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아져 가는 외교 스탠스
'공급망'이 대체 뭐길래
최근 '공급망'이라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선 단어가 연일 보도 매체를 채우고 있습니다. Supply Chain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인데, 일반 산업계에서는 익숙하고 흔한 용어가 됩니다. 현대 산업, 특히 아직 주를 이루는 제조업의 경우, 상품과 제조물의 모든 공정을 한 업체에서 만들지 않습니다. 부품, 소재 등을 외부에 위탁하거나 매입하여 완성물을 만드는데, 이와 관련된 회사들 간의 구조와 네트워크를 말하지요. 즉, 공급망, 공급사슬은 원재료, 소재를 구하고, 이 원재료를 부품 같은 중간재나 완성물 최종재로 만들고, 그 결과 최종 제품을 최종 고객에게 유통시키기 위한 조직 및 비즈니스 프로세스의 네트워크를 말합니다.
국내로 한정하면 '삼성 하청업체', '현대차 벤더' 등으로 익숙한 원ㆍ하청구조가 공급망의 일례입니다. 이처럼 공급망은 '망'이라기보다는 '사슬 구조'가 더 타당한데, 이유는 물질, 돈, 정보가 양방향으로 흐르지만, 분명하게 상류 지대와 하류 지대가 나누어지듯, 계층과 주도의 권력이 존재하게 됩니다.
"공급사슬의 상류(Upstream) 지역에는 공급업체와 그 공급업체의 공급업체가 있으며, 업체 간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포함된다. 하류(downstream) 지역은 최종 고객에게 제품을 유통하고 전달하기 위해 조직과 프로세스로 구성된다." -Laudon, Kenneth C, Jane P.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12/E: Managing the Digital Firm, CHAPTER 9, 366,370 P》. Pearson Education Asia-
최근 이야기되는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 관리는 세계 경제가 당면한 과제 중 첫 번째로 꼽힙니다. 기업은 효율성과 안정성을 위해 리스크 관리를 합니다. 공급망도 예외는 아닙니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되니, 공급자도 복수로 이중화하고, 재고도 안정 수준을 유지하며, 여러 돌발 변수를 예측 대비합니다. 모두 비용이지만, 만약에 돌발의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더 막대한 비용의 지출은 물론, 기업의 존폐까지 고민할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세분화되고 더 촘촘하게 공급망의 효율성을 높일수록 리스크는 커지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국제 통상의 황금기 ‘골디락스’ 기간 기업들은 리스크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한 것도 사실입니다. 비용 효율이 담보된다면 이 나라 저 나라로 넘나드는 중간재 무역은 필요충분조건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공급망 리스크는 지진, 홍수 및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공급망 훼손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의 위기는 특정 국가나, 경제 세력들의 정책, 전략의 변화로 인한 인위적 충격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공급망이 확충되던 시기에는 국제정세도 대체로 안정감이 유지되었습니다. 냉전의 시대가 종식되고 유일한 최강국 미국 일극 체제가 형성되면서 그러합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아량도 넓어졌지요. 글로벌 패권국의 위용으로 WTO(국제 무역 기구)를 출범시킵니다. 이 규범 준수와 항로의 군사적 안전도 보장하는 등 일등국가로서의 '공명심'을 발휘하던 때가 있었고 '골디락스'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업들은 핵심이익 침해 위협이 줄어들자 해외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양극 체제'의 밑거름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지요. 바로 '중국의 부상'이 시작됩니다. 중국은 이념적 색채를 흐릿하게 해 가면서 세계 통상의 가운데로 진입합니다. WTO 가입을 위해 자국의 경제, 산업 발전과 해외 자본 투자 유치에 나선 지 얼마 안 가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고, 곧 세계 1위 무역 국가로 변모한 것이지요.
시진핑 주석 하의 중국이 이념적 색채를 강화하고 있고, 미국은 권위주의 국가가 유지하는 비시장경제적 요소를 국제무역질서에서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수차례 밝혔다. 여러 아시아 국가가 미-중으로부터 줄 서기 압력을 받고 있고, 신냉전과 디커플링의 체감도는 국가별로 다를 것이다. 미국과의 안보 협력이 절실한 국가는 미국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위상 약화와 중국의 부상을 의미한 사건이고 반환점이 되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점차 거세졌습니다. 이를 두고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 교수는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s Trap)"이라는 말로 신흥강국에 대한 기존 강국의 대응이 전쟁을 야기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기어이 중국은 금기시되던 미국의 달러 패권의 기축통화 독점도 비판하게 되었고, 미국은 중국의 체제 경직성과 인권 문제로 변죽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미중 무역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글자 그대로 '인도'와 '중국'사이의 큰 방주형 반도를 이르는 말입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그리고 말레시아+싱가포르 등 다수의 국가가 있고, 인구 2억 5천~3억(말레시아 포함), 면적 2백3십만 평방미터로 많은 인구가 사우디 아라비아 면적 정도에 모여 사는 인구 밀집의 반도입니다.
영문 위키백과에는 Mainland in Southeast Asia라고 명기하듯, '동남아시아의 본토'로 이야기됩니다. 여기에 인근 도서국가인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아우른 경제 국가 연합체 '아세안(ASEAN)이 최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지정학'이라는 낡은 외교, 통상, 안보의 개념보다 더 실질적인 경제와 무역, 그것을 위한 공급망 패권의 문제까지 첨예한 갈등과 잇권 다툼의 목표와 수단으로 대두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름부터가 '차이나'가 포함되어 있는 지역, '정화의 원정' 이후 중국계 자본이 주무르는 지역이 이곳 인도차이나입니다.
현재 중국을 중심으로 한 ‘팩토리 아시아’가 조정되고 있다고 이야기됩니다. 중국 중심 공급망의 재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로 인해 동아시아 생산 벨류 체인에서 중국의 비중은 상당 부분 줄어들 것입니다. 중국은 '공장'에서 '헤드쿼터'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미국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빈 공간을 어느 국가가 차지하는가가 아시아 산업지도의 내일이 될 것입니다. 이미 눈치 빠르고 정보가 많은 일본은 지리적으로 아세안에 가깝고 심정적으로 일본에 가까운 대만과 손잡고 4차 산업 협력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또한 태국, 필리핀 등 일본 기업이 대거 진출한 국가와의 공급망을 확충하고 있는 중입니다.
위의 인포그래픽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은 '중국 중심 공급망'에 속한 나라입니다. 미국 중심 사슬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공급망을 포기할 경우 아주 큰 비용의 대가를 감수해야 합니다. 독립적이라 자존심이 남은 일본과 미국 공급망에 귀속된 호주, 인도를 제외하고는 미국의 '반중국' 동맹에 손을 넣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중국 업체들을 고립시키고, 중국의 중간재, 소재를 사용한 물건의 수출입을 통제(IRA도 그중 하나)하며 중국과의 손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공급망이라는 것은 규모의 생산활동과 지속적인 투자로 유지 발전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리스크 관리의 초심이 필요합니다. 중국 비중을 줄이는 듯 보이지만 실제 그 공급망에 안착하는 다중화, 중국+1의 이중화 전략이 실효적입니다. 일본이 중국, 태국, 필리핀을 활용하듯이 말이지요. 공정에 대한 재검별을 하여, 중국이 아니고 미국도 아닌 독일 중심 유럽 공급망 같은 안전지대로 활로를 개척하고, 집 나간 제조 공장을 다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 국내 설비의 실질적 확장 투자를 고민해야 합니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공급망의 변용, 대안, 우회로 확보에 'ASEAN'국가들과의 협력 모색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G20 참석 전에 있었던 'ASEAN'과의 연석회의가 아쉬움이 남는 이유입니다. 어느 연유에서인지 현 정부는 이런 고민 없이 그저 미국, 일본을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로 그 자리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뜬금없이 '인태(인도 태평양) 전략'이라는 미국의 통상 안보 구호를 제창한 것이지요. 인도는 ASEAN 국가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니고 우리와 같은 공급망에도 없습니다.
또한 비인도적, 비근대적 국가 통치로 인권, 여성,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에게 융숭한 대접이라니요. 문재인 대통령이 환대할 때 비민주, 반인권 국가를 대접한다 비판하던 보수 언로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중국과 러시아를 비판하며 '경제적 손해보다 민주주의의 근본이 우선'이라는 대중국 견제의 메시지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거절의 빌미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 뜻하지 않은 시도와 그 의미는 있었습니다. 밑바탕이 어찌 되었든 일본과의 관계 회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미-중 패권에서 완충자로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는 동북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이 유이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최악의 한일 관계로 인해 산업협력은 고사하고 외교적 대화도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아시아 공급망에서 한국의 입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합니다. 과거사와 경제협력을 연결하지 말고 철저히 분리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과거사의 목소리는 시민 사회의 목소리를 최대한 증폭시켜 일본을 압박하고, 한편에서는 높은 수준의 경제 협력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제 그럴만한 채급이 되었으니까요.
지금은 선비의 가슴보다 상인의 셈 머리가 필요할 때입니다.
참조: 서울대학교 아시아경제 연구소/ 아시아 브리프/ 인하대학교 정인교 교수 발제 참조