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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01. 2022

'애도'는 '침묵'의 다른 말이 아니다

초혼, 그리고 학생부군신위

애도는 '초혼'이라는 곡소리부터 시작된다


젊은이들은 무릇 태어난 날이 죽을 날 보다 훨씬 가깝다고  여기며 삶을 누리고자 합니다. 어느 누구도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삶을 마무리할 것이라 여기기 쉽지 않습니다. 꼭 젊은이들만 그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빨리 죽어야 한다며 매일 타령하는 노인네의 빈말 가운데에서 조차 '죽음'의 그림자를 찾기 쉽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본디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그 죽음을 마주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허망함은 크기에 상관없이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젊음의 날을 즐기기 위한 외출이 마지막 걸음이 된 156명의 영혼들과 그 남은 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저 슬픔을 부여잡고 흐느끼며 숨죽여야 할까요? 본디 깊은 슬픔은 조용할 수가 없고 절대 침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


학창 시절 한 번쯤 접해 본 김소월의 <초혼>이라는 시입니다. 초혼(招魂)이란 말뜻 그대로 혼을 부르는 한국 고유의 장례 풍습입니다. 유교 경전 <예기>에 명시된 유교 제례의 가장 첫 순서로 초혼 이후에 비로소 곡소리와 함께 장례가 진행됩니다.


다른 말로 고복(皐復) 의식이라고도 하고,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행위를 합니다. 남은 자들의 마지막 미련의 최선을 다하는 의미입니다. 망자가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해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고 세 번 부릅니다. 주로 사극에서 왕이 사망하면 내관이 궁궐 지붕에 올라가 곤룡포를 세 번 휘두르며 상위복 하고 외치는 행위가 바로 초혼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 초혼, 고복의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소쩍새를 '초혼조'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들의 슬픔은 절대 '조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초혼 이후 장례 내내 '곡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상가를 가득 메운 곡소리에 따라 남은 후손들의 효심과 예의가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허례허식의 시대에는 전문 '곡소리'를 하는 전문가를 고용하기도 했으니까요. 요즘도 천주교식 장례에서 '연도'라는 한국식 곡소리에 맞춘 위령기도가 장례 내내 울리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 됩니다.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


한국의 장례는 슬픔을 최대한 표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곡소리뿐 아니라 최대한 많은 문상객들이 음식과 술을 나누며 왁자지껄 떠드는 상을 선호합니다. 1996년 개봉한 박철수 감독의 영화 <학생부군신위>를 보면 그 모습들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각지각처에 흩어져 다양하게 살고 있던 친지 지인들이 분잡스럽게 상가ㆍ빈소로 몰려듭니다. 몇십 궤짝 인지도 모르는 소주와 맥주 박스가 관처럼 쌓이며, 죽음처럼 적막했던 마을은 갑자기 오일장이 서는 장터처럼 활기가 넘치고 잔치집처럼 시끌벅적 댑니다. 돼지 멱따는 소리와 곡소리가 뒤범벅인 상가는 '조용'할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마주하는 모습, 슬픔을 표현하는 모습은 저마다입니다. 상을 맞은 어머니는 말이 없습니다. 행랑방에 사는 악동은 막대기 하나를 들고 초상집을 아수라장을 만들고 맙니다. 기독교 신자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하고, 보험판매원은 이때다 싶어  팔고, 미루었던 부탁들이 오고 갑니다.


망자가 중심인 내세관이 분명한 기독교 문화권과 달리 유교권의 장례는 '남은 사람'들이 중심이 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장례식도 만나고 먹고 마시며 세상일을 이야기하는 삶의 연속일 뿐이기에 망자의 느닷없는 부재는 극도의 슬픔 표현으로 떨쳐야 합니다. 망자의 극랑왕생과 더불어 남은 자들의 일상을 위해서라도 장례는 되도록 화려하고 시끄럽게 슬퍼하는 것입니다.

학생부군신위

'학생부군신위'는 장례나 제례 때에 신위-위패에 쓰는 말입니다. 흔히 벼슬이나 직함, 임용의 이력이 없는 사람들, 즉 필부필부들의 신위를 쓸 때 통상적으로 '학생'이라고 지칭합니다. 아직 배움이 남은 자라는 해석이 되니, 지금 오늘날의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많은 젊은이들의 위패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0대부터 30대의 청춘들, 학생들, 그리고 무언가 이루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고에 쓸 이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루하루 벌어 귀국만 꿈꾸던 스리랑카 이주 노동자, 국가의 의무를 다하다 첫 휴가를 나온 일등병, 그리고 취준의 지옥에서 잠시 숨 돌리려 나온 경찰 지망생.


이들의 죽음에 애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애도'는 '침묵'이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리쳐야 합니다. 그것도 큰 애도임에 틀림없을 테니까요.



https://naver.me/GrqzfaLb


애도는 판단이자 결심이고,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지를 찾는 행위다. 그러나 이 정부가, 그리고 혹자가 원하는 유일한 형태의 애도는 침묵뿐인 것 같다. 따지지 말고, 조용히 슬퍼만 하라는 것. 하지만 침묵은 애도의 형태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다. 함께 슬퍼하는지, 고통스러워하는지, 피해자들의 억울함에 공감하는지조차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서다.

이번 사건이 잊히지 않기 위해서, 기억되기 위해서는 계속 소리쳐야 한다.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왜 일어났는지'도 따져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안전망을 더 촘촘히 만들기 위해서는 삿대질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함께 공연장에서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조용한 방 안에서 홀로 속삭이며 기도도 할 것이다. 그것들이 나는 모두 '애도'라고 믿는다.

-기사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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