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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Oct 11. 2022

정말 조선은 전쟁 한 번 없이 나라를 내주었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일본은 '착한 이웃'일까


한미일 군사 훈련에 대해 연일 여야의 공방이 시끄럽습니다. 주적의 위협에 이웃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윤 정부의 설명은 단편적으로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전제가 있습니다. 그 이웃이 온전하게 선의적 신용이 있을 태 그러합니다. 일본은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일본의 21세기 소원은 '정상 국가'로의 회귀에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를 정식 보유하는 나라로의 복귀입니다. 자국을 보호하고 방위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지난 과거에 진심 어린 성찰을 보여 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는 이유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우려를 '주사파의 죽창가'라 몰아세우는 것이 지금 여당이라는 보수 정당의 목소리입니다. 주사파란 말도 참 옛스럽지만, 외교 국방에 대한 우려를 무조건 북한 탓으로 돌리는 인식도 지긋지긋합니다. 그런 와중에 여당 비대위원장이라는 양반이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조선은 내부의 지란으로 나라를 내어 준 것이지, 일본이 강제로 침탈한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이야기였습니다. 친일파의 후손으로 의심받는 자의 언사라 해도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닙니다. 하룻밤 요란하자 해명이라고 내어 놓은 것이 더 이상해 보입니다. 한 번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4760600?sid=100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신의 발언을 두고 정치권의 비판이 거세지자 "전쟁 한번 못하고 힘도 못써보고 나라를 빼앗겼다는 얘기"라고 반박했다. -기사 본문 중-


조선은 전쟁 없이 나라를 내주었나.

(역사 작가인 이문영 선생의 글을 토대로 윤문 해서 씁니다)


일본의 무력을 앞 세운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砲艦外交)에 대한제국 정부는 확실히 선전포고 같은 거 없이 넘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싸움, 전쟁 없이 이 나라를 내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일본제국과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후대는 그들을 의병이라고 부릅니다. 이 의병의 항전을 '야사'로 취급하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정진석 의원이 말한 임진왜란의 '웅치전투''도 의미 없는 야사가 되고 맙니다.


일제 침략기 의병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분류됩니다.


전기 의병 : 1894~1896.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하여 봉기가 대표적. 일본 낭인의 왕비 살해, 단발령으로 대표되는 개혁책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발생. 주로 양반들에 의해 주도.


중기 의병 : 1904~1907. 한일협약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근왕의 기치로 일어남. 전기 의병운동 및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던 농민들 중 일부는 무장 농민 세력화했는데 이들이 수행한 게릴라전이 밑바탕이 됨. 을사늑약의 체결로 의병은 더욱 확대. 신돌석 등 평민 의병장이 등장.


후기 의병 : 1907~1915. (그런데 한반도 안에서 의병 운동은 1911년으로 종결.)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인해 군대의 봉기로 촉발.


후기 의병의 기록들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1907년 7월 20일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7월 25일 정미 7 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맺어지면서 일제의 통감 정치가 실시되었습니다. 8월 1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 대장 박승환의 자결로 폭발된 군대의 봉기는 8월 5일 원주 진위대 제5대대의 봉기로 이어지고, 각지 진위대가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9월 2일 원주 의병은 전 의병장 이인영을 추대하여 관동 창의군을 만들고 각지 의병장들에게 연합부대 결성을 촉구했습니다.


12월 초 1만여 의병은 13도 창의대를 결성했습니다. 각지를 대표하는 의병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라도 - 문태수

충청도 - 이강녕

경상도 - 신돌석

경기와 황해도 - 허위

강원도 - 민긍호 (민씨긴 한데 척족은 아님)

평안도 - 방인관

함경도 - 정봉준


이들은 한양 수복을 위해 진군하기도 했는데 1908년 1월 15일, 허위의 선봉대가 동대문 앞에서 일본군과 교전해서 패배했습니다. 대책을 논의하던 중에, 1월 28일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의 부음을 듣고 문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돌아가면서 진격작전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13도 창의군은 중심을 잃고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의병장 이인영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체포되어 9월 20일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진격을 앞두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을 일본 쪽 조사관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인영은 충과 효는 동일한 것인데 효를 버리는 금수가 되면 어찌 충을 다할 수 있겠는가라는 지극히 유교 꼰대적인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조선 유교의 한계입니다. 마치 안식일에는 싸우지 않는다고 하여 적이 쳐들어오는데도 싸우지 않았던 이스라엘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치를 위한 이념이자 종교가 다리를 잡은 것이지요.


13도 창의군은 깨졌지만 의병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투쟁이 벌어졌고 일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선무, 회유는 물론, 자위단이라는 일종의 민방위 부대 조직, 한국군으로 이루어진 한국 순사대 조직(한국 순사대는 의병장 252명을 살해하는 "업적"을 세운다), 헌병대 증원(1907년 2천이었던 헌병대는 1908년 6천으로 늘어났다), 헌병 보조원 채용(4천여 명) 여기에 경찰 5천까지 동원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병을 잠재우지 못한 일제는 1909년 5월 2개 연대(3,442명)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오게 됩니다. 이 2개 연대와 위에 말한 여러 조직들이 힘을 합해 9월 1일부터 2개월 간 "남한대토벌"을 시행하게 됩니다. 가장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호남의 의병을 초토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10월 30일 종료된 남한대토벌로 420명을 죽이고 1,687명을 체포했습니다. 의병장 61명이 체포되고 그중 23명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일본군은 의병 투쟁을 지원하는 민간을 철저히 탄압하여 의병과 민간 간의 연결고리를 깨뜨렸습니다. 이로써 결국 호남 지역에서 의병의 뿌리가 뽑혔던 것입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은,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17,968명이 죽임을 당했고, 3,64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994명이 체포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숫자가 적다는 건 결국 죽이는 게 목표였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들은 포로로 잡힌 의병을 배에 태우고 불 질러 죽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측이 작성한 이 통계는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몇몇 조사에 의하면 상당한 숫자의 전사자가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비전투원인 주민에 대한 학살 역시 심심찮게 저질렀습니다. 일본군은 전국에 걸쳐 6,681호의 민가와 36개의 사찰을 불태우는 등의 무자비한 진압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남한대토벌로 의병투쟁의 중심은 황해도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점차 북으로 올라가 무력투쟁 세력은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지게 된 것이지요.

싸워낸 사람들

전기 의병의 경우 얼마나 전사했는지조차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중기 의병 시기에 일본은 한국에 한국주차군을 주둔시킵니다. 1904년 4월에 1개 연대 4개 대대 2개 중대의 4,272명이었습니다. 1905년 10월 제13사단(보병 2개 연대와 1개 대대 - 함흥 주둔)과 제15사단(편제 복잡해서 생략, 평양 주둔)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보병 제30 여단, 기병 제19연대, 야전포병 제21연대를 남부 수비대로 두었습니다.


1907년 7월에 정예군인 보병 제12여단 3,449명을 또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군대 해산 후 일어날 봉기를 대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의병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임시 파견 기병대 4개 중대 544명을 증파했습니다. 이 부대는 기동력을 바탕으로 남한대토벌작전에서도 주력부대로 활동했습니다. 1908년 5월 보병 2개 연대를 또 지원 요청하여 원산과 마산에 들였습니다. 이렇게 병력을 계속 증파한 것은 의병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싸워낸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렇게 싸웠습니다. 정부의 체계적인 무장 항거가 없었다고 민중들의 전투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당 비대위원장의 말처럼 무능한 황제와 사리사욕 가득한 관리 대신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디. 정부의 지원이 없이도 대책이 없이도 민초들은 외세의 침략에 내 가족, 마을, 고장, 나라를 위해 대항한 것입니다. 싸움 없이 나라를 내어 주었다니요. 친일파 대신과 꼭두각시 왕의 아주 구차한 변명일 뿐입니다.

변명이 더 구차하다


오늘 당장 이 나라에 전쟁이 난다면, 우리의 이웃 일본은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까요? 우리 청년들 군대들이 앞장서고 민중들이 뒤에서 버티는 전쟁 중에 이 나라 대통령의 무능과 그 관료들의 역사관이 어떻게 작용될지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5년이 아니라 지난 50년을 까먹어 버리는 위정자들을 늘 견제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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