한 가짜라고 나무라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의 거대한 핑계가 되는 미메시스(mimesis)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철학적으로 '재현'이라고 하던지, 미학적으로 '모방'으로 부르던지 큰 상관없는 이 개념은 그저 '베끼다'라는 의미의 흉내내기를 일컫는 말은 아닙니다. 원초적인 진리를 표상으로 나타낸 것이 실제라고 믿는 사물이고, 그 사물을 다시 재현하는 여러 활동에 심미적 의도가 가미된 것이 예술이라는 본질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다시 쉽게 이야기하면 예술은 실제 하는 세상만사를 관찰하여 미적 활동으로 다시 표현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미메시스라는 모방의 장치는 예술의 시작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세상사라는 본질을 베껴내고 흉내 낸 산물이라는 것, 그래서 모방이란 근원적으로 예술이라는 범주에서 주요한 학습의 도구이고 생산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방과 따라 하기의 행동은 구성원들의 동의, 사전의 인지, 그리고 재생산에 따른 새로운 의미 부여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마쥬, 헌정, 리메이크, 리부팅, 프리퀄링, 스핀오프 등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내는 활동에도 이 '모방 학습'은 의미 있는 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배급한 한국 드라마 시리즈 <종이의 집: 공동 경제구역>은 같은 OTT 플랫폼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스페인 드라마 <La Casa de Papel>의 한국판 리메이크작입니다. '리메이크 작품'은 우리 영화, 드라마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가 <7인의 사무라이>를 다시 이야기한 <황야의 7인>이 있고, 몇 해전 개봉한 <스타 이즈 본>으로 펼쳐지는 세 번의 리메이크가 있었던 <스타 탄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황하는 칼날>, <용의자 X의 헌신>,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소설 기반의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 등 제법 많은 일종의 모방 작품들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보통의 리메이크는 '변용의 장치'라는 것을 작동하게 해서, 시대, 장소, 사회상, 정치환경, 기술 발달 등의 시간과 환경에 따른 변화를 보정합니다. 흔히 예술, 미학에서 '미메시스'를 이야기할 때, 본질을 따라 표현하지만 거기에 일종의 '속임수'를 넣어, 실제 하는 본질에 더해 감성을 유발하는 장치가 바로 이 '변용의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혁명과 민중의 처참한 삶이 모티프가 된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는 억울한 옥살이의 좀도둑 장발장과 그의 일생에 프랑스혁명을 연결하며 실제를 모방한 서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서사에 운율과 가창, 연극적 요소를 넣어 멋진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또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리메이크는 자유롭게 받아들이되 무언가 새로운 감동과 충격을 주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의 유무가 작품성을 가르는 척도가 되곤 합니다.
<종이의 집: 공동 경제구역>의 미메시스는 참 안쓰럽습니다. 우선 작품의 큰 척추를 이루는 작품정신과 철학의 기조를 제작진이 설익은 식견으로 해석한 티가 납니다. 원작은 '비대해진 자본 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비판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천박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와 스페인 내부에서 붉어지는 여러 양극화와 차별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에 맞선 인물들의 범죄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하는 '시대정신'이 들어 있어서 환호를 받았습니다. 작품의 긴밀성, 핍진성, 개연성이 떨어진다 해도 감안이 되고도 남는 용기 있는 주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리메이크 작품에서는 아직(파트 1이라고 하니, 아직) 무엇이다 말할 수 있는 '시대정신'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통일"이라는 이슈가 과연 지금의 '시대정신'인지는 의문이 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한국의 무엇'이라는 것에 지나친 강박이 발견됩니다. 그래사 오히려 리메이크의 얕은 수인 '옷 바꿔 입기'에만 몰두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위적인 남북 갈등만 표상적으로 드러내고, 연기 함량 미달의 연기자들의 사투리는 예전 검은 머리 미국인이 한국인 역을 맡아 어눌한 한국어 대사를 하듯 어색하기만 합니다. 거기에 더해 캐릭터도 기존 스페인 드라마의 인물들을 그대로 차용하기 바빠 보입니다. 어색하다 못해 과장되어 불편한 그들의 흉내내기는 자꾸 '코미디 빅리그'가 떠오를 뿐입니다.
제목이 되는 'La Casa de Papel'은 직역을 해서 '종이의 집'이지, 원래는 '조폐국'을 이야기하는 스페인어입니다. 빈 종이를 권력을 지닌 화폐로 만들어 내는 조폐국은 '종이'가 자본주의에서 권력을 입는 신묘한 프로세스를 일으키는 장소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주제의식과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묵직하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한국 리메이크 작에서는 그 주제의식이 퇴화되니 한옥의 거죽을 띈 허술한 장소마저 한없이 가벼워 보입니다. 판권과 배급에 모든 여력이 투입되었는지, 배우들의 캐스팅은 아쉬운 미련이 끝이 없이 다가옵니다. 특히, 유지태, 김윤진, 김지훈, 이원종의 연기는 아쉽다 못해 짜증을 유발하고, 이 콘텐츠가 글로벌 스트리밍 된다는 사실에 한없이 부끄러워 지기만 합니다.
원작의 모스크바와 덴버 부자는 '바스크'출신이 암시됩니다. 스페인 안의 작은 나라라고 일컫어지는 천시와 차별, 그리고 탄압과 폭거의 상징이 되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리메이크에서는 부산인지 대구인지 알 수 없는 경상도 사투리로 말합니다. 원작의 주제 의식에서 왜 스페인의 '주류''가 아닌 부적응자, 이주 외국인, 불법 체류자, 성소수자, 그리고 바스크 사람이 팀을 이루었는가를 알 수 있지만, 한국의 작품에서는 그저 '한국스러움'만 드러내기 바빠 보입니다. 모스크바와 덴버가 목포나 벌교 사투리를 썼다면 더 다가올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처럼 디테일을 아주 많이 놓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개취-개인의 취향'이라고 하며, 원작보다 재미있고, 익숙한 한국적 상황이라 과장된 연기로 불편한 스페인, 라틴드라마 보다 재미있게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주위에서는 혹평 일색입니다. 연기력에서 시작하여 캐릭터의 비선명성, 그리고 시대정신이나 주제의식의 부재로 나사 빠진 톱니바퀴 같은 연출, 부끄러운 촬영과 미술, 장치 등이 주의력 결핍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이 동의되고, 더하고 싶은 의견은 '작화의 핍진성 결여'를 가장 큰 결함으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럴듯한' 연기와 연출로 '그럴지도 모를' 감동을 주는 것이 소위 말하는 'K-드라마'의 최대 강점이었으니까요.
원작 스페인 드라마는 이야기의 얼개가 허술합니다. 혹자의 평대로 스페인 드라마의 투르키가 과장되고 극화된 연기와 연출, 그리고 다소 그로테스크 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로 그 엉성하고 어색한 것을 덮어 버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거부감이 덜 드는지도 모릅니다. 낯선 인종과 배경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그 숭숭 뚫려 버린 엉성한 이야기를 감추어 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한국식 리메이크의 시도에는 보다 촘촘한 재구성과 작화, 인물 설정, 주제의식의 편제 등 '변용의 장치'가 더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장치가 사라진 흉내내기는 모방, 미메시스를 빙자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최근 한국 드라마 두 편을 의미 깊게 보았습니다. <나의 해방일지>와 <우리들의 블루스>가 그것입니다. 두 편 모두, 오리지널리티라고 하는 고유한 창조성이 가장 앞서기도 했지만,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야기의 힘'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제와 소재의 참신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힘, 작품의 주제의식이 이 시대와 조우하여 대화하는 듯한 연기, 그리고 있을 법한 이야기가 그럴지도 모르는 감동을 던져 주는 촘촘하고 고민 깊은 작화(글쓰기)와 그럴듯한연출이 그 근간입니다. 그 변별의 방법은 등장인물의 대사로 상황을 중계방송하듯 억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개인의 독백은 방백이 아닌 자신과의 대화애 그친다는 것, 그리고 대사 이외의 지문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최근 아쉬웠던 <지리산>이라는 드라마와 참 대비되는 지점이고, 이전 참 좋았던 <나의 아저씨>와 <눈이 부시게>와 닿아 있는 지점입니다.
한국 드라마의 힘은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일, 트렌드, 천재성, 유형이라는 껍데기가 아닌 촘촘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지금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종이의 집: 공동 경제구역>은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를 목적하여 제작했기에 장점도 있지만, 한계가 두드러집니다. 바로 '한국적인'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 그리고 반대로 한국 시장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의 성원을 받을 가장 안전한 장치 구현이라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 시절 미술시간에 명화의 프린트를 베껴 습작하던 '임화'수업이 자꾸 떠오르는가 봅니다.
흥행의 문법이란 것은 그저 결과론일지도 모릅니다. 대중음악의 소위 '황금코드'라는 것도 의도하기 시작하면서 탄로 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와 이야기의 창작도 그러할 것입니다. 남들의 요행을 정리된 공식이라 생각하며 쉬운 길이라 생가하는 순간, 진리를 힘겹게 모방하던 그 예술의 본연은 사라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모방은 모조가 아니니까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까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말해 준 마틴 스콜세지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